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창해 소년’이라 불렸던 강영소(康永韶)는 1886년 2월 18일에 평안남도 증산면 취용리에서 강명화의 6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증산군 공립소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903년에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1904년까지 공부했다. 어머니 송 씨와 두 동생은 한국에 남겨두고 38세의 아버지 강명화와 25세의 형 강영대 부부와 7살 된 동생 강영각과 함께 19세의 그와 그의 부인이 진남포에서 청룡환 선박을 타고 부산을 거쳐 일본에서 차이나 선박을 타고 1905년 5월 29일에 노동이민자로 하와이에 이주하였다.
에와한인감리교회
에와 농장에서 노동하던 강영소가 1905년에 윤병구 등과 함께 하와이 한인사회의 친목과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예와친목회를 결성한 이듬해인 1906년에 김영식 목사가 담임하던 에와한인감리교회에 출석했다. 그해 학습을 받은 그는 이듬해에 15명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이 해 본 교회의 학습교인이 71명이었고, 세례교인은 70명이었다.
강영소는 1906년에 민찬호 등과 함께 하와이 한인 이주민의 자치계몽을 위하여 호놀룰루에서 공진회를 조직했다.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를 당하던 때 공진회는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와이에 있던 23개 한인단체와 통합하여 한인합성협회를 결성했고, 한인합성협회가 장인환과 전명운에 의한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 저격 의거를 계기로 1909년에 미국 상항의 공립협회와 통합하여 국민회가 될 때 강영소는 합성협회 대표 중 한 사람으로 활약했다. 국민회는 1910년 대동보국회와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로 출범했다.
상항한인장로교회
뇌병으로 인해 하와이 지방총회와 신한국보의 직책을 내려놓고 강영소는 공부하기 위하여 1910년에 상항을 거쳐 가족이 있던 엎랜드 인근 나성으로 이동했다. 이듬해 신한민보 총무로 초빙되어 상항으로 이동했는데 5월 28일에 상항한인장로교회에서 설교했고, 이후 이대위 목사가 목회하던 본 교회에 출석했다. 그달에 그는 본 교회 청년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는데 기타 임원으로는 전도국장 장나득, 학문국장 최정익, 인제국장 박영식, 교제국장 양주은, 통신국장 강 번 그리고 회계국장 박윤하였다.
1911년 11월 호의 ‘대도’에 따르면 강영소는 본 교회 유사 조원두와 이순기가 출타할 때에 황사용과 함께 유사로 선임되었다. 그런데 그가 하와이를 떠날 무렵에 자유교회 교인이었으므로 유사 임무를 사면 청원하였으나 ‘대도’는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생각하여 본 후에 결정하겠으나 별로히 큰 관계가 없을 것은 우리 한인의 단합심으로 밀접한 내정을 보아도 피차를 가릴 것이 아닌 줄로 생각하노라”고 보도했다.
스탁톤한인감리교회 전도인
1911년 12월 5일에 강영소는 상항한인감리교회 청년회 전도국장이 되었는데 회장은 황사용, 인제국장은 양주은, 학문국장은 최정익, 교제국
장은 차의석, 통신국장은 김대연 그리고 회계국장은 장나득이었다. 이듬해 1월 7일의 본 교회 청년회 통상회는 “우리 동포의 도덕성을 배양하기 위하여... 금년에 스탁톤 근방에 있는 동포들에게 전도하기를 결정”하였다. 그해 1월에 소노라 스트리트(Sonora Street)에 대한인국민회 지방회와 경찰소가 있을 만큼의 한인사회였지만 스탁톤에는 교회가 없었다.
1912년 2월 12일 자의 신한민보의 글 ‘스탁톤 농작 호황’에 따르면 스탁톤 인근에 자농과 병작이 9처나 되었고, 소유 토지가 총 2,127에이커에 달했으며 지난여름 감자 농사는 흥왕했다. 이들 중에는 블랙스루따에서 300에이커에 감자 농사하는 이재수와 박영순 외 4명, 280에이커에 농사하는 박승열과 장춘경, 자농하는 박창순, 스탁톤 쉐면아일랜드 국민원 근처의 전체에서 농작하는 김국민, 감자 농사하는 박창순, 숴맨아일랜드에서 500에이커의 감자 농사를 하는 박상섭과 한영호 등 12인, 아일톤에서 30여 동포가 노동하는 아스파라거스 농장을 주장하는 김찬일, 스탁톤 근경에 1911년 12월에 과실 농장을 신설한 박상섭, 박귀호 그리고 김장연이 있었다. 그리고 스탁톤에 있던 이순기의 상점은 인근 자농하는 140에이커 동포의 식료품을 공급하는데 점차 발전되어 매월 판매가가 1,000여 달러였으며, 만일 감자 수확철에는 이보다 몇 배가 되었다.
1911년 12월에 스탁톤에 허리상점이 신축되고 낙성식을 했다. 이런 가운데 환자도 있었는데 1911년 11월에 김상기가 퇴원하여 스탁톤 한인회관에 머물렀고, 이운옥은 원래 몸이 약했는데 그 달에 스탁톤 병원을 찾았다. 이렇듯 스탁톤에 많은 한인 노동자가 집결되었으므로 전도사역은 그만큼 절실했고,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스탁톤 전도 결정 2주일 후인 1912년 1월 21일 주일에 강영소는 전도를 시작했다. 예배장소는 신성원이 운영하는 여관이었다. 이곳에 국민회 경찰소가 있었는데 그 집세는 각 농장에서 스탁톤에 왕래할 일이 잦으므로 부근 각처 농장에서 배당하여 공동집이 되었다.
“전도의 자미를 많이 보았”고, 이에 장차 매 주일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하였다. 강영소의 스탁톤 한인 전도를 위하여 그해 1월에 상항 인근 백인교회인 오클랜드감리교회 청년회에서 매삭 2달러 50센트를 보조하기로 하였고, 본 교회 부인회에서 6달러 40센트를 후원하였다.
상항한인감리교회 청년회가 전도국장으로 황사용을 선임했던 1912년 3월 3일까지 강영소가 스탁톤 전도를 하였으므로 스탁톤 전도를 시작한 1912년 1월 21일부터 셈하면 그의 전도는 1개월 2주간이었다. 그런데 그해 6월에 상항한인감리교회 이대위 목사와 협의하여 스탁톤에 새로운 예배당을 건물을 설립하고, 예배당에 부속한 건물에 강영소의 부인이 거주하여 예배당을 유지하는 데 조력하였다고 하니 강영소의 사역은 계속된 셈이다.
가는 곳마다 헌신...스탁톤한인감리교회 전도인, 시카고한인교회 설립발기인 호놀룰루 공진회 조직, 안창호가 강영소 셋집에서 흥사단 조직...애국활동
1913년 5월 13일에 강영소의 셋집에서 도산 안창호가 흥사단을 조직할 때 강영소가 흥사단 발기인회 정원도의 대리로 활동하면서 단우 번호 2번이었다. 그 무렵 한인교회 청년회 회장을 역임했고, 회장직은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으로 선출된 그는 1916년 1월 25일의 취임식에서 “나 강영소는 대한인 국민회 북미 지방총회의 회장의 직을 맡은 바 거룩하신 하나님의 도움과 사랑하는 동포의 뜻을 의지하여 본회 헌장을 보호하며 우리 동포의 복리가 되는 일에 전력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선서문을 낭독하며 하느님의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4월에 딸 강단희가 인후병으로 6살의 나이로 하늘로 가는 고통가운데서도 그의 하나님의 사역은 중단되지 않았다.
강영소는 1918년 3월 9일 엎랜드에서 리버사이드로 가던 길에 기차와 충돌하여 문영운은 사망하였고 본인은 사흘 만에 퇴원한 후 그의 부인과 아들을 귀국시켰는데 태평양 선상에서 부인이 사망하는 비보에도 이듬해 11월에 대한인국민회 북미 지방 총회장이 된 그는 나라 사랑을 꿋꿋이 지탱했다.
1921년 6월에 사업을 목적으로 하와이로 가서 정원명과 회사를 세웠다가 이듬해 12월 미국으로 돌아온 강영소는 강혜순(또는 강수순)과 결혼한 후 넷째 동생 강영상과 함께 시카고로 이주하여 서양식당 사업에 몰두하여 ‘강 브라더스 카페테리아 회사’를 창립하여 크게 성공했다. 이런 가운데 그는 상해임시정부, 국민회, 흥사단에 후원했다.
염광섭과 황창하 등 학생들이 시카고 남쪽의 김일선의 ‘레이크 팍 애비뉴’의 셋집에서 1922년 3월부터 기도회 모임을 시작했고, 그해 9월 강영소와 김 경 등 일부 한인 사업가들이 북쪽 링컨 애비뉴의 강영소의 집에서 기도회를 시작했다. 두 해 후 8월 24일에 학생 그룹과 사업가 그룹이 공동으로 삼일운동 33인 중 한 분이었던 김창준 목사를 중심으로 시카고한인교회가 설립될 때 강영소는 김 경, 김원용, 박장순, 염광섭, 조희렴, 차의석 등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그해 이사부원으로 활동했고, 그의 부인은 주일학교를 담당했다. 1927년에 강영소 부부를 위해 만찬을 한 후 게재한 사진을 찍었다. 강영소는 우측 첫 번째 서 있고, 그의 부인은 우측 첫 번째 앉은 사람이다. 매년 이사부원이었던 그는 1931년에는 이사부장이 되었다.
갈홍기 목사가 부임하던 1931년의 8월에 강영소는 고혈압으로 실신하면서 6개월간 입원했고, 이후 활동이 제한되었다. 한승곤 목사가 시무하던 1934년의 8월 26일에 강영소는 병이 재발하여 향년 48세에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주례하며 설교를 마친 한승곤 목사는 “우리를 두고 아주 가시는 ‘창해 소년’의 몸은 화초 동산 가운데 세상만사를 다 잊어버리고 그린 듯이 누워있구나”라고 한 후 마지막 그의 얼굴을 차례로 본 다음 발인했고, 그는 어빙 파크 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독립 운동을 헤아려 2011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매부 양우조는 1963년에 독립장을, 동생 강영각은 1997년 건국포장을, 2012년에 아버지 강명화와 동생 강영문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2013년에 형 강영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그해에 동생 강영상은 대통령 표창을 받아 강영소의 가족은 독립운동의 명문 가문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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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4.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