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105. 강태희(1889-1958)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강태희(姜泰熙)는 1889년 7월 23일에 태어났다. 그런데 그가 강화도에서 태어났다고도 하고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남양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인천 영화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대한제국의 개량운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르기를 여러 번 하였는데 웅변가로 이름을 날렸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그가 1920년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생이던 1923년 1월 서울 창천교회를 담임하면서 목회를 시작했고, 1926년 3월에 본교 제12회 졸업생이 된 이듬해 1927년 10월에 서울 중곡교회로 파송 받았다. 그 후 그는 유학차 도미했다.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1928년에 유학차 도미하던 길에 강태희 목사는 하와이 호놀룰루를 방문했다. 그런데  민찬호가 담임목사로 목회하던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가 그를 붙잡아 부목사로 청빙했다. 민찬호는 1919년 10월에 본 교회에 부임하여 1929년 3월에 사임했고, 강태희는 그해 6월에 상항으로 이주하던 때까지 본 교회를 섬겼으니 약 1년간으로 보인다. 

당시 민찬호가 돌보아야 할 한인기독교회는 하와이 전체에 13개 교회와 9개의 기도처가 있었고, 남녀 아동을 합쳐 총 1,241명이었다. 1926년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는 남자 140명, 여자 100명, 아동 300명 등 총 540명이었으니 강태희 목사는 540명의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의 교인을 심방하는 심방목사였을 것으로 보인다. 

1929년 교회 임원은 강태희의 목회에 함께 한 동역자다. 전도사에 백낙현, 이상직, 김광현, 전경준, 조석진이었고, 집사에 조석진이었으며, 반장에 안득은, 송경신, 백인숙, 손마리아, 민한옥이었고, 찬미대 대장에 김신실이었으며, 찬미대 위원에 김학성이었고, 이사원에 손덕인, 박영호, 서기문, 김성구, 최성대, 박경순, 김경준, 안영찬, 박태선이었고, 평신도 회장에 최홍위, 서기에 차신호, 재무에 김광재였다.  

1929년 2월 평신도 회의에 참석한 수는 112명이었고, 3월에 본 회의가 두 번 모였는데 참석한 수는 각각 108명과 104명이었으므로 당시 예배 참석수가 적어도 110명가량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게 된다. 

1928년에 이어 1929년은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가 재정이 어려웠던 시기였다. 1924년에 예배당을 건축할 때 생긴 교회건축 빚을 매해 갚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담임목사 민찬호에게 사례비를 지급하기가 어려워 각 지방교회가 특별헌금으로 담당하기로 하고 지방교회에 구체적인 금액을 제시하고 요청할 지경이었으니 재정부족의 심각성을 이해할 수 있다. 1929년 2월 교회 평신도회의는 재정곤란도 곤란이지만 2, 3년만 가면 교회를 부지할 도리가 없으니 경비를 제감하도록 하여 직원의 월급을 삭감하였고, 교회재무와 학생인 오르가니스트의 월급은 아예 삭제했고, 민찬호의 사례비도 50달러 인하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가운데 그해 3월에 민찬호의 사임서를 수리하였다. 

재정곤란의 교회 분위기에서 강태희의 부목사직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유학차 도미했으므로 유학에 대한 의지를 분명히 할 때가 되기도 하였다.

 

1928년 유학차 도미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서 1년간 사역

1929년 드류신학교 졸업 32년 귀국, 목회와 부흥사로 사역

 

뉴저지 뚜르 대학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부목사직을 사임한 강태희는 1929년 6월 10일에 상항에 도착했다. 그 길로 그는 그해 9월에 미국 뉴저지 매디슨에 있는 감리교 신학교인 드류신학교 선교대학에 특별학생으로 입학하였다. 그는 2년 6개월간 공부하고 1931년 6월에 본 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신학사(BD)학위가 아닌 졸업장을 취득했다. 

강태희가 뚜르 대학에서 공부하던 1930년 6월에 북미주 대한인 유학생회 동부지방 제5회 대회가 있었는데 그달 8일 오전 10시 반에 30여 명의 한인 유학생이 뉴욕한인교회 예배당에서 있었던 학생예배에서 강태희가 설교를 담당했다. 그는 “왜 떨어지나”라는 제목으로 성경 말씀을 강설하였고, 이후 학생대회 특별찬양대의 합창이 있어서 예배순서가 은혜로웠다고 한다.

이듬해인 1932년 6월 4일과 5일, 양일에 북미주 대한인 유학생회 동부지방 제7회 대회가 뉴욕한인감리교회 예배당에서 있었다. 그는 그해 동부대회 종교부의 부원이었다. 종교부 부장은 강 일이었고, 또 다른 부원으로는 문찬규, 장석영 그리고 김주환이 있었다. 그해 연회 회장은 김마리아였고, 서기는 김은식과 정일형 등 두 명이었다. 종교부 외에도 재정부, 토의부, 연회부, 사교부, 운동부가 있었고, 위 부서의 부장은 안승화, 김도연, 김세선, 조승학, 그리고 윤성순이었다. 그달 4일에 있었던 첫날 모임에는 개회에 이어 사무처리, ‘조선경제발전’에 대한 토의 등이 있었다. 이튿날 5일의 둘째 날 모임은 오전 10시에 학생주최 예배가 있었는데 그 예배에서 강태희가 설교를 담당했다. 이후 야유회와 졸업식 축하회 그리고 여흥 등이 이어졌다.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강태희는 위의 동부지방 제7회 대회 직후 한국으로 귀국하던 길에 다시 하와이를 방문했다.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의 담임목사 이용직이 1931년에 사임함으로써 비어 있던 본 교회 강단에서 강태희는 이종관, 김이제 그리고 임두화 등 목사와 평신도 지도자였던 서정일, 안현경, 정운서, 정인수, 조석진, 차신호 등과 함께 말씀을 전하였으니 말하자면 설교 목사인 셈이었다. 그가 이곳에서 담임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1931년 본 교회 평신도회 회장이 이종관이었고 그 외 임원으로는 서기 최성대, 재무 민한옥, 임원에 강영복, 서기문, 최백렬, 황원태, 정인수 그리고 김윤배였는데 강태희가 설교하던 때도 이들이 교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하와이 감리교회 

 

1930년 뚜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변홍규 목사가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제9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만주 선교를 위하여 떠나던 1933년까지 약 2년간 목회했다. 1931년 9월에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이듬해 1월에 상해임시정부의 이봉창의 폭탄투입으로 대한독립의 의지를 높이는 상황에서 변홍규 목사는 감리교회 주최로 부흥회를 계획했다. 그가 1934년 7월에 신학세계에 “하와이 생활의 추억”이라는 제하의 글의 말미에서 아래와 같이 그의 교회 부흥의 간절한 기도를 읽게 된다: “오 주님이시여, 하와이 교회가 부흥케 하소서-그곳 제2세 국민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소서–아멘”

부흥회의 강사는 강태희였다. 강태희가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에서 소위 설교목사로 시무하던 때다. 변홍규에게는 강태희가 같은 감리교 목사일 뿐만 아니라 뚜르신학교의 후배이었지만 인생 연륜으로는 열 살이나 많았다.

부흥회는 1932년 7월 20일부터 8월 3일까지 두 주간이었다. 강태희 목사의 복음 전파의 대지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는 요한복음 14:6의 예수님의 말씀이었다. 그의 부흥회는 하와이 7천여 동포의 갈 길을 인도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그래서 당시 하와이에 있던 큰 섬 오아후, 하와이, 마우이, 가와이 섬의 한인감리교회의 담임목사인 안창호, 홍한식, 이관묵, 임준호, 현 순, 그리고 한인독립교회와 성공회 목회자가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호놀룰루에 가까이 있던 한인들이 참여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와이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 교인과 호놀룰루에 있던 한인독립교회와 성공회 교인들이 이 부흥회에 참석했을 것으로 보인다.

 

귀국

 

한국으로 귀국한 강태희는 서울 중앙교회와 서울 상동교회를 거쳐 1937년에 장사정교회에 부임하면서 연회 부흥 전도 사업 담당자로서 부흥목사가 되어 전국을 무대로 부흥회를 인도했고, 이용도에서 김종우로 이어지는 일제강점기 때의 한국 감리교회의 마지막 부흥사였다. 1944년 3월에 서울 종교교회에 부임한 그가 그 후 인천 내리교회를 섬겼다. 해방되던 그해 11월 조선기독교 남부대회 총무부장이 되었고, 이듬해 1월 경기 교구회에서 회장으로 선임됐다. 그해 6월 그가 중부연회 복흥파 연회장으로 선임되더니 그해 9월 특별총회 감독으로 피선되어 재건파와 합동하던 1949년까지 재직했다. 그는 조선기독교연합회(NCC) 회장도 역임했다. 625동란 중 강태희는 부산으로 피난 가서 거기에서 영도중앙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던 중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병든 몸으로 인천에 돌아와 투병하던 중 1958년 8월 5일에 자택에서 향년 69세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Drew Theological Seminary의 사서 Dr. Mathew Beland가 2020년 1월 9일에 필자에게 보낸 이메일 참조.

damien.sohn@gmail.com

09.12.2020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