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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남궁염(1888-1966)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남궁염(南宮炎)은 1888년 3월 17일에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선 중추부도사였던 남궁영의 아들이자, 구한말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와 언론인이었고, 찬송가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의 작사자인 한서 남궁억 장로의 외아들이었다. 그는 배재학당을 거쳐 경성관립영어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가 양양 군수로 있던 1906년 11월 초에 개화파 박영효의 도움으로 최정익과 함께 상항에 입항하여 그 해에 옥글랜드 공립관에서 거주하면서 공부하기를 서둘렀다. 그는 미국에서 데이빗(David)으로 통했다.

 

나성한인감리교회 설교자

 

최정익과 함께 공립협회 상항지방회에 가입한 후 남궁염은 신흥우의 권유로 1906년 12월 6일에 나성으로 이동하여 나성한인감리교회 한인기숙사에 들어갔다.

나성한인감리교회는 1904년 3월 11일에 프로렌스 셔먼 여선교사의 노력으로 탄생했다. 셔먼 여선교사는 1898년 2월에 미국 북감리교 의료선교사 해리 C. 셔먼 박사와 함께 내한하였으며, 남편 셔먼 박사는 광혜원에서 의료사역을 담당하다가 과로로 병을 얻어 1900년 도미하였는데 그해 7월 25일에 향년 31세의 나이로 나성에서 소천하였다. 

셔먼 여선교사는 한인들의 어려운 처지를 알고 출석하던 나성 제일감리교회와 나성 인근 포모나제일감리교회의 ‘젊은 부인 해외선교부’의 후원을 도모하던 중 미국 남감리교 남가주연회는 셔먼 선교사를 한인 선교책임자로 임명하고 신흥우를 평신도 목사로 임명하였다. 

1904년 3월에 ‘사우스힐스트리트 1519번지’에 기숙사와 예배처소를 마련한 후 셔먼 여선교사는 두 가지 사역을 감당했다. 한편, 셔먼 여선교사는 기숙사를 통하여 한인 노동이주자에게 직장을 알선하며, 한인 유학생에게 학업을 돕는 목적을 세웠다. 그리고 매일 학교를 개설하여 셔먼 선교사가 교장이 되고 한국인 유학생들이 교사가 되어 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여름방학 때 정규 학교제도를 가동하여 남가주 대학교, 학원 Academies, 초등학교 등에 다니는 유학생이 공부할 경우 한, 두 학년을 월반할 수 있었다. 본 매일 학교가 학교 내에 ‘고용부’를 두어 학교 재정을 자체적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한 것은 한국 교회의 삼자운동을 연상케 한다. 한인 유학생들은 노동하면서 생활비를 조달했고, 기숙사비도 냈으며, 한인 이민자가 운영하는 상점에서 음식을 구매하여 자취하였다. 신흥우는 위급할 때 신속하게 한인들을 섬길 수 있도록 대기했다. 1906년 12월에 박영순이 운영하는 한인여관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주로 한인노동자들이 묵었다. 

다른 한편, 셔먼 여선교사는 예배당을 통해 전도하였다. 한인 유학생들은 백인 나성제일감리교회에 등록하여 주일아침에는 나성제일감리교회 영어예배에 참석한 후 바로 셔먼 여선교사가 인도하는 주일학교에 출석했다. 그리고 주일오후에는 한인기숙사의 예배처소에서 한국어 주일 예배가 있었는데 남궁염 외에도 신흥우, 홍승학, 염달욱, 김우제 등도 설교를 담당했고, 셔먼 선교사가 설교할 경우 신흥우가 통역을 맡았다. 토요일에 엡윗청년회 활동이 있었으며 금요일에는 성경공부반을 운영하였다. 본 예배처소는 북미에서 최초로 세워진 한인교회가 된다. 본 교회는 2017년 현재 나성한인연합감리교회가 되어 있다. 

1906년 3월 28일 자의 ‘공립신보’에 따르면 북미주에 거주하는 한인 500여 명 가운데 장로교인이 세례교인 59명과 원입교인 53명으로 총 112명이었고 감리교 교인은 총 80여 명이었다. 이 80여 명이 설교자 남궁염의 설교목회영역에 포함되었다고 보면 된다. 

1907년 남가주연회는 한인 예배처소가 부흥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해 3월 28일에 남궁염은 박형모, 신봉희, 염달욱과 함께 대구의 서상돈과 김광제가 발기한 1,300만원의 국채보상취지서를 발표하며 나라사랑에 성큼 뛰어들었다.

1908년 8월 남궁염은 남가주대학교 예비과 2학년이었다. 신흥우는 남가주대학교 3학년에, 신봉희가 남가주대학교 예비과 3학년에, 방화중과 이순기가 중학교 2학년에 그리고 전시중이 1학년에 재학했다. 남궁염은 물론 이들은 모두 나성한인감리교회 한인기숙사에서 생활했을 것으로 본다. 

미약하지만 예배처소가 한인 유학생과 한인 이민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음에 자부심이 컸고, 본 한인사역이 한인 선교사 훈련학교와 방불하여 이들 한인이 한국과 미주의 한인들에게 끼칠 큰 영향력을 기대할 수 있었다.

나성 한인사역은 ‘일본사역’하에 있었으나 ‘나성도시선교회’의 별도사역으로 구별되었다. 1908년에는 '나성도시선교회' 외에 남가주대학교 이사였던 A.W. 애드킨슨 박사와 남가주연회 감독이 특별히 협력하였다. 1908년 현재 재적수는 신흥우를 포함하여 16명이었다. 한 달 건물 대여비가 18달러였고, 셔먼 선교사의 한 달 봉급이 25달러이었는 반면에 신흥우의 한 달 봉급은 20달러이었다. 이로써 한인사역에 필요했던 예산은 한 달에 60달러이었고, 1년에 756달러에 이르렀다. 미국 남감리교의 ‘내지 선교부’와 ‘교회연장부’ 등 두 기관이 285달러를 헌금했고, 그 외는 ‘나성도시선교회’가 후원했다. 그리고 기숙사비는 교회 운영비로 사용했다. 1908년 나성의 헌트 부인은 비록 가난했지만 손수 만든 ‘주머니’를 판매한 수익금을 한인 전도를 위하여 헌금하여 다른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1908년 12월 21일에 상항한인감리교회가 출판하던 ‘대도’ 제1권 제1호는 “로스앤젤레스 한인 미이미교회(나성한인감리교회)는 미국에서 제일 먼저 설시된 한인교회라. 비록 교우는 많지 못하나 범사에 재미있게 지낸다더라”고 희망찬 보도를 내보냈다.

1909년 나성 한인사역이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연회로 이임되어, 본 연회감독인 존 W. 와드만 목사는 한인사역을 위하여 300달러의 예산을 청구하였다. 이듬해 예배처소가 매그놀리아 애비뉴 1620번지로 이전했다. 그런데 그해 1월 16일 주일 밤 교회 재정 조사라는 이유로 구타하고 칼로 옷을 찢는 등 예배당 안에서 풍파가 있었다는 보도가 있은 후 그해 봄에 재정 부족으로 한인사역을 폐쇄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에 교인들이 매삭의연금을 내어 한인사역을 유지하기로 결정하고 남궁염과 신흥우가 계속 사역하기로 허락했다. 

남궁염의 유학을 이끌어준 신흥우가 남가주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석사학위를 받고 1911년 4월에 한국으로 귀국하던 그달에 남궁염은 나성에서 틈틈이 쓴 ‘웅변술’을 출판했다.

‘로벗슨 한인연합감리교회 85년사’에 따르면 김인제 전도사가 귀국한 후 염달욱 전도사가 김인제 전도사를 이어 나성한인감리교회를 목회했다. 

뉴욕한인감리교회 이사

 

유학생 송종익에게서 50달러와 여러 명의 후원을 받은 남궁염은 절친한 친구 신흥우가 귀국하던 1911년의 9월에 나성을 떠나 상항을 방문하고 그달 7일 오전 9시에 대륙횡단 기차를 타고 버지니아로 향했다. 그는 버지니아주 애쉬랜드에 있는 렌돌프 메쿤대학의 가을학기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그는 워싱톤문학회에 가입했으며, YMCA 사역자로 활동했고, 성경공부 리더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1915년부터 1년간 생물학 부강사로 학생을 가르치면서 교수경력을 쌓았고 용돈도 벌 수 있었다. 1916년에 그는 본 대학을 졸업하고 문학사를 취득했다. 본 대학을 졸업하면서 그는 바로 대학원에 진학하여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이 기간 그는 치베타피 쳅터를 설립하는데 한 몫을 맡았고, 과학회 회원으로서 생명학 연구에도 관심을 두었다. 

대학원을 졸업한 1918년에 남궁염은 워싱턴DC에 있는 시큐리티 스토리지 회사의 사무원으로 취직했다가 워싱턴 은행원을 역임하였다. 이 기간 그는 북미대한인유학생회 뉴욕지부 고문으로 선임되면서 이용직과 함께 북미대한인유학생회의 목적과 수단의 요령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했으며, 푸에불로 한인 일동과 이용직과 함께 “공부 안 하는 학생에게 경고문”을 신한민보에 게재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우남 이승만을 만나면서 그는 1922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으로 피선되었고, 1924년에는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재미 한인들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다. 

그 후 남궁염은 뉴욕으로 이동하였다. 뉴욕에서 직업소개소와 자기 사업을 운영하면서 뉴욕 한인감리교회에 출석하였다. 1924년 8월 20일 오후 8시에 본 교회에서 김영섭 목사의 집례로 우남 이승만이 소개한 우흥태의 딸 우조앤(우복자)과 결혼했다. 그는1932년 1월 31일에 안정수, 장석영, 이철원 등 7인 이사 중 하나로 선임되었는데 그해 6월 12일 주일에 설교를 마친 후 특별총회를 열고, 교회 재정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윤병구 목사는 4개월간 휴가하고 그의 사례비 전체를 교회에 헌금하며, 윤 목사의 사례비로 여름 동안 교회재정을 정리하고, 정태진이 임시로 교회 목사로 봉직하며, 교회 청소부 1명을 임명하기로 하였다. 교인들은 윤 목사의 희생과 노력을 치하했지만 7인 이사들의 헌신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남궁염의 교회 봉사는 1934년에도 이어져 본 교회 이사와 이사회 재정위원도 역임했으며, 1937년부터 1939년까지 교회 임원으로 활동했고, 1942년에는 건축부 회원으로 봉사했다. 

남궁염은 1928년에 조직된 뉴욕에서 대한인동지회 임원, 1933년에는 한국 대일전선통일동맹의 뉴욕지부 대표 후보, 1941년에는 다시 구미위원부 위원, 1942년 이후 북미동지회 총부장, 재미한족 연합위원회 경제위원 등의 직책에서 독립운동을 노력했다. 조국이 해방된 후 남궁염은 초대 뉴욕영사와 뉴욕총영사를 역임하면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4.19직후 우남 이승만의 하야 후 남궁염은 모든 공직을 사직하고 하와이로 이동했고, 올리브감리교회에 출석했다. 그 후 심장병으로 고생하다가 그는 1966년 5월 23일 와히아와 제너럴 병원에서 향년 77세로 소천하여 다음 달 1일에 누우아누 메모리얼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74년에 강원도 홍천 선영에 안장되었다. 2011년 그의 독립운동을 셈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damien.sohn@gmail.com

04.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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