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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우흥태(1878-?)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우흥태(禹興太)는 1878년 2월 26일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연희전문학교 동지회 흥업구락부와 관련된 것으로 보아 그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것 같다. 그는 서울 YMCA에서 활동하면서 이승만과 교제했다.

우흥태(Wooh, H.T)는 1914년에 45세의 나이로 도미했다. 신한민보는 ‘우씨 상륙’이라는 제하에서 “코레아 선편에 입항한 우흥태 씨는 이민국 검사를 받은 결과로 엔즐아일랜드 병원에 들어가 수일 동안 구충병을 치료하고 본월(6월) 22일에 의사의 허가를 얻어 무사히 상륙하였다더라”고 보도했다. 흥사단 단우 1호인 하상옥이 1914년에 우숙자와 결혼하였는데 우숙자가 우흥태의 딸이었으므로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도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흥태가 딸 우숙자와 함께 도미했는지는 더 조사할 사항이다. 상항에 상륙한 그는 이듬해인 1915년 11월에 대한인 국민회 북미총회 상항 지방회에 입회했다. 

그 후 우흥태는 콜로라도주 피아블로로 이동했다. 도미 3년 후인 1917년에 13세의 딸 조앤과 10세의 톰이 한국에서 피아블로로 이주했다. 

 

피아블로 한인감리교회 전도사

 

1917년의 9월 10일에 미국 콜로라도주 피아블로 지방에 거류하던 한인들이 피아블로한인감리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런데 본 교회 예배장소가 기숙사 안에 있었다는데 무슨 기숙사인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1918년 4월 14일에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 피아블로 지방회가 조직되면서 이스트 애브리엔도 애비뉴 1319번지에 회관을 설치했는데 이 회관을 빌려 예배처소로 이전했을 수도 있다. 이 회관은 1902년에 건축한 건물로 5유닛인데 이 중 한 유닛에서 예배를 드렸을 것이다. 이 건물은 오늘날에도 잘 보존되어 있다.

김원용이 쓴 ‘재미한인50년사’에 따르면 우흥태는 피아블로한인감리교회 전도사였다. 교회가 개척한 1년 후인 1918년 4월에 그의 사위 하상옥 가정이 사업을 위하여 상항에서 피아불로로 이주하였으니 교인 한 가정이 늘었다. 

사위 가족이 이주하던 1918년의 9월 12일에 40세의 우흥태(H.T. Woo)는 세계 제1차 대전 징집서류를 제출했다. 본 서류에서 따르면 그는 콜로라도 철강회사에서 노동자로 취직했다. 1920년 인구조사에는 그의 직업이 더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우흥태(Wooh, H.J.)가 철강 공장에서 철강오프너(Wire Opener)로 노동했다. 그러므로 그는 오늘날의 평신도 자비량 전도사였다. 

위의 세계 제1차 대전 징집서류에서 우흥태의 인상착의를 엿볼 수 있다. 그의 키는 ‘크다,’ ‘중간이다’ 그리고 ‘작다’의 삼다 선지에서 ‘작다’라고 했고, 체구가 ‘가늘다,’ ‘중간이다’ 그리고 ‘퉁퉁하다’의 삼다 선지에서 ‘가늘다’라고 했으며, 갈색 눈에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것으로 적혀 있다. 

우흥태의 1918년도 거주지는 위의 세계 제1차 대전 징집서류에는 ‘아브리엔도(Abriendo) 1133번지’였다. 이듬해 피아블로 전화번호부에는 ‘이스트 아브리엔도 애비뉴(East Abriendo Ave) 1133번지’라고 적혀 있어, 이 주소가 정확한 주소로 보인다. 이 주소의 주택은 1900년에 건축하였고 654스퀘어 피트(18.4평)에 방이 둘 있었고 거실이 있는 집이었다. 게재한 사진은 2020년의 주택이다.

1917년 9월 20일 자의 신한민보는 “피아블로 동포가 수십 인에 지나지 못하는 터인데 종교상 신앙심이 건전하여 노동 생활이 공총한 가운데 한 주일에 한 번씩 기도회를 열어 영의 자애를 느끼고” 있음을 보도했다. 이어서 대한인 국민회 북미총회 가옥 은행채 보상에 72달러 기부, 국치기념에 동맹저금을 실행, 하란사 씨의 발기한 서울 정동감리교회 오르간 연조에 40달러 기부, 학생 원창의 씨의 치료비 15달러 기부와 이후 병원비 후원 약속 등 그해 있었던 좋은 사역을 나열하였는데 이들도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실행했을 것으로 본다. 

1917년 8월 30일자 신한민보에 따르면 한인감리교회가 설립되기 1달 전인 1917년 8월 21일에 한인학생 원창의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곳 사립병원에 입원했고, 1918년 1월 17일 자의 신한민보에서 위에서 언급한 병원에 입원한 한인유학생 원창희가 정신병으로 작년 8월 22일에 입원하였는데 매일 차도가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곳 동포들이 고학생을 위하여 심히 걱정하면서 3차에 걸쳐 후원비를 모금했으므로 우흥태 전도사의 기도와 심방이 잦았을 것이다. 

3차에 걸쳐 병원비를 후원한 피아블로 후원자는 박춘근, 이기욱, 도익모, 박인선, 이춘식, 홍승억, 김원용, 강화서, 허도선, 이원식, 임학윤, 우 일, 신문채, 박상섭, 허도선, 조원두, 유덕형, 윤승렬, 장한조, 이근수, 양국환, 최영기, 박귀호, 전진택, 김정진과 우흥태였다. 이들 대부분이 교회에 참석했을 것이다. 총 156달러를 후원했고, 우흥태는 두 번에 걸쳐 40달러를 후원했다. 

1919년 6월에 우흥태가 북미총회 한인교회 공의회에 4달러를 헌금하였다. 그 외에도 푸에블로에서 헌금한 사람은 이기욱, 정봉흥, 고목윤, 신기선, 윤승렬, 강화서, 홍희주, 우영빈, 하상옥, 윤영택 그리고 이육봉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교인인 것으로 보인다. 

피아블로에 거주했었던 김원용의 재미한인50년사는 본 한인감리교회가 1919년까지 2년 동안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우흥태의 사역기간은 2년이 된다.

 

1914년 딸 결혼식 참석차 도미, 피아블로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자비량 사역

광복위해 국민회 활동, 1925년 귀국 서울 정동교회 등서 일요강화 강사 활동

 

동포사랑과 애국운동

 

1917년 12월에 보도된 1918년 북미총회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피아블로는 4표이므로 피아블로에 거주하는 북미총회 회원이 4명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피아블로 지방회 설립에 우흥태가 주도했다. 피아블로 지방회 청원서에 따르면 청원 모임의 회장에 우흥태였고, 서기에 이의춘이었으며, 청원자는 김정진, 이춘식, 박인선, 정흥봉, 신기선, 이원식, 양국환, 김원용, 안천주, 박희영, 임학윤, 이영기, 이기욱, 조의환, 서승규, 황동성, 허도선, 남승회, 이상규, 최영기, 윤승열, 홍희주, 박춘근, 조 극이었다.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 이대위의 허락으로 그달 14일에 지방회를 조직했고, 우흥태는 대의원에 선정됐고, 이스트 애브리엔도 애비뉴 1319번지에 회관을 설치했다. 그런데 이 주소의 다른 유닛에서 양국환이 1년 전에 식당을 하였다. 

1919년에는 우흥태가 대한인국민회 북미 지방 피아블로 지방회의 학무원으로 선임되었고, 그의 사위 하상옥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2월 1일에 대한인국민회 창립 10주년 기념식에서 우흥태는 축사 순서를 맡았다. 이날 국민회가를 부른 우영빈 여사와 우영택이 우흥태의 부인과 아들이 아닌가 싶다. 

그해 3월 세계 제1차 대전 전시 미주한인의 금력 찬조에 우흥태는 자유 공채로 100달러, 전시 저축표로 30달러 그리고 적십자회와 기타 전쟁보조금 11달러를 사용했다. 그해 4월에는 그가 피에블로 지방 독립 의연 수전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그달 15일 오후 7시에 푸에불로 지방회 회관에서 회원 일동이 만강 열정과 무량 환희를 가지고 대한 공화국 건설과 신정부 조직을 축하하였는데 하상옥 회장의 사회로 개회를 선언한 직후 우흥태가 기도했다. 그해 5월에 우흥태는 정홍봉과 홍희류와 함께 피아블로 지방회 파출소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정한경이 1919년 8월 5일에 미국인 중앙기독교회 예배당에서 한국의 현상과 한인 친교회를 소개하였을 때 한인 친교회에 가입한 백인이 15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우흥태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그해 9월 13일 오후 7시 30분에 한인동포 전체가 애국심과 적개심으로써 정중하게 국치기념식을 거행했을 때 그가 기도순서를 맡았다. 국치기념식을 마친 후 만당의 비량함이 극도에 달하여 사람마다 거의 눈물을 뿌리게 되었다. 한 동포가 오늘 하루에 번 돈을 모아서 장래 국가사업에 보태어 쓰게 하자고 제안하였고, 그날 번 돈을 쏟아 놓으니 총 64달러였다. 위원 3인을 선정하여 이 운동을 계속하기로 가결하였고 장래 애국 저금회가 조직될 조짐이 있었다. 그해 9월 우흥태는 적십자회 지부에 5달러를 기부했고, 그의 딸 조앤은 2달러를 기부했다. 

 

귀국

 

1918년에 제출한 우흥태의 세계 제1차 대전 징집서류에는 부인이 한국에 있다고 적혀 있고, 1919년 피아블로 전화번호부에 따르면 우흥태의 부인인 새라(Sara)가 피아블로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1920년 연방정부 인구조사에 없었으므로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닌가 싶다. 그해 1920년 7월에 딸 우명원과 사위 하상옥이 상항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우흥태는 외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우흥태는 씩씩했다. 그는 신기선과 함께 구미위원부 피아불로 지방위원, 도익모와 이기욱과 함께 광복사업에 필요한 재정 마련을 위한 피아불로 애국 적금위원,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피아블로지역 성탄의연 수합위원으로 활동했다. 우흥태의 딸 조앤(복자)이 조지워싱턴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1924년 8월 20일 뉴욕에서 남궁억의 외아들이자 구미위원부의 남궁염과 결혼식이 있었으나 우흥태가 참가하지 못해 중매쟁이 이승만이 신부를 데리고 입장했다. 아마 한국가는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이듬해 5월에 일본 외무성이 우흥태를 불량조선인으로 기록하였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우흥태는 가주 리들리에서 지내다가 상항의 딸집에서 묵은 후 천요 마루 편으로 그해 1925년 11월 24일에 혼자 귀국했다. 귀국한 우흥태는 서울 정동교회와 중앙교회와 상동교회에서 일요강화의 강사로 활동했다. 1934년 8월 12일부터 1937년 8월 8일까지 그가 강연한 제목은 ‘고해를 어찌 건널까’ ‘유혹시대’ ‘해방은 찢어진 휘장’ ‘암흑에서 출하여’ ‘산 소망’ ‘각성’ ‘십자가는 권능’ ‘유수 불식 기갈이라’ 그리고 ‘탐욕은 허사’ 등이었다.

1938년 8월에는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의 연희전문학교 동지회 흥업구락부 관계보고서는 민족혁명을 목적으로 하는 동지회 사건 검거와 관련하여 우흥태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조국이 해방된 다음 달인 1945년 9월에 작성된 ‘임정 외에 정권 참칭하는 단체 및 행동 배격 결의 성명서’에 우흥태의 이름이 보인다. 그런데 이후 우흥태의 이름을 찾기란 어렵다.

 

damien.sohn@gmail.com

01.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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