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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박동완(1885-1941)

박동완(朴東完)은 1885년 12월 27일에 경기도 포천군 신읍리에서 통훈감목관이었던 박형순 선생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고봉(高峯)이다. 영어로는 Tong Wan Pak 또는 Dong Wan Pak으로 표기했다. 그는 독선생을 두고 한문을 공부하였으며 양사동 소학교를 졸업하고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여 1897년에 포천의 명문 집안인 현석운의 차녀 현미리암과 서울에서 결혼하였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육당 최남선과는 동서지간이다. 관립 고등 소학교와 한성중학교에서 1년을 수학하고 한성 외국어학교 영어과에서 3년을 수학하였다. 1906년에 농상공부기수에 6품으로 임용되었다가 1907년에 배재학당에 입학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1908년에 정동감리교회에서 G. H. 존스(조원시)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1912년 말에 배재학당 대학부에서 나와 1913년에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법률을 공부하고 1915년에 졸업하였다. 

보성을 졸업한 박동완은 서울의 정동감리교회에서 본처전도사로 시무하면서 조선 중앙YMCA 위원으로 활동했고, ‘기독교신보사’ 서기로, 1915년 12월에 창간된 장감연합신문이자 한글 신문인 ’기독신보‘의 실질적인 주필 겸 편집인으로 민족사상을 고취하였다. ‘무궁화 골’을 뜻하는 근곡(槿谷)이라는 그의 아호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민족주의자였고, 일본 표준시간에 따라 살지 않겠다며 자신의 시곗바늘을 30분 늦춰 놓았다고 한다. 

YMCA 간사 박희도의 권유로 1919년 기미년 삼일운동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그도 33인 민족대표 중의 한 사람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소 다음 해에 그는 본처 전도사 4년 신학반 과정을 수료한 ‘준허장 취득 전도사’가 되었다.

출옥 후 박동완은 ‘기독신보’ 주필에 이어 ‘신생명’ 주간으로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계몽활동에 매진하였고 YMCA 일요강화 연사로 나섰으며 조선물산장려회, 무명회, 흥업구락부 그리고 ‘조선교육협회’에도 참가하였고, 1927년에 이상재 등과 함께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본부 상임간사로 활동하였고, 그해 12월에 ‘재만동포 옹호동맹’을 창립할 때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봉천성과 길림성 등 일대의 100만 재만동포의 상황을 조사했다.

 

와히아와 본동 한인기독교회

 

박동완은 낙원이라는 하와이를 동경하였고, 하와이동포 목회가 그의 숙원이었다. 그가 출소한 지 3개월이던 1922년 2월에 서울 연희전문학교 교수였던 엘머 M. 케이블 선교사가 하와이 감리교 감리사인 윌리암 H. 프라이에게 박동완을 호황한인감리교회에 추천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해 8월에 프라이 감독은 허버트 웰치 감독으로부터 같은 편지를 받았으나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유는 호황한인교회는 안수 받은 목사로 하와이에 정착할 목회자를 찾고 있고, 박 전도사의 정치경력으로 일본정부로부터 여권을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정작 서울에 거주하던 박동완이 하와이로 가게 된 데는 하와이 민찬호 목사와 한국의 임두화 목사의 주선이었다. 하와이승객자료에 따르면 그는 1928년 8월 21일에 일본 요꼬하마에서 텐요 마루를 타고 그달 31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1928년 10월 18일자 ‘신한민보’는 “박동완 목사는... 10월 8일 선편에 무사 안착하였다더라”고 보도했다. 그는 1928년 10월에 와히아와 한인기독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본 교회는 1919년에 약 20명의 동포 팜 거리의 끝에 있는 집을 세내어 예배를 드리다가 1924년에 길 하나 건너 레후아스트리트 246번지로 옮기고 전임목사 없이 와이알루아교회의 최창덕 목사가 시간제로 청빙받아 시무했으니 박동완이 초대목사라는 영예를 얻었다.

박동완은 부임하자마자 한인거주지를 직접 심방하여 전도에 전념하였다. 1929년에 최초의 성가대를 조직하였고, 그해 12월에 90여 명의 학생이 예배당에 모여 농촌학생연합회를 조직하였는데 한인 전체에 좋은 영향이 있을 것을 기대하고 학부형은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임원에는 회장에 김피터, 부회장에 위제손, 서기에 양일년, 재무에 감하람, 고문에 강영각이었다. 이 밖에도 각 지방 지부에 지방회와 지방 임원들이 있어 본회 사업을 진행하였다.

박동완이 1930년 인구조사에 참여했다. 44세의 기혼자로 영어를 읽을 수 있고 쓸 수도 있다고 적혀있다. 그런데 가족을 한국에 두고 혼자서 열악한 환경에서 오직 목회에만 전념하다가 뇌경색에 걸렸다.

1931년 박동완은 김성기, 안시흡, 이종관, 민한옥, 민찬호, 조석진, 백낙현, 이승만, 최성대 등과 함께 한인선교부 9인 이사원이었다. 9인 이사원은 1/3이 목사이고 2/3은 평신도로 구성했다. 박동완은 하와이 학생모국방문단을 인솔하여 귀국하여 그해 6월부터 3개월간 머무르며 중앙YMCA 회관 등지에서 “재류재규동포의 근황”과 “재규조선인의 신앙생활”이란 연제로 강연했다. 

1934년 1월 14일에 호항한인기독교회에서 이종관 목사와 함께 장로목사안수를 받았다. 그해 7월에 박동완은 ‘한인기독교보’를 재창간하고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다. 인쇄인은 김의준이었다. 박동완은 창간호 ‘편집 뒤의 말’에 ‘신생명’이 폐간된 지 “꼭 10년 만에 다시 글을 쓰려고 붓대를 잡으니 이런 생각, 저런 소감이 교집하여 다 돌아와서 한꺼번에 쓰고 싶더니 결국은 이것도 저것도 다 못 쓰고 또는 문장도 끌그럽고 말도 거칩니다. 그러나 속담에 쓴 배도 맛들 일 탓이라는 말과 같이 독자여러분에게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라며 남다른 감회를 표시하였고, 그의 논단 ‘조선감리교회 선교 50주년을 맞으면서’에서 국내에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를 합동하여 순전한 조선교회를 만들자는 여론이 차차 머리를 들고 나선다면 그 귀추에 주목한다는 등 조선교회에 대한 소망을 가졌다.

1934년 4월 1일 부활주일 아침 6시에 산상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렸다. 그날 남녀아동 11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날 민찬호 목사가 ‘예수의 못 박힌 원인’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여 일반 교우의 잠자는 신심을 분기시켰다. 주일학교에서는 계란과 사탕을 바구니에 담아 150여 명 주일학교 학생에게 나누어주어 예수 부활하신 정신을 천진난만한 어린 학생들의 뇌에 불어넣었다. 그달 15일에는 전 교인이 하우라 공원에 가서 야외예배를 드렸는데 그날 최창덕 목사가 전도하여 일반 교우의 신령한 정신을 진작시켰으며 남녀 200여 명이 모여 유쾌하게 하루를 지나고 5시에 귀가했다.

5, 6년 동안 지방교회를 순회 시찰하지 못하다가 중앙이사국장 대리의 자격으로 박동완이 1934년 6월 8일 오후 4시에 순행전도여행을 떠났다. 이튿날 아침 7시에 힐로 선창에 도착하였고, 다음날 주일에 장 붕 목사의 힐로교회에서 설교하였다. 11일에 장 목사와 함께 학갈나우 상동교회에서 밤에 예배하고 한 아이에게 세례를 주었다. 12일에 옥갈나, 파월노, 호노카를 각각 심방하고 다시 돌아서 최근에 선 옥갈나 캠프교회에서 예배보고 쉰 후 국가아우에 새로 선 교회를 심방했다. 13일에 국가야우에서 설교하고 이튿날 아침에 힐로로 돌아왔다. 14일에 기차로 가포호교회를 찾아 예배드리고 힐로에 돌아왔다. 15일에 자동차로 고나로 가서 본 교회에서 예배보고 여섯 아동에게 세례를 베풀고, 인근 켑넨쿡에 최근에 새로 선 교회를 심방했다. 17일 오후에 마위로 향하였고, 파이아에서 예배를 드리고 성찬과 아동 22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19일 오전 10시에 하나로 가서 예배를 드렸다. 20일 아침 9시에 화이아를 향했다. 이곳 삼일 저녁 기도회에서 설교했다. 21일 오전에 가훌루이를 심방하고 22일 아침 6시 반에 출발하여 돌아왔다. 그는 하와이와 마위 등 10여 지방을 순회전도했다.

그해 7월에 본 교회 국어학교 학부형이 교회정원을 청소하였고, 화초를 심었으며, 교회마당에 모래를 펴서 자녀들이 놀 운동장을 만들었다.

1935년 1월 박동완은 중앙이사국장에 취임했다. 이듬해 1월 10일에 하와이한인기독교회 제16회 연회가 모였다. 그해에 박동완은 동지회 와히아와 지방대표로 활동했다. 

1938년에는 어른 교인 47명과 유아세례자 121명을 포함하여 교인수가 200여 명이었다. 주일학교 교장에 최창덕 목사였고, 그는 주일학교 학생 120명을 지도했다. 국어학교 학생은 50명이었고, 작년 1년 경비가 556달러 28센트였다. 교회 대지가격은 4,500달러였다. 그해 그는 한인 선교부 이사원의 제1 부이사장이었는데 부장은 이승만이었고, 제2 부이사장은 이종관 목사였다. 박동완은 이듬해 한인선교부 연회에 참석하여 김형식 목사와 장 붕 목사와 함께 한인선교부 장정 수정위원이 되었다.

1940년 와히아와한인기독교회에 12명의 임원과 206명의 교인, 110명의 주일학교 학생, 49명의 청년면려회 회원과 45명의 국어학교 학생이 있었다. 1,280달러의 재정은 2년 전과 비교해 두 배였다. 토지와 건물 가격 4,500달러는 1938년과 같았다.

박동완은 그의 재직기간 전반을 통하여 교인들의 십일조 중 일부는 한인선교회에 보내 한국의 미자립교회에 후원금으로 쓰였다. 

 

카우아이 감리교회 목사

 

박동완은 1940년 카우아이 미국 감리교 목사로 전출되었다. 10년 넘게 교회생활을 했던 교인들은 전별회를 개최하고 이별을 아쉬워하며 금시계를 비롯하여 가방과 각종 기념품을 전달했다. 

이듬해 박동완은 동지회, 국민회, 독립당, 부인 구제회, 영남부인회, 부인 호상회, 동맹저금회, 천주교, 불교, 천도교, 미국감리교회, 기독교, 성공회, 대학생회, 기독학생회로 구성된 각 단체 연합 임시대표회의 위원장을 맡은 지 1주일 뒤인 1941년 2월 23일 하오 2시에 하와이 호황 정부병원에서 향년 56세로 별세했다. 삼일기념 준비임원회 주최로 3월 1일에 사회장으로 동포 700여 명이 애도하였다. 그의 유해가 한 달 뒤 함태영 목사의 집례로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1962년 대한민국정부가 그에게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면서 4년 뒤 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했다.

damien.sohn@gmail.com

11.2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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