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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하도원(1876-?)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하도원(河道源)은 1876년경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국에서 모 교회의 장로였다. 29세의 하도원은 가족을 한국에 남겨두고 1915년 1월 15일 중국 상해에서 19세의 이반석과 31세의 전영한과 그의 네 살 된 아들 전군영 등 3명과 함께 시베리아호에 승선하였다. 그는 다른 이들과 함께 그달 25일에 샌프란시스코를 통하여 도미하였고 곧바로 리버사이드로 이주했다.

 

리버사이드 한인장로교회 영수

 

1915년 리버사이드에는 노동주선인 박충섭을 통해 32명의 한인이 농업노동자로 활동했고, 당시 국민회 리버사이드지방회 회장은 이학현이었다. 리버사이드지방회는 매월 통상회를 모일 때마다 개회하기 10분 전에 지방 학무원이 회원들에게 북미총회 자치규정을 가르쳤다. 리버사이드 지방회관주소는 Pachappa Ave. 1532 번지였다. 그런데 리버사이드 한인장로교회 주소는 같은 길의 1158번지였다.

1915년 3월 31일 미국북장로교 가주에 거주하는 중국인과 한국인을 위한 내지선교사였고 북가주 오클랜드에 거주하던 John H. Laughlin 목사와 가주 한인장로교회 순회목사인 민찬호가 리버사이드한인장로교회를 방문했다. 이날 본 교회는 정성을 다하여 성대한 환영회를 마련하였다. 민찬호 목사가 복음을 전하였고 두 번의 독창이 있었는데 라프린 목사가 중국 찬송을 불렀고 본 교회 여학생 송마티는 영어 찬송을 불렀다.

위의 라프린 목사와 민찬호 목사가 방문한 다음 달인 1915년 4월 20일경에 리버사이드한인장로교회 영수였던 문영운이 리버사이드 인근 엎랜드로 이주하여 그를 대신하여 하도원이 본 교회 교역자(영수?)로 취임했다. 그리고 집사로 최재덕을 선출하였으며 교회 경비를 위하여 30달러를 헌금했다. 

리버사이드한인장로교회 영수가 된 그달에 하도원은 주일마다 예배당에서 노동한 후 여가에 도덕을 숭상하기 위하여 성경학교를 열었는데 공부하는 학생이 15명 정도였다. 한편 문영운의 뒤를 이은 지방회 서기 정지영의 부인 이반석이 주일학교를 개설하고 어린이 10여 명을 가르쳤다. 이반석은 하도원이 도미할 때 동행했던 자이다.

 

1915년 도미, 리버사이드한인장로교회 영수로 10개월 사역
다뉴바로 이주 독립금 후원, 1920년 귀국 평양장신대 졸업

 

1915년 4월 29일에 김인수의 부인의 모친이 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한다고 하였으니 하도원의 심방이 있었을 것이다. 슬픈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해 7월에는 노동주선인 박충섭이 결혼했다. 그달 28일에 상항한인감리교회에서 한국에서 온 이정경과 결혼식을 한 직후 성대한 연회를 열었고, 8월 1일에 리버사이드로 와서 그달 7일에 한인 동포와 외국 빈객을 초청하여 성대하게 잔치를 하였으니 하도원이 이 잔치의 기도순서를 맡았을 것으로 보인다.

1915년 8월에는 한인 노동자들이 사업의 형편을 따라 절반이 다른 곳으로 이주해 리버사이드를 떠났으므로 1개월간 지방회 회무를 정지할 형편에 이르렀다. 이로써 교회 출석자의 격감을 예상하게 된다.

1916년 리버사이드 지방회 신임원은 본 교회 회원일 가능성이 짙다. 회장에 이학현, 부회장에 정지영, 총무에 안영일, 서기에 최윤호, 재무에 박성민, 학무원에 조득린, 법무원에 김순학, 구제원에 박충섭 그리고 대의원에 문영운이었다. 위의 문영운은 하도원 직전의 본 교회 영수였는데 다시 리버사이드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맨티카 무이사탕 농사에 합류하던 1916년 2월까지 약 10개월간 하도원이 리버사이드한인장로교회의

 영수직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두 노인의 사화 증거”

 

하도원은 1916년 2월에 무이사탕 농사로 맨티카에 이주했다. 당시 60여 명의 한인이 큰 부락을 이루고 1,300에이커의 토지에 자본금 10,000달러의 무이사탕 농사를 경영했다. 1916년 3월 25일에 상항한인감리교회에서 모인 한인감리교회 지방연회에 맨티카교회 대표가 참석했고, 당시 지방 전도사 황사선과 임정구 중 한 명이 맨티카교회를 순회 방문했을 것이다. 그해 4월에 본 교회에서 국어학교가 있었는데 10여 명이 등록하였다. 다음 달 그가 맨티카지방회 서기로 임명되었는데 아래의 기타 임원이 본 교회에 출석했을 것으로 보인다. 회장 한준상, 부회장 한치홍, 총무 김준화, 재무 강원서, 학무원 이윤옥, 법무원 한시대 그리고 구제원 김성대였다.

1916년에 하도원은 노동주선인 한시대의 도움으로 포도 따기 위하여 다뉴바로 이주했고, 이곳 다뉴바한인교회에 출석했을 것이다. 1917년 3월 예배당 건축 결산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4달러를 헌금했다. 그 외에도 헌금한 사람들은 임성택, 오충국, 임성칠, 최상목, 오창곤, 한치홍, 한준상, 박창호, 이치완, 이민식, 전성룡, 장덕오, 정국현, 이국빈, 오신애, 김사진, 장봉석, 김자민, 김창만, 이운옥, 오정훈, 민찬호, 박병원, 김성고, 김병류, 이용선, 왕운봉, 김경순, 김진규, 이광육, 강화중, 김창성, 김성권, 장영애, 석화섭, 이낙주, 임 일, 강영상, 최학선, 문장근, 김재경, 김영선, 김경자 이애나, 이기념, 이화준, 정기현, 이 초, 유진오, 명일선, 김용선, 김병숙, 김진행, 안영열, 김종학, 김병학, 문병희, 이월념, 한승곤, 정성희, 이용근, 고응도, 김봉길, 허 학 등이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본 교회 교인이었을 것이다. 이들 외에도 외국인이 낸 건축헌금이 508달러 70센트였다. 구 예배당 방입금이 11달러 50센트 그리고 재목 방입금이 11달러 50센트로 총 건축 수입이 770달러 20센트였고, 총 건축 지출은 총 786달러 8센트로 부족액이 15달러 88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이로써 한국뿐만 아니라 미주 한인교회도 삼자운동에 충실했음을 본다. 그해 9월 다뉴바에 거주하는 한인의 수는 이전보다 많아 무려 370여 명이었다. 이전에는 혹독한 더위로 매년 한 명의 한인이 사망했는데 이 해에는 사망자가 없었다고 한다. 370여 명의 한인이 다뉴바로 이주하였으므로 다뉴바한인장로교회 교인수가 이와 비례하여 많았음을 알게 된다.

1918년에는 하도원이 가주 북쪽 와오밍 섭퍼리오로 이주하였다. 그해 7월에 그는 여러 명과 함께 섭퍼리오 지방회 설립 청원을 하였고, 다음 달에 본 지방회 학무로 선임되었다. 이곳에서 그가 교회를 시작했는지는 더 연구가 필요하다. 그해 12월에 맨티카한인감리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할 때 5달러를 헌금했다. 본 교회에서 그가 2년 전에 신앙생활을 하였다. 

1918년 12월 12일에 신한민보에 게재한 “두 노인의 사화 증거”에서 보이는 대로 한광수와 함께 하도원의 화해자 역할에서 그의 목회적 자태를 엿볼 수 있다. 아래는 당시 신한민보에 게재한 위의 기고문이다.

 

두 노인의 사화 증거

 

다년 승강하던 이창선과 전봉준 양 씨의 시비는 일없이 되었기에 본인은 이를 증거하나이다. 이창서와 전봉준 양 씨는 다 같은 만 60세의 노인이오, 겸하여 본국 의주 고향에서 같이 자라난 죽마붕우로서 미국에 와서도 몇 해 동안 (인)삼 장사를 동사하던 터에 이 노인이 일직이 전 노인에게 몇 백 원(달러) 빚진 것이 있었고, 전 노인은 그 빚을 조수 감보하였으나 이 노인의 항상 말씀이 “전봉준 씨가 내 돈을 다 갚지 아니하였다”고 봉인즉설을 하다가 요사이 두 노인이 사크라멘토 한인여관에서 서로 만나 다시 이를 위하여 시비가 되었는데 서로 옳다고 하는 내정은 일직이 본 사람이 없으니 누가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라. 그러나 젊지도 않은 노인들이 항상 이렇게 소요스럽게 함이 실로 상서롭지 못한 일인 고로 동포 4, 5인이 위하여 시비를 밝히는데 전 노인이 조목조목 증거 하는 끝에 이 노인이 이 굴하여 다시 할 말이 없이 되었더라. 이때 이 노인은 자기의 사정에 몇 가지 조건을 첨부하여 사화하기를 애걸하매 전 노인이 대답하기를 “가내 당신을 불쌍히 여겨 이전에도 몇 십 원(달러)씩 준 일이 있었는데 당신은 만나는 사람마다 전봉준이가 내 돈을 상게도 갚을 것이 있다고 하니 나의 명예상에 손상이 적지 아니한 것이라. 형이 만일 사화하기를 원하면 나의 요구하는 것을 허락하겠소?” 하매 이 노인이 곧 복종하여 사화 하였는데, 그 요구조건은 이 아래와 같으니 (1)내가 당신의 돈을 다 감보한 것을 증거할 일 (2)이 사실을 우리 신문에 게재할 일 (3)3개월 동안 게재하여 우리 미주 동포들이 다 알게 할 일 (4)이후에 또 돈을 달라하지 못할 일 (5)이를 다 복종하면 나는 당신의 3개월 식비를 감하 줄 일(광고비는 내가 낼 일)

사화인: 이창서, 전봉준

증거인: 하도원, 한광수

 

하도원은 1919년에 나라 사랑에 함께 했다. 그는 그해 2월에 세계 제1차 대전을 맞은 미주 한인의 금력 찬조금에 동참했고, 그해 3월과 그해 5월에 독립의연금을 기부했으며, 그해 6월에 의무금을 냈고, 그해 9월에 적십자회 헌금 등을 내면서 나라 사랑에 함께 했다. 

 

귀국

 

수년간 미주에서 거주하던 다뉴바의 하도원은 1920년 10월 16일 춘양환 선편으로 귀국했다. 그는 그해 12월 성탄절 경에 1주간 동안 평양 서면 남형제산면 천동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했다. 이 기간 난치병을 고치는 일까지 있었고 500여 명 출석교인이 1천 명이 매주 출석하였다고 한다.

하도원은 조선장로교 강서노회의 추천으로 평양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도 4명의 여전도사와 함께 전도하였다. 그런데 1921년 2월에 강서군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는데 그 까닭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1924년 12월 19일에 평양 서문 예배당에서 열린 평양신학교 제18회 졸업식에 참여하였고, 그는 26명의 졸업생 중 한 명이었다. 그 후의 그의 행적을 쉽게 찾을 수 없다.

damien.sohn@gmail.com

 

06.13.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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