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영훈은 1878년 평북 의주군 월화면 호암동에서 의주 부사 김유현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김유현은 국내 최초 교인이었던 백홍준의 사위 김관근의 인도로 1897년에 신자가 된다. 한학과 한시를 배운 그가 사무엘 마펫(마포삼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평양신학교 재학 중 그는 고향 호암교회 장로이면서 조사였다. 1913년 6월에 신학교를 졸업한 그를 그해 8월 북평안노회는 총회 지시에 따라 그를 중국 선교사로 임명하면서 목사로 안수하였다.
중국 산동
신학교 선배 박태로와 동기 사병순과 함께 김영훈이 1913년 장로회 총회에서 중국 산동성 내양으로 파송을 받는 데는 두 가지가 거론된다. 첫째, 조선에 온 선교사들이 미국의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힘들고 불편한 조선에서 젊음을 바치는데 크게 감격했던 그가 기도하면서 선교사의 꿈을 키웠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1912년 장로교 총회는 총회를 조직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조선의 근간이 되었던 유교에 감사하여 유교를 창시한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동에 복음으로 빚을 갚는다는 취지다.
김영훈은 가족을 데리고 1913년 11월 산동 선교팀과 함께 내양현 서문내에 가서 중국인 가옥을 임대했다. 내양현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양현의 지사로부터 큰 잔치를 베풀겠다는 초청장을 받은 답례로 그가 보낸 한시에서 내양선교의 물꼬가 텄다. 그 한시는 지사가 기독교인이 될 것을 간절히 권고하고 신자가 되면 선한 통치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내양현에서 가장 유식한 한학자 장수명이 이 시에 감동하여 그를 방문하였고 70세가 넘은 이 노학자는 첫 개종자가 된다. 그가 중국어 연수 중 서둘러 필담으로 복음을 전하였다면 선교사로서의 뜨거운 소명이 확인된다. 1917년 총회록에 따르면 현지 중국인들은 우리 장로교회를 신령한 교파로 인증하고 우리 선교사를 환영하였다. 김영훈은 선교팀과 함께 중국인 어학선생의 도움으로 내양 부근 각 촌에 있던 교인 5, 6인을 모아 성내에 복음당(기도처)을 세웠다.
김영훈과 그의 선교팀은 목사의 교회사역, 교사의 학교사역 그리고 의사의 의료사역으로 구성된 '삼사운동' 중 교회개척과 학교사역을 병행했다. 주일강론회와 수요기도회를 시작하였으며, 필답과 전도지, 성경화본 및 칠판기를 사용하여 순회전도를 하였고, 시장과 가정 그리고 노변에서 노방전도를 함으로써 유행전도를 했다. 그리고 사경회와 심방 등 좌당전도도 겸했다.
1915년에 최초로 3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등록교인 40여 명 중 30여 명이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이들 중 군인 한 사람이 믿기로 작정하고 강서당에 밤마다 시간마다 와서 예배를 드리며 성경공부를 부지런히 하였다. 그해 성탄절 헌금으로 서책 1상자를 구매하여 내양 교도소에서 전도하였다.
그리고 김영훈의 선교팀은 내양 성내 복음당에서 '보통교육'을 통해 내양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의 문맹퇴치를 꾀했다.
1916년 총회 전도국은 산동 선교부에 이일영과 심익현 등 두 목사를 보내 선교사 3인이 거주하던 집은 두 집에서 살림하게 하고 한 집을 더 마련하기로 하는 등 선교사와 선교사역을 배려했다. 그런데 몸에 이상이 있던 선임자 박태로가 1916년 4월에 가족과 함께 서둘러 귀국했다.
1916년에 세례교인 12명과 원입교인 30명 등 42명의 교인 대부분이 주일예배에 참석했고, 매주 헌금은 8, 90전이 되어 한 해 총 헌금액은 약 50원이었다. 1917년 9월 총회 보고에 따르면 많으면 5, 60명, 적으면 4, 50명이 주일예배에 참석했고, 이중 세례교인이 28명, 학습교인은 35명이었고, 새로 믿기로 한 자가 26명이었으니 작년에 비해 성장했다. 그해 2명의 집사를 세웠고, 6곳에 기도처를 조직했으며 이중 3곳에 학교를 세웠는데 총 32명의 학생이 등록하여 총 3명의 교사가 가르쳤다. 헌금은 매 주일 4, 50전이었는데 1년간 총 120여 원을 헌금했다.
타문화 선교는 열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김영훈은 사병순과 함께 1917년 4월 선교지를 이탈하고 환국했으니 선교활동 3년5개월 만이다. 그러나 총회는 이들에게 위로하는 편지와 주의 일을 보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편지했다. 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이었던 그가 1927년 7월 27일자 ‘기독신보’에 기고한 회고담에서 그의 철수는 선교가 불가능했기 때문이 아니라 총회전도국이 선교사에게 서양 선교사들과 같이 풍족하지 않더라도 제반시설을 마련했어야 했다면서, 빈약한 가운데서 최선을 다했고 철수에 앞서 선교목적을 완수했고 선교 토대 또한 구축했음을 주장했다.
상항 한인교회 전도사
김영훈은 산동 선교팀의 사병순과 함께 1917년 7월 20일 '차이나'호를 타고 상항(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들은 상항한인교회의 환영회에 참석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다음 달 29일 맨티카한인회가 주최한 국치 기념행사에 참석하여 사병순이 기도한 후 김영훈은 '장래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그해 상항한인교회 추수감사절 예배에서 그는 중국인을 배려하여 중국어로 설교를 했는데 ‘신한민보’는 '흥미 있는 예식의 순서'라고 평했다.
미국 남감리교 두부스 감독의 사회로 1918년 10월에 상항한인교회에서 모인 북가주한인감리교회 지방연회에서 최진하와 더불어 김영훈은 상항한인교회 전도사로 임명을 받았다. 그는 상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심방하고 위로하며 기도해주고 전도했다.
한인 책방 '소년서회'의 주인인 주 원이 귀국함에 따라 1918년 1월 김영훈이 '소년서회'를 넘겨받았다. 매손 길 1242번지에 있던 '소년서회'는 웅변법, 논어 등 일반서적 외에도 ‘신약소본’과 ‘찬송가’ 등 기독교 서적도 있어 문서선교를 감당했는데 그해 11월 흥사단 본부로 매각한다. 그해 9월 김영훈은 맨티카한인감리교회 예배당 건축에 5달러를 헌금했다.
삭도 한인교회
김영훈은 미국 남감리교회 파송으로 1919년 6월에 삭도(새크라멘토) 한인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한다. 당시 김홍균은 본 교회의 전도사였다. 김영훈이 부임한 다음 달 8일에 삭도 농원 중개인 이창식이 현주성의 28세 된 부인을 유인하여 도망을 친 사건이 발생하여 그의 부임 신고식이 혹독했다. 1920년에는 김영준이 별세하고, 북가주 윌로우스의 사덕순이 삭도에서 수술하는 등 우울한 한 해였지만, 양주은과 김홍균 전도사가 딸을 낳고 장덕일이 득남하는 기쁨도 있었다.
1921년에도 희비는 엇갈렸다. 안성곤이 별세하였고, 신경환과 김종학과 삭도 지방회장 안영렬의 부인과 김홍균 전도사의 부인이 수술을 받았고, 비행학교 학생 박희성이 6천척을 오르다 낙상하여 중상을 입었는가 하면 김계선은 딸을, 김찬일은 아들을 각각 낳았고 박대일과 김도리스가 결혼했다.
본 교회 평균 출석 교인수는 1919년에 47명, 1920년에 67명, 1921년에 63명이었다. 당시 한인 노동자는 일감을 좇아 이동하였으므로 오늘날의 성장을 상상할 수 없다.
1913년 중국선교사 파송, 1917년 도미 상항•삭도목회•순행전도사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조직, 함태영 목사와 ‘장로회사기 하권’ 집필
양복 입은
김영훈 목사
그리고 김영훈은 삭도국어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국어교육을 힘썼다. 1920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유치반 학생 14명과 고등반 학생 3명이 등록하였는데 김재신이 가르쳤다. 그녀는 사세의 어려움을 생각지 않고 제2세 국민교육을 당연한 의무로 알고 허락하였는데 김영훈도 그러했다. 그의 목회는 1921년 10월까지니 2년 4개월이었다.
순행전도사
김영훈은 1921년 10월에 모인 미국 남감리교 지방회에서 순행전도사로 임명을 받았다. 그는 맨티카와 맥스웰, 윌로오스, 스탁톤 등 북가주 일대에 흩어져 노동하는 한인에게 복음으로 위로하고 소망을 일깨워주는 일로 동분서주했다. 그해 평균 예배출석수는 맨티카교회가 20명, 맥스웰교회가 35명, 윌로스교회가 30명, 스탁톤교회가 22명이었다. 그러나 그의 순행전도 사역은 1년을 넘기지 못했다.
미주 독립운동
1918년 1월 김영훈은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법무원을 맡으면서 미주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대한독립에 미주 중국인의 협력을 이끌기 위해 노력했고, 흥사단에서 활동했다. 1917년 11월에 신한민보에 기고한 "한국의 망한 원인과 우리의 동포의 급선무"에서 그의 독립운동은 '동포의 정신적 단합'에 있었다. 그가 쓰기를 "슬프도다. 우리 대한의 망한 원인이 어디 있느냐... 우리 대한이 건국 4243년 8월 29일에 망하였다 하나 이날은 나라를 장사한 날이오. 정 망한 날은 병정 뽑고 관제 변하는 날이라... 우리 동포의 급선무가 무엇이뇨... 우리 조국을 회복키로 주의를 일치케 확정하는 것이 급선무라... 주의만 일치하고 보면... 단합이 생기며 단합 중에서 희망이 생기며 희망 중에서 지혜가 생기며 지혜 중에서 발달이 생기며 발달 중에서 용감 전진의 운동을 금치 못하게 내리니 우리 조국을 회복하는 일이 결감이 없을 줄 믿나이다."
귀국
1921년 9월 제10회 총회 회의록에는 "지금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김영훈씨가 중국 산둥으로 다시 보내 주시기를 바란다는 청원을 전도부로 보냈다"고 적었는데 이듬해 그는 의주 서노회 목사가 되었고 2년 후 의산노회 노회장을 거쳐 1925년 의주 양실학교 교장에 이어 1927년 제16회 총회장으로 선출된다. 총회장으로서의 그의 최고의 업적은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조직과 함태영 목사와의 공저인 ‘장로회사기 하권’ 집필이다. 1932년 2월 갑자기 의주 서교회 목사직을 내려놓더니 1939년 향년 61세에 김영훈은 하나님의 부름에 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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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1.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