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염세우(厭世雨)는 1873년 1월 1일에 한국 강원도 김화군 군내면 천동읍의 만석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감리교인이었다. 결혼한 후 그는 혼자서 하와이 노동 이주자로서 1904년 11월 17일에 일본 고베에서 시베리아 기선을 타고 그달 29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을 때 20세로 기록되어 있다. 그가 김화 지역의 수십만 평의 토지와 임야 등 가산을 정리하여 망명하였다고도 한다.
나성한인장로교회 영수
염세우는 하와이에서 나성으로 이주하였고, 1907년에 백경태, 이관식, 조태윤, 한형식, 이종찬과 더불어 나성한인교회 교인이었다. 그는 1913년에 나성의 다운타운인 노스 벙커힐 애비뉴 240번지에서 거주했는데 본 건물은 1920년 초에 나성한인장로교회가 된다. 그해 8월에 신한민보의 유희구락부가 낸 유희 문제에 염세우가 다른 17명과 함께 당선되어 컬리버 유람기나 산술격몽 한 권씩을 상품으로 받았다. 이듬해 염세우가 가입한 권업동맹단 단원은 33명으로 자본금은 33,000달러였으므로 그의 몫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2년 후 1916년 5월에 장부병으로 다년간 고생하던 염세우는 클너라버톤 병원에서 수술한 후 퇴원하여 박재형의 집에서 휴식하였으나 매우 고생하였다. 그런데
나성 다운타운의 로스앤젤레스 스트리트 512번지에서 거주하던 1918년의 3월 11일에 염세우가 김영희와 한봉석과 동업하여 나성 중국촌에 서양음식점을 열었다. 본래 영업하던 음식점이었으므로 낯익은 손님이 많고 기구가 갖춰져 날로 잘 되었다.
그해 9월 12일에 45세였던 그(Joe Yum)가 제출한 제1차 세계대전 징병 서류에서 중간 체구였음을 엿본다. 당시 가주 산호제에서 동업으로 상업에 종사하였고, 이곳 사우스 1가 182번지에 거주하였으며, 가장 가까운 친척에 14년 전에 마지막으로 본 아내를 적었을 때 눈물을 글썽였을 것 같다.
나성한인교회 순행목사였던 민찬호가 1919년에 하와이로 전임한 후 홍치범이 순회목사가 되었을 때 나성에 거주하는 100여 명의 동포 중 교회에 출석한 장년 교우는 40여 명이었다. 염세우는 노진국과 박일우와 함께 본 교회 영수로 재직했으나 구체적인 사역을 찾기란 쉽지 않다. 영수 외에도 정인영, 정지영, 염달욱 조성환, 주영한 그리고 전진이 집사였고, 김이선, 박순애 그리고 임화연이 권찰이었다. 그해 11월 25일에 신한민보는 신실한 교회직원과 예배당이 편리하고 설비가 잘 되어있어 부흥의 희망이 있다고 보도했다. 그가 영수로 있었을 때의 예배당은 두 곳으로 1910년대의 예배당은 올리브 코트 2번지였고, 1920년대 초의 예배당은 노스 벙커힐 스트리트 240번지였다.
염세우의 영수직은 뉴욕으로 가던 때까지 계속되었다면 길어도 2년이 되지 않는다. 그가 사무원으로 활동하면서 1921년에 거주했던 나성 다운타운의 사우스 플라우어 스트리트 1053번지가 나성에서의 마지막 주소였다.
염세우의 나라 사랑은 고향 사람이자 임시정부 군무과장이었던 염온동의 영향보다는 염온동의 사위인 독립운동가 박용철의 형인 박용만의 영향이 더 컸던 것 같다. 자기보다 8살 아래지만 그는 고향 인근의 철원에서 태어났고, 그보다 1년 뒤인 1905년에 도미하였는데 나라 사랑에는 함께 했다.
염세우의 나라 사랑은 공립협회 가입이었고, 1917년에 국민회 나성지방회 회장 이영수가 사임함에 따라 그해 3월 9일에 그의 뒤를 이어 선임되면서 그의 나라 사랑은 전개되었다. 이날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밀입국한 김성원이 나성 감옥에 갇혔다가 멕시코로 되돌아갔으며, 홍안방이 노동소를 개설하였고, 박재영이 여관을 신설하였으며 최상목은 양해수리점을 열었음을 보고했다. 그런데 그해 5월 11일의 통상회에서 이영수가 다시 회장이 되어 염세우의 회장직 기간은 2개월이었다.
삼일운동이 있었던 1919년에 염세우의 나라 사랑이 활발했다. 나성지방회가 그해 4월 6일에 필라델피아에 홍치범 목사를 대표로 파송하면서 대표원이 쓰는 경비는 매 회원이 6달러씩 담당하기로 하였을 때 염세우가 김창운과 정봉규와 더불어 수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다음 달 28일에는 그가 위국 헌신하겠다는 청원을 중앙총회에 소개키로 한 일이 북미총회 임원회에 경유하였다. 그해 8월에는 박재형, 송종익, 주영한과 함께 그가 나성파출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나성 지방공채 모집위원이었던 그는 전 진과 염달욱과 함께 그해 10월 8일에 구미위원부장 김규식에게 100달러, 50달러, 25달러 등 세 종류의 공채를 각각 50장씩 총 150장의 공채가 도착하였고 주영한에게 100달러 치의 공채를 발매하였다고 보고하였다.
독립선언기념 제1회 경축회가 1920년 3월 1일 오전 10시에 7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나성중앙총회에서 있었다. 홍치범 목사가 개회한 후 일동 경축가 합창, 기도, 개회사, 대통령 교령 낭독, 독립선언서 낭독, 국기 경례식, 만세삼창, 이중창, 임시정부 헌법낭독, 독창, 축전 소개와 중앙총회장 윤병구 목사의 연설 초본낭독, 연설, 애국가 합창으로 오전 12시 10분에 경축회를 마쳤다. 두 번째 모임으로 조성환이 개회하면서 애국가 합창, 연설, 독창, 연설, 독창, 4인 연설, 기도로 하오 6시에 폐회했고, 이후 만찬회가 있었다. 이날 염세우는 임시정부 헌법 낭독, 연설 그리고 폐회기도 등 세 번의 순서를 맡았다.
염세우는 1916년 12월과 1917년 12월에 국민의무금으로 5달러를 내고, 1919년 5월에는 독립의연금으로 15달러를 냄으로써 나라 사랑을 현실화했다.
뉴욕한인교회
뉴욕에는 한인 유학생과 이주 한인 등 100여 명의 한인이 거주하였다. 뉴욕한인교회는 1921년 4월 18일에 설립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제3회 삼일절 기념식이 있었던 1922년 3월 1일 저녁에 삼일절 대회 평가모임에서 미국 육군 킴벌랜드 준장의 부인이자 뉴욕 친한회 회장이었던 킴벌랜드 여사의 제의로 함께 참석한 랄프 W. 삭크만 목사가 섬기던 메디슨 23가의 메디슨 에비뉴 감리교회를 사용해도 좋다는 제안으로 설립되었다고도 한다. 당시 목사는 임종순이었고, 60여 명의 한인이 출석하였다. 염세우는 1921년 가을이나 1922년 봄에 뉴욕으로 이동했으므로 뉴욕한인교회 창립 멤버가 아닌가 싶다.
염세우는 1922년에 뉴욕 지방정부 소관 길보아 수도건축회사의 대표 노동주무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그해 10월 19일에 신한민보에 다음과 같이 한인 노동자 모집을 광고했다. “장래를 위하여 이상을 가지고 노동하는 이는 길보아로 오시오. 매일 24시간씩이라도 할 일이 있고 2년 동안이나 할 일이올시다. 2년을 지난 후에는 메스체슷에 더 크고 좋은 일이 있습니다. 참 좋은 기회올시다. 침상과 금침과 찬물 더운물과 목욕실과 전기 등과 다 구비하게 차려주고 매일 개인에게 다못 10전씩 회사에서 받습니다. 식사는 자유로 하며 형제들의 모든 요구는 본인이 편리하도록 수용하여 드리겠소이다. 공전은 각각 일의 종류와 일군의 장기를 따라 고하가 있나이다. 공전은 시세를 따라 가감이 있습니다. 지금 주는 공전은 매시에 35전으로 그 이상이올시다... 내년 2월부터 여러분 오실 계약을 합니다. 본 회사에서 각인의 차비를 미리 주고 오신 후 매삭 월급에서 조금씩 제하기로 하나이다. 오실 이가 100명 이상의 청원 편지를 하면 본인이 명년 2월에 여러분을 모시러 가주로 나아가겠소이다. 일은 보통 삽질과 혹 곡괭이질 여러 종류의 상일이외다. 더 알아보기를 원하시면 본인에게 편지로 알아보시오.”
뉴욕한인교회는 5인 건축위원회를 구성하여 1923년 초에 미국 감리교단의 뉴욕시 선교/교회 확장 위원회의 5,000달러의 재정후원으로 맨해튼 시가의 웨스트 21가 459번지의 건물을 구매하였다. 본 건물은 지하실이 있는 4층 벽돌 건물로 대지는 17.5x100피트였다. 그해 4월 15일에 임종순 목사의 인도로 최초로 주일예배를 이 예배당에서 드렸을 때 염세우도 동참했을 것이나 교회생활은 소극적이었던 것 같다.
교회 이름은 Korean Church and Institute였다. 한인들을 대표하는 기관이라는 창립의 이념에 따라 본 예배당에는 25명가량이 기숙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며, 한국어와 영어를 가르치는 야학도 있었다. 1924년 뉴욕 감리교선교부 연감에는 교인수는 작지만 교인들의 사기는 왕성해서 건물을 유지하는데 소요되는 부담금을 매월 정기적으로 갚았으며 빚은 7,000달러였다.
염세우의 나라 사랑은 국민회 뉴욕지방회에서도 여전했다. 1923년 1월 5일에 통상회에서 그가 총무로 선출되을 때 회장에 천세헌, 부회장에 이원준, 서기에 이재희, 재무에 정원도, 법무에 임 초, 학무에 조병옥, 실업에 정인수, 구제원에 김윤옥 그리고 대의원에 곽림대였다. 그달 8일에 본 지방회는 총무는 학무와 협동하여 강연회를 자주 열어 회원의 지식 교환을 실행하기로 하였으니 바빴을 것이다. 그해 3월 1일 오후 8시 30분에 뉴욕지방회는 삼일절 경축회를 거행하였는데 12시가 되어서야 마쳤는데 그는 순서를 맡지 않았다.
염세우는 1923년 8월 23일에 뉴욕에서 향년 50세에 소천하였다. 뉴욕이주 2년이었고 도미한 지 20년이 되던 해다. 이튿날 그(Say Laren Yum)는 뉴욕 퀸즈 메스패스 소재 마운트 올리벳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왼쪽에 월계수가 그려진 그의 묘비에 “한국인 렴세우지묘 민국 5년 8월 23일 영면”이 새겨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했으나 훈장 미전수 독립유공자 명단에 있다. 뉴욕한인교회는 2020년 2월 29일에 그와 애국지사 황기환 선생을 위한 추모예배를 드렸다.
damien.sohn@gmail.com
02.27.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