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문영운은 1880년 또는 1887년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3년경에 도미한 것으로 보인다.
리버사이드 한인장로교회 영수
1904년에 리버사이드의 파차파 애비뉴의 길과 코태지 스트리트 길이 만나는 코너에 한인 캠프가 설치되었다. 리버사이드 지도에는 한인 거주지 Korean Settlement라고 적었다. 바로 이 한인 거주지가 한인캠프다. 이 한인캠프는 1937년까지 지속하였다. 장태한 교수에 따르면 약 20개의 실용적인 목조건물은 모두 1층이었고, 커뮤니티 센터와 2, 3세대용 건물은 1.5층이었으며, 대부분 직사각형이었으나 3개의 건물은 정사각형이었고, 기역자 건물도 있었는데, 하나같이 각 방의 창문은 하나였고, 5채는 창문 가리개가 있었으며, 12채는 타일 굴뚝이 있었고, 2개의 건물에는 스토브 파이프가 있었지만 다른 2개의 건물은 굴뚝이 없었으며, 수돗물이 나오지 않고 전기도 설치되지 않은 열악한 판자촌이었다.
문영운의 이름이 소개되기는 1913년 12월이다. 그가 새해 1914년 리버사이드 국민회 지방회 대의원에 선임되었다. 당시 회장에 김순학, 부회장에 이 일, 총무에 정지영, 학무원에 김중원, 법무원에 이 원, 구제원에 이성민이었다. 그는 새해 1월에 낼시따에서 사망한 이인초의 장례식비를 위하여 의연금을 기부했고, 그해 4월에는 국민의무금을 낸 것만으로도 그의 민족사랑과 나라사랑을 엿보게 한다.
문영운은 1914년부터 리버사이드 한인장로교회를 섬긴 것으로 보인다. 그는 본 교회 영수였다. 그는 민찬호 목사를 돕는 조사였고, 민찬호 목사는 재미한인을 위하여 미국북장로교가 파송한 내지선교사 라프린 목사의 지도하에 남가주와 중가주에 있는 재미한인을 선교하는 순행 목사였다. 당시 미국북장로교와 미국북감리교가 선교지역 구분을 했고, 남가주와 중가주는 미국북장로교 선교구역이었다.
리버사이드 한인장로교회는 파차파 애비뉴 1158번지에 있었다. 오늘날의 4430 코멘스 스트리트다. 본 교회에서 주일예배와 주중예배 등 두 번의 예배가 있었다. 어느 해인지는 몰라도 교회간판에 소개된 대로 주일 오후 2시 30분에 예배가 있었고, 목요일 오후 8시에 목요 예배가 있었다.
1914년 4월 리버사이드에 총 30여 명의 한인이 거주했다. 이들 중 박충섭의 주선으로 귤 따는 일을 하는 자가 많았고, 그 외에 여관에서 일하는 형제도 있었다. 그해 5월에 서간도 동포의 기황을 구휼하기 위하여 의연금을 기증한 사람은 본 교회 교인일 것이다. 그 명단에는 정명애, 김변선, 태정근, 이성민, 박화준, 박병원, 박충섭, 홍재형, 김진행, 김순학, 이 일, 김병환, 이학현, 김대일, 구정섭, 박호근, 장한조, 김태연, 이 원, 전기련, 윤병렬, 정지영 등 총 22명이다. 그해 4월에 4, 5 한인가정이 있었다고 하니 이들만 해도 10명이 될 것이고, 어린이도 있었을 터이니 30여 명이 되겠다. 그해 3월 리버사이드에 재학한 학생 네 명이 이들 가정의 어린이일 것이다. 이들은 전경무가 중학교 1학년, 김마태가 중학교 3학년, 전경유가 초등학교 2학년 그리고 김달리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1914년 8월의 리버사이드 국민회 지방회 임원을 소개하면 회장에 김순학, 법무원에 구정섭, 학무원에 정지영, 서기는 이학현이었다. 이듬해 이학현이 회장에 선출되었고, 문영운은 서기로 선임되었다.
1914년 11월 30일 현재 미국북장로교 내지선교부 산하 로스앤젤레스, 리버사이드, 클레몬트, 업랜드, 디뉴바 등 가주 한인장로교회의 통계에 따르면 총 세례교인수가 189명이었고, 1914년 한해에 44명이 증가하였는데 32명은 장년 세례자였고 12명은 유아세례자였다. 그리고 16명이 원입 교인이었다. 매 주일예배에 참석한 평균수는 132명이었으며 주일학교의 매 주일 평균 참석수는 76명이었다. 그리고 대학 재학생이 3명, 고등학교 재학생이 14명, 초등학교 재학생이 46명이었다. 지난 한 해 동안 헌금한 총 헌금액은 1,486달러 16센트였고, 교회 수리비는 20달러, 자선활동비로 지출한 비용이 358달러 90센트였으며, 내지 선교 사역을 위하여 266불을 지출했다. 위의 통계에서 리버사이드의 수치를 가름하기는 어렵다.
신한민보에 따르면 1915년 리버사이드에는 교회로 인하여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났던 곳이었고, 근래 그곳 교인의 열심히 교회가 더욱 발전하는 모양이라고 소문이 났다.
그해 3월 31일에 가주 동양인을 위한 미국북장로교 내지 선교사인 John H. Laughlin 선교사가 민찬호 목사와 더불어 리버사이드를 방문했다. 이에 본 교회는 이들을 위한 환영회를 성대하게 열었다. 많은 교인이 모인 가운데 라프린 목사는 중국 선교사 시절에 알았던 중국어로 찬송가를 불렀고, 여학생 송마티는 영어로 찬송을 불렀다.
문영운은 1915년 4월에 리버사이드의 인근 업랜드로 이주하게 되어 일반 교우들이 전별식을 마련하였다. 1915년 4월까지 영수로 재임하였는데 아마 1년간 본 한인교회를 섬긴 것으로 보인다. 그달에 리버사이드 한인장로교회는 문영운의 후임으로 하도원 장로를 교역자(영수?)로 세우고 최재덕 집사를 선출했다. 하도원 장로는 한국에서 여러 해 동안 장로로 교회 일을 한 경험이 있던 자였다.
리버사이드한인장로교회 영수...국민회 참여 후원금 모금
본국친구 여비 마련차 업랜드 방문 길에 교통사고로 사망
업랜드 한인장로교회
1915년 4월에 업랜드로 이주한 문영운은 업랜드 한인장로교회에 출석하였을 것이다. 당시 본 교회 목사는 박 선이었다.
업랜드는 리버사이드에서 보면 서북쪽으로 찻길로 22마일 떨어져 있다. 이곳에 한인이 거주하기는 190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문영운이 업랜드로 이거할 때인 1915년 4월에 업랜드 한인의 수는 70여 명이었다. 임준기가 이곳에서 노동 주선을 하였는데 신용을 얻어 일자리가 전보다 더욱 많이 들어왔고, 70여 명도 부족하였다.
1915년 4월 말에 업랜드 한인장로교회는 백인 업랜드 장로교회를 빌려 스트왓 부인을 위한 대연을 열었다. 스트왓 부인은 지난 10년간 한인들을 위하여 열심이었다. 임준기가 노동을 주선하여 대부분의 한인 노동자들이 이 스트왓 부인의 농장에서 일했다. 할렐루야를 일동이 찬미함으로 개회하여 본 교회 백인 목사 알리슨이 기도하였고, 박 선 목사가 찬사를 하였으며, 민 부인이 찬미 독창을 하였고, 미국인 서전트가 설교하였으며, 강영승이 찬미 독창을 한 후 백인 목사 헌트가 설교하였고, 이요섭이 찬미 독창을 한 후, 백인 목사 스톤이 설교하였으며, 강영각이 나발을 분 후 스트왓 부인이 설교하였고, 임보배가 찬미 독창을 한 후 곽림대 목사가 설교하였으며, 팩손 쿡과 스트왓 리의 이중창에 이어서 이종화가 설교했고, 백인 파머 여사가 바이올린을 연주하였으며, 음악대가 음악을 연주한 후 폐회했다. 그런데 이 대연에 문영운이 순서를 맡지 않았다.
문영운이 1915년 11월에 국민회 다뉴바 지방회 대의원으로 선임되었다는 광고가 있었으므로 그의 다뉴바 이주는 1915년 11월 이전이다. 다뉴바에는 한인장로교회가 있었으니 본 교회에 출석했을 것이다. 문영운은 늦어도 1915년 12월에 다시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였다. 그가 1916년 2월에 국민회 리버사이드 지방회 신년도 대의원으로 선임되었기 때문이다. 1916년 6월에 그가 국민 의무금을 냈으니 그의 나라 사랑은 계속되었다. 그 후 그가 멘티카로 이주했다. 그런데 1916년 12월에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던 중 몸을 쉬고 있었는데 그달 19일 상오 9시경에 샌프란시스코 마켓트 거리에서 자동차에 치여 왼편 다리뼈에 중상을 입었다. 그래서 그곳 덕인 병원에 입원하여 1개월간 치료하였다.
리버사이드 한인장로교회 간판
리버사이드
문영운이 1917년 1월경에 다시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였다. 그해 3월 4일 국민회 리버사이드 지방회 통상회의에서 회장 정지영이 사임하여 문영운이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3월 9일에 문영운이 본국으로부터 오는 친구의 여비를 위하여 업랜드를 방문했는데 리버사이드로 돌아가는 길에 전임 총회장 강영소를 모셨다. 그들은 온타리오와 리버사이드 간에 운영하던 A.R.G. 버스 회사 소속 27세의 백인 알프레드 H. 존슨이 운전하는 5인승 발룬 버스의 뒷좌석에 탔다. 그날 오후 2시 45분에 온타리오를 떠나 온타리오 외곽에 이르러 비가 와서 버스 기사가 옆 커튼을 내렸고 그나마 후추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버스 기사가 서던퍼시픽 화차(기차)를 보는 순간 브레이크를 잡았으나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못한 채 철로 위에 올라가 기차와 맞부딪쳐 기차가 버스를 밀고 얼마간 이동하는 과정에서 버스는 완전히 부서졌고, 승객 네 명이 모두 떨어졌다. 버스와 기차가 시속 15마일 이하였다고 한다.
문영운은 목뻐와 두개골이 단절되었고 말을 못 한 채 곧 세상을 떠났다. 강영소는 두부를 다쳤으나 요행 중 상처가 없었고 움직일 수 있으니 의사는 염려없다고 단언하였다. 버스 기사는 얼굴과 앞이마와 코에 중상을 입었고, 다른 백인 승객인 온타리오 목장 주인인 55세의 풀러는 심각하게 중상을 입어 온타리오 병원에 입원했다.
신한민보는 “문영운씨는 다시 만날 기회가 없으니 애통한 정을 금치 못하여 씨의 생명을 달하노라. 씨는 일직이 그리스도 교리를 의지하여 마음이 참되고 품행이 단정한 좋은 친구라. 생평에 남을 위하여 충성을 다한 고로 신후의 장물이 없으되 오직 상천은 선인을 어여삐 보사 착한 아들을 주어 현금 평양에 있어 가정을 이을 만한 학문을 배우나니 이것이 그 돌아가는 혼을 위로할 일이로다”라고 적으면서 “소위 문명의 최악이 우리의 선한 사람을 해롭게 한 것은 길이 느낌을 마지 않노라”고 한탄했다.
도산 안창호는 급보를 받고 민찬호와 강영승과 조갑석 등과 함께 온타리오에 와서 경무청의 심사하는 것을 보았는데 강영소는 당시 증인으로 출석하였다. 그 후 강영소는 업랜드 샌안톤 병원으로 입원하였다. 북미총회는 이 사건에 대하여 클래몬트 지방회에 훈시를 보내어 사실을 조사하였고, 온타리오 경찰의 보고를 기다렸다. 그달 11일 하오 1시 30분에 가주 장로교 순행 목사 민찬호의 주례로 장례식을 마친 후 온타리오 매장지에 안장하였다.
국민회 리버사이드 지방회에서는 그달 25일 하오 8시 30분에 그가 영수로 섬겼던 리버사이드 한인장로교회 예배당에서 고 문영운의 추도회를 거행했다. 국민회 리버사이드 지방회 회장 이성민의 주례로 남녀 동포 전부가 출석한 가운데 추도사, 창가, 현악, 기도 등의 순서로 진행했다. 그의 묘지는 벨리뷰 메모리얼 팍의 Section I, Lot 3, grave number 3이다. 그런데 그곳에 그의 묘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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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0.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