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이승만(李承晩)은 고종 12년인 1875년 3월 26일에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에서 양녕대군 16대손으로 이경선과 김해 김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초명은 이승룡(李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그는 1877년에 서울로 이주하여 도동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한문 소양을 가진 어머니에게서 유교의 도리를 배웠으며, 생일에는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렸다. 그는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매번 실패하였는데 과거제도가 폐지되던 이듬해인 1895년 봄에 신흥우의 형인 신긍우의 권유로 배재대학의 영문부에 입학하여 1897년 7월에 졸업하기까지 영어공부에 매진했고, 제중원 여의사 조지아나 E. 화이트 박사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웠다. 특별히 1895년에 귀국한 서재필의 세계역사, 민주주의, 국제 정세, 지리 등의 강연에서 그는 새로운 혁명적 기독교 사상에 눈떴다.
크리스천
고종황제 폐위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우남이 1899년 1월에 한성감옥에 수감됐는데, 혐의가 입증되지 않았지만, 탈옥미수로 종신형을 선고받아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중생을 체험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학교시절 선교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평생 처음으로 ‘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해주시옵소서. 오, 하나님, 우리나라를 구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드렸다. 그랬더니 금방 감방이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고, 나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 평안이 깃들면서 나는 변한 사람이 되었다. 내가 선교사들과 그들의 종교에 대해서 갖고 있던 증오감, 그리고 그들에 대한 불신감이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우리에게 자기들 스스로 대단히 값지게 여기는 것을 주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생한 우남은 40여 명의 죄수에게 전도하였고, 독립협회에서 활동했던 이상재 등 양반 지식인과 성경공부와 신학연구에 몰두하였으며, 1902년 12월에 처음으로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글을 모르는 50여 명에게 한글, 한문, 영어, 산학, 국사, 지리뿐만 아니라 성경과 찬송가도 가르쳤다. 그는 1903년 8월호 신학월보에 기고한 “예수교가 대한 장래의 기초”와 1904년에 쓴 ‘독립정신’에서 기독교에 기초한 독립 국가 건설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우남이 석방된 지 2달이 되던 1904년 10월에 상동 감리교회 청년학원 교장직을 맡았는데 11월에 민영환과 한규설의 주선으로 한국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도미했다. 도미하는 길에 하와이에서 호놀룰루 한인감리교 선교회의 홍승하 전도사와 윤병구 목사 등을 만났다.
선교사들이 쓴 19장의 추천서를 들고 우남이 워싱턴DC에서 영향력을 가진 커버넌트장로교회 루이스 T. 햄린 목사를 찾았다. 햄린 목사의 주선으로 1905년 2월 배재학당의 학점을 일정 부분 인정받고 목회장학금을 받아 워싱턴DC의 조지워싱턴대학에 진학했고, 그해 4월 20일에 본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재학 중 그는 구약언어학 과목을 둘이나 수강했고, 뉴잉글랜드의 국제기독학생모임에 참석했으며, 1906년 여름방학 때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서 3000여 명이 모인 만국 기독교 대학생 선교대회에도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강단에 올라가 “독립가를 창하고 대한제국 만만세와 아메리카 만만세를 세 차례씩 창하였다.” 그런데 그는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와 국무장관 존 헤이에 이어 루스벨트 대통령과도 면담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7년에 워싱턴대학을 졸업한 우남은 그해 하버드대학원에 입학하였고, 인근 엡워스 감리교회에 출석했다. 1908년 3월에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개최한 미국 및 캐나다 청년선교운동 콘퍼런스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한국 선교 사업을 설명하고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하였다. 하버드대학원에서 1년 동안 공부한 후 프린스턴대학원에 입학한 그는 박사학위 공부를 하기 전에 프린스턴신학교에서 히브리어, 라틴어, 교회사, 변증학 등을 공부했다. 그는 2년만인 1910년 6월에 ‘미국의 영향 하의 중립론’(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감리교 평신도 전도인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총무 필립 길레트 선교사의 초청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1910년 10월에 우남이 귀국하여 연봉 900달러의 한국인 총무나 학감으로 취직했으니 도미한 지 5년11개월 6일 만에 귀국했다. 그해 10월 16일에 570명이 모인 학생집회에서 전도 강연을 하였고, 이 강연을 통하여 143명의 연경반을 조직하고 매 주일 오후에 성경연구반을 인도했고, 서울 YMCA에서 성경과 만국공법을 가르쳤으며, 프랑크 M. 브로크만 협동총무와 전국을 다니며 전도하고 YMCA를 조직했다.
그런데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의 압박을 받자 1912년 4월에 감리교회 평신도 제14기 회의에서 미국 미네소타에서 개최하는 미국 기독교 감리회 4년 총회에 한국 평신도대표로 참석한다는 빌미로 도미하였다. 도미하는 길에 일본을 들러 카미쿠라에서 열린 한인 학생대회에 참가하여 26명으로 학생복음회를 발족시켰다.
미네소타 총회 이듬해인 1913년 2월에 한인 동포가 많이 집결한 하와이에서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의 첫 사역은 105인 사건의 실상을 다룬 ‘한국교회 핍박’의 집필이었다. 그 후 그는 순 한글 월간 ‘태평양 잡지’를 통해 기독교 신앙과 애국과 독립사상을 고취했으며, 미국 감리교 선교부가 설립한 한인기숙학교(한인중앙학원)의 교장직을 맡아 한인 2세에게 영어, 우리말, 한문, 한국 역사뿐만 아니라 성경도 가르쳤다.
그리고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의 탁사와 교육책임자로 활동했고, 목회자 공백 기간에 주일예배 설교를 맡았는데 공백기간이 자주 있고 길어지면서 교인들과 친숙해졌다. 감리교 하와이 지방회의 교육분과 위원장직도 맡아 한인감리교회의 업무에 관여했다. 김유순 목사의 귀국으로 어려워진 와이파후교회가 정상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1914년 8월 박용만이 조직한 대조선 국민군단의 병학교 막사 군문 낙성식에 참석하여 우남이 ‘믿음’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한국어와 한국사 등의 과목 설치와 여학생 교육 문제에서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와 갈등을 빚으면서 우남은 1915년 6월에 본 선교부에서 탈퇴했다. 그는 1916년에 한인여자학원을 설립했고, 2년 후 이 학교는 남녀공학의 한인기독학원으로 변신하여 소학교 6년 과정을 운영했다. 우남은 매일 드리는 본 학원의 채플시간에 설교를 도맡아 했다. 1952년에 토지와 재산을 매각하여 인천 인하공과대학 설립기금으로 내놓았다.
1916년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설교자로 사역, 교회건축 앞장 서
1919년 예수교국 건설 발표, 광복까지 워싱턴DC에서 독립운동
한인기독교회 설교자
우남은 1916년부터 박내선/박애나 부부 가정에서 김해나, 유노덕, 김(이)유실과 이유실의 어머니 송경신, 백락현, 김성기, 윤계상을 포함하여 약 30명 교인과의 친교 모임을 계속하다가 예배를 드리면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수가 7, 80명이 되어 새로 새워진 교회 곧 ‘신립교회’가 된 셈이고 또 그렇게 불렀다.
1917년 초에는 참석 교인수가 너무 많아 한인여학원에서 모였다. 그해 7월에 평신도 중심의 미국 회중 교회의 모범을 따라 신립교회를 창립했다. 1918년 12월 23일에 호놀룰루와 와히아와, 카우아이 섬, 마우이 섬, 그리고 하와이 섬의 여러 지방 교회 대표 14명이 모여 한인기독교회가 되었다.
지방대표는 우남, 윤계상, 신성일, 송경신, 이누신다, 박영기, 이종관, 임평순, 장재현, 박원백, 김경준, 노성현, 조석진, 고성준이었다. 이즈음 200여 명이 모였는데 초대 목회자로 사병춘(사병순?) 목사가 부임했고, 본 교회는 미국 감리교회와의 협력과 불신자의 전도를 강조하였다. 우남은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이사원에서 선교부장을 맡았다.
1922년에 작은 예배당을 마련하였다가 예배 출석수가 많아 10년 동안 신흥국어학교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1938년 4월에 우남의 주장으로 경복궁의 광화문 문루를 가미한 4만여 달러의 건축비로 예배당을 세웠다.
여러 섬에 있는 한인기독교회를 총칭한 ‘중앙한인기독교회’는 1924년에 ‘중앙한인기독교회 조합’이 되었다가 1931년에 ‘한인선교부’가 되었다. 1938년에는 총 세례 교인수가 1,263명이었다.
1919년에 워싱턴DC로 간 우남이 1925년경에 다시 하와이로 이주했다. 오스트리아 빈 출생의 프란체스카 도너와 1934년 재혼한 후 하와이로 돌아온 첫해에 그는 매달 평균 2번 설교하였다. 1936년 10월 3일 오전 10시 30분 영어예배에 그가 설교했고, 대부분 노인이 참석하던 오후 7시 30분 주일저녁 예배에서도 그가 설교했다.
예수교국
우남은 1919년 4월에 서울에서 선포된 속칭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로 선임된 후에 한국으로 동양의 처음 되는 예수교국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그해 9월 상해 임시정부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된 후 그는 미국 수도 워싱턴DC에 ‘구미주차한국위원회’(구미위원부)를 세우고 1925년까지 조국의 외교 독립운동을 폈다. 중일전쟁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1939년 3월에 워싱턴DC에 구미위원부를 다시 열고, 재미교포단체인 해외한족대회와 상해 임정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임정 승인 획득과 한국 독립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광복 두 달 만인 10월, 33년 만에 우남이 귀국했다. 1948년 5월에 서울 동대문구 국회의원이 될 즈음 그는 ‘방구명신’이라는 휘호를 남겼다. ‘나라는 오래지만, 명은 새롭다’인데, ‘명’이란 기독교적인 새로운 하늘의 명이었다. 1948년 5월 31일에 제1대 제헌 국회 임시의장으로 개원하면서 목사 이윤영 의원에게 개회기도를 요청하였다. 그해 8월 15일에 대한민국 탄생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그는 제1, 2, 3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1960년 4월 19일 학생의거 후 그달 26일에 대통령 하야성명을 발표한 후 하와이로 이주하여 1965년 7월 19일에 향년 90세에 소천하여 서울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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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4.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