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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정태진(1903-1952)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석인(石人) 정태진(丁泰鎭)은 1903년에 경기도 고원에서 삼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서울 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5년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함경남도 함흥의 영생 고등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18년에 결혼한 정태진은 아내 권정옥을 한국에 두고 혼자서 천요 마루 선편으로 유학을 목적하고 상항을 거쳐 대륙횡단 기차로 1928년 9월 20일에 오하이오에 도착했다. 그해 도미 한인 유학생은 총 63명이었고, 남자 48명, 여자 16명 그리고 아동이 6명이었다. 오하이오 주의 우스터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1930년 가을에 그는 뉴욕 유니온신학교에 입학했고, 당시 장석영도 유니온신학교 학생이었다. 당시 뉴욕에는 20여 명의 유학생이 있었는데 콜롬비아대학에 오천석, 박인덕, 김활란, 서은숙, 윤성순, 노재명, 최정즙, 문장욱, 이철원, 한승인이 재학했고, 뉴욕대학에 김마리아, 정일형, 황희찬, 한보용이 재학했고, 뉴욕시립대학에 송필수가 재학했고, 뉴욕음악학교에 박리근이 재학했다. 

그해 12월 25일 밤 7시 30분에 뉴욕한인교회에서 청년회 서은숙의 사회로 뉴욕교회 성탄 축하식이 거행됐을 때 정태진은 성경낭독 순서를 맡았다. 1931년 4월 26일에 뉴욕한인교회가 산간수림이 우거진 밴코트랜드 공원에서 소풍을 했고, 다음 달 30일에는 허드슨강변에서 즐거운 여름을 맞았는데 마음이 솟은 정태진은 노재명 등 9명과 함께 허드슨의 상류 앙컬스 맞은편까지 올랐다. 

정태진은 1931년 5월에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하고 영예의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해 학위를 받은 오천석 외 여러 명을 위하여 그달 6일 밤에 뉴욕한인교회에서 유학생회 주최로 환영식을 예정하였다. 다음 달 5일 하오 2시부터 뉴욕한인교회에서 북미한인학생총회 동부연회가 2박3일간 있었는데 그는 신한민보 뉴욕 통신으로 활동하면서 동부와 중서부의 학생연회를 취재하면서 작성하여 신한민보에 게재한 ‘유학생이 귀국 후에 취할 적응책 토구’라는 제하의 보고서가 3단을 차지했다. 그해 10월 15일에 재미조선문화회 기성위원회가 조직되었을 때 정태진이 윤홍섭 등 8명과 함께 위원이 되었다. 

1932년 그해 3월 27일 저녁에 뉴욕에 있는 조선 산업협회가 뉴욕한인교회에서 조선 산업협회와 학생과 사회를 대표하는 대표자 간에 일화배척 원탁회의가 있었을 때 김마리아와 강태모와 정일형과 허진업과 더불어 정태진은 학생측 대표로 참석했다. 그는 ‘인도에는 국민회의라는 큰 단체가 있지 않습니까? 조선에 어디 그런 것이 있나요?’라고 질문했고, ‘여러분이 말씀하신 기관을 다 응용하면 더욱 좋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우스운 일은 미국 유학생이 조선에 돌아가서 밤낮 양복만 입고 행세하니 그것이 옳은가요?’라고 질문했다. 그해 5월 6일 오후 8시에 뉴욕한인교회에서 모인 대한인유학생회 동부유학생회는 연회부 부장에 김세진을 임명하고, 정태진을 임아영과 박마리아와 함께 연회부 부원으로 선임했다.  

 

뉴욕 한인교회 임시목사

 

1932년 6월 23일 자의 신한민보는 ‘뉴욕교회 특별총회’라는 제하와 ‘다단한 교회 운전 문제를 토의’라는 소제목의 기사를 통해 정태진이 임시 목사로 임명함을 아래와 같이 내보냈다.

 

“지난 12일 아침 일요 설교가 필한 후 연하여 시내 뉴욕 한인교회에서는 남궁염 씨의 사회로 특별총회를 개최하고 교회 운전 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중요한 문제를 토의 협정하였다는데... 동 한인교회에서는... 반년을 곤란 중에 근근이 현상 유지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예산안 액면 대부분인 인건비란 전연 감리교 선교부와 부인회 의연금을 수입으로 삼아 오던바 이상 단체에서 또한, 막대한 재정 곤란으로 인해 계속 지출이 불가능하다는 정식 통지가 있어... 그 선후책을 토의하게 되었다.... 이제 그 중요한 가결은 여하하다.

1. 윤병구 목사는 하기 4개월을 정양하며 그 수입 전체를 교회에 기부함

2. 이상 윤 목사의 인건비인 적은 월급으로 하기 동안 교회를 치리하며 재정을 정리함

3. 정태진 군이 임시로 교회 목사를 봉직함

4. 그 외 소사 1명을 임명함

이번 총회에 모였던 일반 회원은 교회 발전을 위한 윤 목사의 희생과 그 노력을 치하한다더라.”

 

임시 목사 정태진의 목회 정황은 1932년 7월 28일 자의 신한민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태진씨가 임시 목사로’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시내 형성(유니온) 신학교에 재학 중인 정태진씨가... 7월부터 목회를 시작하여 성심으로 교회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더라”라는 기사를 읽을 수 있다.

정태진의 목회기간 있었던 교인의 형편을 아래에서 읽게 된다. 세계공황이 휩쓸던 당시 정태진의 목회 첫 달인 7월의 1일에는 유타 주 스프링 캐년의 탄광이 폐쇄되어 노동하던 백락선은 직장을 구하기 위하여 상항으로 갔고 그의 부인과 어린 자녀 둘은 살길을 찾아 6월 그믐에 뉴욕으로 왔는데 그들이 정태진의 첫 목회대상자였다. 

그날에 필라델피아에서 의학을 전공하던 손금성과 최제창이 여름방학 기간 뉴욕에서 직장을 구하던 중이었는데 손금성은 뉴욕한인교회에 체류했고, 최제창은 윤병구 목사의 농장에서 지낼 예정이었다. 2일에는 윤 목사의 장남 윤 조가 가주 딜라노에 있는 한시대의 농장에서 참외를 싣고 한유성과 스탁톤으로 가다가 식벽을 들이받아 사망하여 윤 목사가 가주로 떠나 그달 11일에 장례식을 하였다. 그달 8일에는 뉴욕에서 공부하던 이한상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이민국에 체포되었는데 국제청년회 한인부 이철원과 뉴욕한인교회 창립에 공헌한 킴벌랜드 부인이 이민국에 호소했으나 여의치 않아 부득이 귀국했다. 시내 뉴욕대학 영문과에서 가르치던 강영흘 부부가 하기휴가를 이용하여 여행을 떠났다. 

12일에는 공립협회 시대와 공립신문 발행 시기에 미주 한인 사회에 많은 공헌이 있던 정원도가 영원히 불귀의 길을 떠났다는 흉음이 들렸다. 13일에 화재로 인하여 뉴욕대학 학생 한봉용이 신변은 무사하나 귀중한 서적 등 피해가 적지 않았다. 14일에는 뉴욕에서 여러 해 거주하던 정원도가 그곳 시립병원에서 별세하였는데 친구들과 유지의 후원으로 유감없이 장례식을 치렀다. 17일에는 미시간 대학에서 문학사를 받은 이화여전 출신 김동준이 모교의 청빙을 받아 귀국길에 뉴욕을 방문하였다. 

20일에는 시내 차이나 가든에서 뉴욕학생회 주최로 워싱턴DC의 아메리칸대학에서 경제학으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김도연 박사 전별회를 열었다. 21일에는 뉴욕시립대학에서 공부하던 송필수가 저지에서 상선을 타고 귀국하였고, 24일에는 뉴욕학생회 야유회가 허드슨강변에서 있었다. 4년 전에 주일학교 대회에 조선 대표단 일원으로 도미했던 홍승한 의사가 캐나다와 뉴욕의 병원에서 실습을 마치고 뉴욕을 떠나 26일에 상항에서 귀국했고, 28일에 이두형 선생은 휴가 중 본 교회 기숙사에 투숙했다. 

루즈벨트가 대통령이 되던 8월의 9일에는 뉴욕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한봉용이 갑자기 귀국하게 되어 뉴욕한인교회에서 전별회로 모여 감상담을 교환하였다. 10일에는 본 교회 이사인 남궁염 가정에 득녀의 경사가 있었다. 세계주일학교 회의에 참석한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총무 정인과 목사를 초빙하여 21일 주일예배에서 말씀을 들은 후 특별강좌를 개최했고, 흥사단은 뉴욕흥사단 창설자인 그를 모시고 환영회를 가졌다. 29일 오후 8시에 뉴욕한인교회에서 뉴욕동지회 주최로 남궁염의 사회로 제23주년 국치일 행사를 거행했고, 이어서 장덕수의 특별강연이 있었다. 그달 말에는 인디아나 탬플대학을 졸업한 장기영이 뉴욕에서 공부할 예정이었다.

그해 9월 초에 뉴욕에 거주하던 전피득이 하와이로 건너간 자리에 지난 5월에 프린스톤대학에서 신학사학위를 받은 평양 숭전 출신 조승학이 그달 2일에 본 교회 기숙사에서 거주하면서 콜롬비아사범대학에서 공부할 예정이었다. 남방 모 대학을 졸업한 김종동은 경제상 문제로 뉴욕에 왔다가 안타깝게도 이민국에 체포되었는데, 도미할 때 출발지였던 상항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했다. 그달 8일에는 시카고 대학교수 염광섭이 캐나다 및 미국 심리학자대회에 참석차 뉴욕을 방문했고, 뉴욕에서 공부하던 김두현은 나성에서 사업할 예정으로 그달 29일에 뉴욕을 떠났다.

10월, 북미유학생 총회 한승인과 동부이사장 허 헌은 각각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각지를 다니며 유학생 총회의 발전책을 토의할 예정이었다. 뉴욕한인교회 청년회는 회장 강 일, 부회장 이재언, 서기 겸 회계 김은석으로 임원을 선정했다. 11월 5일에 뉴욕에서 열리는 전 미국 장거리 경주대회에 출전하려고 권태하가 뉴욕으로 왔다. 그는 과거 기록으로 능히 우등하리라고 자신을 가졌고, 조선 민족 대표로 출전한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23일 주일에 송별회에 참석한 허 연이 26일에 귀국했는데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정태진의 목회는 1932년 7월 초부터 10월 말까지 4개월간이었다. 1932년 11월 24일 자의 신한민보는 ‘뉴욕 윤 목사가 다시 교회 일을 보게 되어’라는 기사에서 “당지 한인교회 목사 윤병구 씨는 여름 동안에 그의 농원에 나아가서 계시고 그 대리로 정태진 씨가 교회 일을 본다고 함은 임의 보도하였거니와 윤 목사는 농사를 필하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오셔서 교회 일을 계속하여 본다더라”고 보도했다.

정태진은 1933년 2월에 뉴욕 콜롬비아대학에서 문학사학위를 취득하여 그달 9일에 귀국하여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김윤경, 이윤재, 정인승, 장기영, 최현배와 함께 조선말 ‘큰사전 ’편찬에 참여하였다가 1942년 9월에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고 1945년 7월 1일까지 함흥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정태진은 모교인 연희대학 등에서 국어학을 가르치면서 ‘한자 안쓰기 문제’, ‘중등국어독본’, ‘아름다운 강산’, ‘고어독본’, ‘조선고어방언사전’ 등을 출판했다. 1949년 한글학회 이사로 선임된 정태진이 ‘큰 사전’ 속간에 전념하다가 1952년 11월에 교통사고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1962년에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damien.sohn@gmail.com

08.0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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