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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김 강(1902-?)

김 강(金 剛)은 1902년 10월 5일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출생했다. 그는 1921년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에 졸업했다.

협성신학교를 졸업한지 2년이 되던 1928년 7월 6일에 김 강이 만국주일학교대회에 참석하려고 한국에서 30여 명의 대표단 일행 중 한 사람으로 도미했다. 그 외에 단장에 김관식 목사였고 홍승한 의사, 김태석 교사, 이병선 교사, 장태완 교사, 이원하 교사, 김중수 목사, 허 은 교사, 위명호 교사, 김규형 교사, 김내칠 교사, 갈홍기 교사, 이 교 교사, 박병곤 대학생, 김진국 교사, 차순석 교사, 송필수 교사 등이 있었고, 변성옥 목사와 김준옥 목사는 이미 나성에 도착하여 준비 중이었다. 김 강은 미국에 남아 다이아몬드 김으로도 불렸고, 그는 콜라라도 광산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성 한인장로교회

 

김 강은 나성한인장로교회에 등록했다. 1929년 9월에 오늘날의 예배당이 세워졌으므로 그가 등록할 때 본 교회 예배당은 게재한 사진의 로스앤젤레스 35가 스트리트 1624번지에 있었던 건물이었다. 1929년 9월 5일 자 신한민보는 “나성교회”라는 제하에 다음과 같은 글을 게재했는데 이를 통하여 당시 나성한인장로교회를 엿볼 수 있다. 

“20여 년 전 우리 불쌍한 동포들이 수고하고 노력하신 결과 오늘은 한인장로교회가 승격상으로 인증이 되고 또한 우리 한인 예배당의 소유가 있으니 이것이 다 우리 선진들의 노심초사하신 것이라. 과거 20년 전 역사를 듣건대 다들 이민으로써 아무 보호도 없이 언어 풍속이 다른 수만리 해외에 오셔서 그 얼마나 숙막한 생활을 하였을 것이며, 남모르는 눈물 대장부의 가슴에 사무쳐 있었을 것인가! 언어가 불통함도 불구하고 백인들과 상종을 하며 피와 땀을 내어 푼 전이라도 모아 그들의 강산 안에 계신 부모 형제 처자를 돕고 일비조로는 우리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이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여 오며 정든 고향이 저 왜적에게 먹힌 바를 분히 여겨 한편으로는 정당을 조직하고 일반으로는 교회를 세워 피와 땀을 흘려 마른 그 주머니를 민족과 나라를 위하여 바쳐진 그들의 정성으로 오늘날 우리 한인이라 하는 이름이 영영 죽지 않고 살았다함을 11년 3월 1일에 세계만방에 천지가 진동하도록 발휘된 것도 미국 계신 우리 동포들과 인도하시는 분들의 희생하신 싹이라. 이 사람이 미주 온 후로 처음에는 우리 아이와 민족에 대하여 낙심천만을 하였음은 미국 계신 여러분에게 너무 많이 믿고 기대하였던 까닭이라. 빈 죽을 들고 오신 그분들의 형편과 처지를 살핀 후로는 이것이나 만족하고 감사한 마음이 스스로 생겨난다. 혹 무슨 잘못함이 있다하여도 응당 성이 나다가도 일반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된다. 소위 우리 신도 학생이라 하는 이들이 그분들의 충성과 성실한 마음 애국심을 끝까지 받들 수가 있을까 하여 할 수 있으면 우리 배웠다는 유학생들은 아무쪼록 그들이 하신 일을 헛되지 않도록 충성을 다하여 완전히 하여 가는 것이 나의 책임이요 할 바라. 자각하는 나는 우리 민족의 살 길은

 완전히 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교회를 완성케 함에 있다하여 우리 한인의 상당한 소유의 예배당과 목사가 있기를 바라고 모든 일반 교인은 정성껏 전능하신 주의 빌 던바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하여 첫째는 한인의 운하든 예배당을 사게 되었고, 둘째는 덕의와 학문이 겸비하며 신앙과 사랑과 충성이 가득하신 귀하고도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심복 종 김중수 목사가 작년 만국 주일학교 대회에 오셨다가 우리 없는 양,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나성 한인을 위하여 우리의 간절한 청원으로 목사가 되신 후로 더욱 모든 교인을 신령과 진리로 인도하시며 덕을 세우기 힘써 나성 장로교회는 더욱 반석 위에 섰으며 일반 직원 일동과 교인들은 마음을 협력하여 하나님의 일을 충성으로 하시니 이일마다 하나님의 영광 돌릴 것이며, 감사할 바이라. 이 앞으로 더욱 우리의 우승과 새로운 볼 생명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은 우리 지금 예배당은 협소하여 새로이 회당을 건축하려고 경영하는 중 직원 일동과 교인 전체가 없는 것을 있게도 하시고 있는 것을 없게도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소원을 이루시려고 미리 정하사 당신의 사랑하시는 딸 미세스 스트윗과 미쓰 월나씨로 하여금 우리의 뜻을 이루도록 하여 주셨다. 이후에 인사 소식 중에 가장 한인과 인연이 깊고 은인이 되시는 이 두 분을 소개하려한다. 비록 외국인 들이나 우리 민족 사랑하기를 골육같이 하시니 이는 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크신 사랑이라. 이 교회는 하나님의 권능 하에서 영원무궁토록 있을 것이며 만사형통할 것이다.” 

본 교회 임원은 목사에 김중수, 장로에 정지영, 전호택, 이순기, 집사에 이성민, 손승조. 이영기, 현피터, 주일학교 교사에 김 강 부인, 손동달, 임영신, 이헬렌이었다. 김 강은 본 교회 임원이 아니었지만, 그의 부인은 주일학교 교사임을 알게 된다. 그 부인은 주일학교 교사뿐만 아니라 한글학교 교사로도 활동했다. 그런데 본 교회 목사 김중수는 김 강과 함께 만국 주일학교 대회에 참석차 도미한 분이다. 

 

만국주일학교대회 대표단으로 1928년 도미, 1931년 나성한인감리교회 지방전도사로

1945년 OSS 입대했으나 1946년 미공산당 가입 혐의로 재판 1955년 추방돼 북한행 

 

 

나성 한인감리교회 전도사

 

나성자유교회가 나성한인감리교회가 된 이듬해인 1931년 1월 4일 오전 12시 50분에 버들롱 예배당에서 미국 남감리교 나성감리사 데비쓰 목사가 사회하고 김성권이 기도한 후 계삭회를 열어 나성한인감리교회 임원을 선정했다. 이날 김 강이 지방 전도사로 선임되었다. 김 강이 한국에서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으므로 본 교회 지방 전도사 선임은 자연스럽게 보인다. 이날 본 교회 목사에 황사용, 평신도 대표에 최능익, 주일학교 교장에 김해반, 유사에 황성택, 임정수, 곽림대, 박재형, 윤으로사 그리고 박경신이 선출되었다. 

김 강은 1936년 9월부터 남가주대학대학원에서 지질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이듬해 성탄절을 맞아 나성한인감리교회 선교부인회는 본 지방에 사는 동포 중 제일 생활이 빈곤한 형제에게 성탄 선물을 보냈다. 물품과 헌금을 하신 분은 아래와 같았다. 김 강을 위시하여 선우현, 임준기, 마부인, 임성택, 박은상, 한상호, 김성봉, 손동선, 임매블, 송재운, 임정수, 이민식, 계에스더, 김창만, 허데빗, 한영대, 김엘시, 황성택, 임 폴, 윤 혁, 윤필립, 김신애, 김용성, 이문하, 이석원, 옥은호, 이헨리, 함병차, 김제임스, 안혤렌, 윤헨리, 유회중, 김엘리스, 정덕근, 함리차드, 김경호 부인, 명순조, 윤 폴, 김종학, 전그레시, 김혜란, 허에스더, 임치호, 김경보, 김필권, 한재명, 정혜경, 박영섭, 조병진, 장병훈, 선우현, 이석원, 정동엽, 마춘봉, 김진성, 임준기, 함병찬, 송헌주, 황성택, 임치호, 김경보, 김용성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나성한인감리교회 교인이었을 것이다.

1938년 7월 21일 자의 신한민보에 게재된 “척사대회에 오시오”에 이어 8월 11일 자 신한민보에는 “잊지 마시오. 윷놀이 대회‘라는 광고가 게재되었다. 이튿날 “12일 밤 8시 30분에 국민 총회관 내에서”한다는 내용이었다. “기다리던 윷놀이대회의 일자는 이제 다달았습니다. 미주에서 처음 개최되는 이 사교회에 참석치 못하시고 후회하시지 마시오”라고 적은 후 이어서 “저간 만반의 준비는 흡족하게 준비되어 윷놀이 이외에도 흥미가 진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많습니다”라고 적은 후 “주최자 김 강 고백”이라고 적힌 것을 보면 광고 문장을 김 강이 쓴 것 같다.  

그달 25일 자 신한민보에 나성한인감리교회가 특별예배에 관한 광고를 아래와 같이 게재했다. “현하 원동의 정세는 과연 우리의 바라고 바라던 기회가 각일각으로 가까워옵니다. 이 반면에 저 원수 왜적은 한반도 안에 있는 우리 형제자매의 재산과 생명을 온갖 악착한 법령과 수단을 써서 착취하는 가운데 최근에 이르러서는 예수교회까지 저 원수의 마수가 뻗쳐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신앙까지 자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본 교회에서는 이 때에 하나님의 뜻이신 정의, 인도에 근거한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의식을 교육과 일반 재류 동포에게 더욱 철저히 하게 하기 위하여 매달 첫 주일에는 특별히 독립운동에 대한 기도와 강설로 예배를 보겠사오니 우리 교우는 물론이옵고 일반 재류동포들도 많이 참여하시기를 바라나이다.” 9월의 첫 주일인 4일 주일에는 강설(설교)은 본 교회 전도사 김 강이 담당하였다. 이로써 김 강이 1931년 이후 계속 전도사로 재직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 활동

 

1939년 5월 1일 하오 8시에 국민총회관 강당에서 순국선현추도회가 있었는데 이날 대리집행위원장에 김 강이었다. 그해 6월 11일 하오 8시에 나성 국민총회관에서 모인 국민회 나성지방회 전체 대회는 집행위원장 임정수의 사회 하에 총무 김 강, 서기 최능익, 학무 이경선, 구제 이운경, 감찰위원 곽림대의 사면 청원을 결의하였다. 그달 18일 나성 국민총회관에서 모인 국어교과서 편찬위원회는 편찬원과 편찬원 분담 과목을 지정했다. 분담과목은 역사, 지리, 풍속, 수신, 문법, 노래, 동화, 격언, 사적, 체육이었는데 김 강은 이경선과 함께 지리를 맡았고 체육까지 담당했다.

1941년은 김 강에게 바쁜 해였다. 최대 독립운동 연합단체였던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한족의 급선무는 군사운동으로 인정하고 이 운동의 촉진과 원만한 성공을 위할 때 김 강이 1944년 1월 조선민족혁명당 5인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삼일절은 3월 1일 하오 8시에 폭풍우가 있어 교통이 불편한 가운데 나성한인장로교회에서 최진하의 개회로 있었는데 김 강이 조선 민족주의라는 제하로 연설하였다. 그해 12월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는 긴급 시기의 집행부 사무 진행의 편리를 위할 때 김 강은 송헌주, 김용중, 김성탁, 임병직, 송헌영과 더불어 임시위원 6인으로 선정하고, 사무과, 재무과, 국방과, 선전과 등 네 과 사무를 분장할 때 김 강은 송종익과 송 철과 더불어 재무과에 선임되었다. 

1943년 5월 29일 토요일 오후 8시 30분에 나성 국민회 총회관에서 모인 북미학생연합회 서부지회 대회에서 김 강이 “제2차 세계대전은 우리 학생에게 사명을 재인식케 하였다는 시세에 응하는 간곡한 고도 열정의 웅변으로써 학생들의 과거의 침묵을 뉘우치게 하였으며 특별히 학생이란 말은 청년을 의미한 것을 잊지 말며, 진리를 탐구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고, 동시에 일을 위하여 참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던 그는 변준호 등과 함께 1945년 1월 미국 전략첩보국(OSS)에 입대하여 그해 9월에 제대했다. 

김 강은 1946년 미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혐의로 재판받고 1955년 미국에서 추방되어 북한으로 입국한 후 알려진 바 없다.

damien.sohn@gmail.com

12.12.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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