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배민수는 구한말이었던 1896년 10월에 충청북도 청주에서 청주 감영 진위대의 육군보병 부교였던 배창근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907년에 아버지 배창근이 F. S. 밀러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에 입문하면서 배민수는 교회에 출석했다. 이듬해인 1908년에 아버지 배창근이 의병 활동으로 체포되어 서대문 교도소에서 처형되던 때 그는 청남 기독교 학교에 입학했고, 3년 후인 1912년에 평양 숭실중학교 예비과에 입학했다.
숭실 학생이던 그는 엘리 M. 모우리 선교사를 지휘자로 한 중앙장로교회 성가대의 일원으로 전국을 돌며 음악선교활동에 참여했다. 그가 숭실 학생이던 1915년에 노백린, 장인환, 김형직과 연락하여 30명의 학생과 함께 대한국민회 조선지회를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이와 관련하여 1918년 1월에 일경에게 붙잡혀 평양 교도소에서 1년간 복역했다. 1919년에 출소한 후 어머니와 누나가 거주하던 함경북도 성진에 갔었는데 그곳에서 일어난 삼일만세운동에 가담하여 직접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선언서 5천 장을 만들어 나누었다.
이 사건으로 함흥 감옥에서 1년6개월의 영어의 몸이 되었다. 1921년 4월에 출옥한 그는 공부에 전념하고 1928년 숭실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평양 YMCA 총무이자 오산학교 교장이던 조만식의 영향을 받아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12명으로 기독교농촌연구회를 조직하고 농촌운동을 시작했다. 1930년에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다녔다.
도미
배민수는 유학차 1931년 6월 10일에 미국 시애틀에 상륙한 후 곧바로 평양신학교 교장 사무엘 마펫의 모교이자 숭실중학교의 존경하던 은사 김인준이 졸업한 시카고의 맥코믹 장로교신학교에 입학했다. 시카고한인교회에 출석했던 그는 그해 7월 19일에 갈홍기가 본 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는 취임식에서 플루트 독주로 특별음악순서를 맡았다. 이날 장세운이 사회를 맡은 가운데 강영소의 취임축사와 갈홍기 목사의 설교와 위혜진의 피아노 독주도 있었다.
1932년 조직된 기독우애회를 통해 배민수는 신조의 일치, 인종 간의 형제화, 사회 경제의 부흥 등의 세 가지 실천과제를 통해 기독교 민족주의에 입각한 복음주의 실천을 꾀했다.
1933년 맥코믹 신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배민수는 그해 7월 초에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그는 농촌 진흥이 조국을 구하는 길이라고 절감하고 조만식 선생의 집에서 기독교 농촌연구회를 재건하고 농촌운동에 투신했다. 그해 9월 선천에서 열린 조선장로교회 총회가 농촌부를 신설할 때 그는 초대 총무가 되었다. 이듬해 10월에 그는 목사안수를 받았다.
맥코믹에서 알게 된 미국의 여류 재벌 그린리프로부터 4년 동안 연 4천 달러의 지원금을 받아 한국은 물론 만주까지 1주일 단위의 농촌계몽 강연을 3년간 200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농촌부 기관지인 ‘농민생활’에 이어 1935년 3월부터 ‘농촌통신’이라는 월간 소식지를 간행했다.
주기철 목사의 권유로 배민수의 농촌운동을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으로 알아차린 일본 경찰의 검거망을 피하여 1938년 7월에 조선장로교회의 원로인 허 섭 목사와 함께 그는 두 번째 도미하였다. 그는 시카고에 여장을 풀고 3년 동안 28개 주의 440교회와 단체를 방문하고 1,300여 회에 달하는 설교를 통해 9만 명을 만나 일본의 신사참배와 한국 기독교인에 대한 일본의 박해를 전했다.
항일투쟁으로 감옥살이 2회, 유학후 귀국 도미 2차례
미국서 독립운동, 뉴욕한인교회서 담임목사 1년 시무
해방 후 귀국 교회설립, 삼애농민학원 설립 등 사역
뉴욕한인교회
배민수는 1941년에 프린스턴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조셉 로마드카, 존 맥케이 그리고 오토 파이퍼 등의 교수에게서 배우며 1943년에 졸업했다. 그가 프린스턴 재학 중 뉴욕한인교회에 출석했다. 1942년 부활절에 뉴욕한인교회에 참석하여 기도순서를 맡았고, 그해 여름방학 동안 선교 총회의 위임을 받아 몬태나 주에 있는 인디언 교회에 가서 12주일간 설교하고 돌아가는 길에 시카고한인교회를 방문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때 배민수는 워싱턴의 국무부와 뉴욕 국무성 전시 검열국에서 근무했다. 이 기간 1943년 11월 17일에 뉴욕 한인예배당에서 국민회 주최로 순국선열 기념식에서 그는 소감을 발표했다. 그해 다음 달에 뉴욕 재류 한인 유지가 카이로 선언으로 연합국의 루스벨트, 처칠, 장개석 등이 전후 한국 독립을 약속한 때에 전쟁 후 한국이 독립되고 그 기초를 건설하여 2천6백만 동포의 생활 번영을 보장하기 위하여 한국의 공업, 산업, 농업, 무력 등을 조사 연구하는 목적으로 경제연구회를 조직할 때, 배민수는 6인 장정 제정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1944년에는 배민수가 여러 기관의 임원으로 선정되었다. 그해 3월에는 한국부인회 동부지방회의 2인 임원과 2인 의사 중 배민수가 선정되었다. 그해 6월 한국 외교위원부가 협찬부를 조직할 때 교육부 협찬원으로 선임된 그는 4년 동안 1000회에 달하는 한국 소개 강연을 개최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박사학위를 하기 위하여 드류 대학교로 가는 김준성을 이어 배민수가 뉴욕한인교회 제6대 담임목사가 되어 1944년 12월 28일에 배 목사 환영 특별예배가 있었다. 배 목사의 첫 사역은 이듬해 1월 28일 세계 제2차 대전에 종군하는 서상복, 김주항, 김철규 그리고 이프링크 등 4명의 뉴욕한인교회 교인을 위한 만찬회였다. 본 교회 친교실에서 본 교회 교인은 그들을 기쁘게 보내는 정을 나누었다.
1945년 3월 1일 하오 8시 뉴욕한인 예배당에서 뉴욕한인 임시 공동회 주최로 삼일절 기념식을 거행했다. 60여 명의 동포가 모인 가운데 김 경의 사회로 거행한 기념식에서 애국가를 합창하고 윤응팔이 기도한 후 사회자가 식사를 담당하고, 전처선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정신희의 어린 딸 정엘리노의 한국어 독창, 김세선의 삼일운동 약사, 음악 합창, 김세선의 연설이 차례로 있은 다음 소감 순서에서 배민수는 이원순, 서경순, 명신홍에 이어 소감을 발표했다. 소감 순서에 이어서 기부금 모금이 있은 후 이민 2세 청년 3명이 강단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 삼창으로 폐회했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 이후 뉴욕에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의 손에 든 화불에 불을 켜지 않았는데 1945년 5월 8일부터 유럽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여 다시 불을 켰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뉴욕한인교회 교인들이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기도의 불을 켰을 것이다.
그해 6월 14일 하오 11시에 천세헌이 64세로 부인과 2남 1녀를 남겨두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나 소년이었을 때 도미한 그는 공립협회와 국민회에 가입하여 충성을 다했다. 그달 19일에 나성한인장로교회 김성락 목사의 주례로 장례식이 있었는데 배민수의 뉴욕한인교회는 그의 장례식에 요한복음 14장을 읽어달라고 부탁하였고, 조전도 보냈다.
그해 7월 11일에 김희복이 별세했다. 락 아일랜드 윅폴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배민수가 그의 죽음 소식을 듣고 그곳에 가서 그곳 목사와 함께 장례식을 주례했다. 김희복이 일하던 주인 T. W. 그린에 따르면 그는 작년부터 그린의 집에서 일하였고, 지난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주인이 엑스레이 검사를 해보라고 하여도 듣지 않았고 약 2달 전에 입원 치료하였다. 김희복이 매우 신실한 사람으로 신임을 받아 그린의 부인이 그 신후사를 잘 처리하여 주었고, 그린 부인이 김희복의 모친과 삼형제의 사진을 보이면서 그들이 경성 숭인동에 산다고 하고 김희복이 유산이 있으니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려 그 돈을 유족에게 보내주기로 법률 수속까지 완전히 하여 두었다고 배민수가 전했다.
배민수는 광복 후 미 군정의 군부 임무를 띠고 상항을 거쳐 정기원, 홍윤식, 김진홍, 이문상, 이병간 등 10여 명과 함께 1945년 11월에 귀국했다. 이로써 그의 뉴욕한인교회 사역은 그해 11월까지 약 1년간이다.
귀국
귀국한 배민수는 1947년 6월에 성도교회를 설립했다. 그 후 도미한 배민수는 가족과 함께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하던 1948년 12월에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미국 맥카레스터 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듬해인 1952년 11월에 그는 대전에서 기독교 연합봉사회를 창설하고 그의 필생의 사역이던 농민운동을 재개했다.
1953년 11월에 대성교회를 설립한 그는 1956년에는 대전 기독교연합봉사회 내에 기독교 농민학원을 개원하고 원장에 취임하였고, 1958년에는 농촌 실천론인 ‘그 나라와 한국 농촌’을 간행했다.
1964년에 기독교여자농민학원을 설립하였으며, 그리고 2년 후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삼애농민학원을 설립하고, 초대 원장에 취임했다. 삼애란 하나님 사랑, 농촌 사랑 그리고 노동 사랑이었다.
그는 1967년 말에는 대전 기독교 여자 농민학원을 합병한 재단법인 삼애 농업기술학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이듬해 1968년 8월 25일 새벽에 자택에서 향년 78세로 타계했다.
배민수가 작사하고 민요조로 작곡한 다섯 절의 농부가를 아래에서 소개한다.
1. 하나님주신 우리나라 편편옥토가 이 아닌가/높은데 갈면 밭이 되고 낮은데 갈면 논이 된다. 2. 봄이 되면 소를 몰아 상평하평 논밭 갈고/씨를 뿌려 덮어노니 에루화 좋구나 싹이 났네. 3. 여름이오면 비가 와서 아랫논 웃땜이 물대주고/모를 심어 움켜노니 에루화 좋구나 잘도 큰다. 4. 가을이 되면 추수하여 오곡백과를 쌓아놓고/아들딸 삼남매 옹기종기 햅쌀에 콩밥이 맛좋구나. 5.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와 반도강산에 풍년이 와/하나님은혜 갚으려고 이렇게 노래를 불러보세 / 후렴: 에해 에야 상사디야
배민수의 사후 25년이 되던 1993년 8월 15일 광복절에 한국 정부는 배민수와 그의 부친 배창근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으니 늦은 감이 있지만 다행이었다. 삼애농업기술학원을 기증받은 연세대학교가 삼애기념사업위원회를 조직하고 매년 기념사업을 추진하므로 그의 애국정신이 계속되고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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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9.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