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창영은 1909년 10월 30일 황해도 은율군 구월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1930년에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본교 교장인 조지 S. 맥쿤(윤상온) 선교사의 주선으로 졸업한 그해 6월에 도미하여 펜실베이니아 주 이스턴에 위치한 라파이에트대학에 입학했다. 1934년 본 대학을 졸업한 그는 본 대학에서 가까운 버크넬대학에 입학하여 한 학기를 마친 후 장학금을 받아 뉴욕시에 있는 뉴욕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이곳에서 ‘동양인기독교 학생연맹’에 참가하여 1936년에는 회장에 당선되었다. 이 연맹은 김활란과 허진업 그리고 장덕수가 참여했던 단체다.
뉴욕한인교회
뉴욕신학교 2학년이던 1936년에 미국 북감리교 뉴욕 지방감리사 코일 목사의 주선으로 임창영은 영문도 모른 채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일요일에 교회에 갔지요. 현관에 들어서니 교회의 원로이신 안정수 선생께서 맞아주시며 ‘교인들이 베이비(baby) 목사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시며 예배실로 인도하시더군요. 10여 명 교인 앞에 절을 하면서 ‘저는 베이비입니다. 잘 길러주십시오’ 했더니 뉴욕에서 제일 연로하신 홍 부인이 ‘참, 몇 해 전 유(you)가 잠뱅이 입고 긴 스타킹 신고 교회에 들어올 때는 정말 베이비 같았는데, 어느새 목사가 됐어!’ 하시어 좌중이 다 웃으며 담화하는 동안 10여인의 교우들이 다 들어와서 톱톱히 예배를 보았습니다.”
그해 1936년에 임창영이 본 교회 윤병구 목사를 이어 제4대 담임목사가 되었다. 그가 26세였음에도 탁월한 영어 실력이나 활동력이 목사가 되기에 남달랐던 점이 강점이었다면 당시 경제공황이어서 임시목사로는 적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목사 봉급은 뉴욕지방 감리회 뉴욕시 전도국이 보조한 연간 500달러와 한인교회의 연간 100달러를 합해 총 600달러였으니 매월 50달러였던 셈이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김형린, 안승화, 남궁염, 조 극, 이재희, 이옥성 등 교회 이사원 6인을 증선하였다.
임창영의 취임식은 그해 9월 16일에 있었다. 안정수로부터 교인들이 사정이 있어 많이 못 나올 것이라는 귀띔을 받은 임 목사는 생각 끝에 뉴욕신학교 동료 학생들을 모두 초대했으니 취임예배는 대성황이었다. 한인 교인은 별로 없고 외국인 학교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한국어로 준비했던 설교를 영어로 하였다.
임창영이 부임한 지 한 달이 못 될 즈음에 독일 베를린에서 올림픽경기가 있었다. 이곳에서 감격스럽게도 한국의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하였다. 한국 언론들은 이 역사적인 순간을 다투어 보도했는데 동아일보가 손기정 선수의 셔츠에 부착된 일본기를 삭제하고 중앙일보가 불순한 기사를 썼다 해서 일본 당국은 이 두 신문사를 강제로 폐간시켰다. 이에 1936년 10월 16일 임창영은 뉴욕의 한인들을 규합하여 교인들을 이끌고 뉴욕 일본영사관 앞에 나가 항의시위를 벌였다.
1936년부터 5년간 뉴욕한인교회 담임후 프린스턴대 박사학위 취득
뉴욕주립대 교수하다 귀국, 유엔한국대사 역임 정치/통일운동 관여
임창영의 모교인 숭실전문학교 교장 윤산온 선교사가 1937년 5월에 뉴욕을 내방했다. 그의 추천으로 유학을 온 임창영은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임창영은 은사이신 윤산온 선교사를 그의 강대상에 모시고 설교를 들었다. 윤산온 선교사는 그날 일반 교우에게 많은 부흥의 정신을 일깨웠다. 오후에는 근화회 회장인 박리근 부인의 주선으로 50여 명의 동포가 모인 가운데 융숭한 만찬으로 그를 모셨다.
1937년 한인 두 명이 자살했다. 뉴욕에 재류하던 김원준의 장녀 헬렌이 백인과 결혼하여 출가하였는데 1937년 5월에 돌연 자살하였고, 다음 달에는 이창수가 모살한 혐의로 1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고 그 판결을 불복하여 공소하였는데 순회 재판소에서 다시 심문을 받던 중 너무 억울하여 세상을 비관하고 돌연히 창밖으로 뛰어나가 8층에서 떨어져 자살했다. 이러한 현장에 임창영이 배석하여 그의 영어 실력으로 교인을 돌보는 목회를 감당했다.
임창영은 교포를 위한 일이라면 어디든지 뛰어갔고 어디든 함께했다. 그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학생들이 학업을 필하면 귀국해야 했는데 그 법을 엄중히 실시했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일제 탄압이 심한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아서 학교를 필한 후 숨어 지내는 자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그들이 체포당할 경우, 석방주선이 제 책임이었던 바, 성과를 거둘 때는 기쁨을 형언할 수 없었지만, 백방이 무효로 쫓겨 돌아가는 광경을 볼 때는 참으로 눈물겨웠습니다. 30년대 말기까지 경제난이 없지 않아서 교회에는 방마다 무직자들로 만원이었고, 제가 목회할 때는 유달리 병자, 사망자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환자를 돌보고, 입원시키고 사망자들을 위해 장비를 모금하여 안장해야 했으며 또 하나는 교회에 유숙하는 무직자들에게 커피, 도넛이라도 대접하는 것이었는데 제 월급이 2, 3주가 지나면 다 없어졌으므로 매달 하순에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중일 전쟁이 일어난 후 뉴욕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원동 시국이 비상하고 중대한 점을 깨닫고 이어 150달러를 모금하여 국민총회로 보내 남경 정부로 보냈다. 1937년 11월에 이러한 활동을 계속하기로 하고 뉴욕 한인들이 연합 중국 후원회를 조직했다. 상무위원에 임창영 뿐만 아니라 이덕환, 안정수, 황보익준, 안승화, 조 극, 전경준, 변민평 등이 선임되었다. 이들은 미국인의 원동에 대한 관심이 깊은 때에 한국의 사정을 선전할 뿐만 하니라 중국 항일전쟁의 후원과 일화배척 선전을 조직적으로 실행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미국 피츠버그에 모이는 미국인 평화단체 연합대회에 현피터를 대표로 파견하였는가 하면 이듬해 2월에는 1백 달러를 장개석 부인에게 보냈다.
1938년 3월 1일 하오 8시 뉴욕한인교회에서 6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삼일절 기념식이 있었다. 이날 김형린의 사회로 일동이 애국가를 부른 후 임창영이 기도를 담당했다. 이후 사회자의 취지 설명, 이종영과 윤영희의 국기 게양식, 한용규의 피리 독주, 오대도의 독립선언서 낭독, 김또리스와 김혜은의 이중창, 허진업의 연설, 김영옥의 바이올린 독주, 조 극의 임시정부에 대한 보고, 기념금 수합, 박리근의 독창 그리고 만세 삼창을 한 후 폐회했다.
1938년 3월 20일 주일에 뉴욕한인교회 창립 제17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내외국 인사 수백 명이 모인 가운데 파리스 스트릿에 있는 미국인 크라이스트교회에서 여러 가지 순서와 음악으로 성황을 이루었고, 기념식 후 다과회가 있었으니 임창영의 수고를 짐작할 수 있다.
창립 제17주년 기념식 2개월 후인 5월 13일 저녁에 뉴욕한인교회에서 음악회가 있었다. 예배당 수리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뵨 교회 부인회가 주선한 행사였다. 뉴욕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6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이광준의 피아노 독주와 최승희와 안필승의 강연도 있었고, 활동사진도 있었다. 연전에 미국북장로교의 파송으로 한국과 중국에 갔던 밀러 박사가 찍은 것으로 귀중한 한국 풍속 사진 2권과 중국 북경 실사 1권의 활동사진을 보여주었다.
1938년 8월 뉴욕한인교회 간사였던 오대도가 개인 사정으로 사임하였는데 그를 대신하여 홍태호가 피선되었다. 뉴욕한인교회는 재류 한인의 공동 집회소이자 이곳을 오가는 동포의 연락기관으로 한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기관이었다. 그달 16일부터 시무하는 홍태호는 뉴욕에 오랫동안 거주하여 동포의 사정을 잘 알므로 일반이 그의 취임을 환영하였다.
1939년 새해를 맞아 교인의 사업에 희망이 있었다. 김형진의 차우멘 도매업은 작년보다 커졌고, 황보익준의 찹수이 사업은 장래가 매우 유망했고, 안정수의 제조업은 그해 5월의 세계 박람회에 그 제조품이 장차 우리의 상품을 대표하여 진열될 가능성이 있었고, 이봉수의 인상 제조업은 백인상업계의 대환영을 받았고, 대학에서 공부하는 서상복은 동양 잡화상점을 열었고, 김 경은 조만간에 시내에 음식점을 열 계획을 했다. 이들 사업을 위하여 임창영은 무릎을 꿇어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이다.
그해 10월 29일 주일 하오 3시에 신임 감리사 피어슨 박사를 환영하는 예배가 있었다. 남녀 교인 7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강대상에 선 피어슨 감독은 세계적으로 도탄을 느끼는 이 시기에 하나님의 평화로운 말씀으로 일반의 신앙을 재촉하였다. 이날 유승기 부인과 간사 홍태호에게 세례를 주고 아울러 성만찬식을 인도했다. 그리고 그날 6시에는 동 교회 식당에서 신임감리사 환영 만찬회가 있었는데 뉴욕 선교부 재정 집행위원장 뉴월 박사와 동 부인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 민덕순의 독창에 듣는 이가 다 기뻐하였고, 박리근이 보여준 흉내는 일반이 웃다가 허리를 끊을 뻔하였다. 이날 세례를 받은 홍태호가 환갑을 맞아 그 부인이 마련한 음식에 모든 이가 감사했다.
그해 11월 19일 하오 8시 30분에 숭실대학 졸업생 주최로 뉴욕한인교회에서 평양신학교 교장 사무엘 마펫(마포삼열) 선교사의 추도회가 있었다. 내외국인 인사 40여 명 중에 박사의 두 아들과 남동생이 참여하였고, 한인으로는 10여 명의 숭실대학 졸업생이 참여하였는데 안승화는 워싱턴에서 차로 5시간 걸리는 거리를 마다치 않고 왔다.
1940년 1월 29일에 임창영이 결혼한다. 신한민보는 “뉴욕 한인사회의 드문 성황”이라고 당시의 결혼식을 소개했다. 그의 결혼 한 달 후인 2월 25일에 그가 한경희와 김덕춘의 결혼식 주례를 맡았으니 주례자 임창영이 총각이 아니었으니 다행이었다. 뉴욕 차이나타운에서 제일 큰 이발소를 경영하였던 한경희는 그달 오후 5시에 송재학의 사택에서 김덕춘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6시에 송 씨 내외가 신혼부부를 위하여 중국인 식당 연화관에 대연을 배설한 가운데 내빈 30여 명이 참여하여 신혼부부를 축복하였다.
중경에 있던 한국 임시정부가 일본에 선전포고한 지 약 3주 후인 1942년 1월 4일에 미주 동부 대한부인회가 뉴욕한인교회에서 조직되었다. 이 명칭을 만드는 과정에서 임창영이 ‘대한’이라는 용어가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냈다. 11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독립과 조선에 대한 선정을 목표로 적십자사를 통해 성금을 모아 전달하기로 하였다. 회원들의 연간회비는 2달러로 책정하였는데 창립한 지 한 달여 만에 144.50달러를 모아 적십자사 뉴욕지부에 전달했다.
1941년 8월에 임창영은 교회에 사표를 제출했으나 교인들의 만류로 감리교 연회가 열리는 이듬해 1942년 5월까지 사임을 미루고, 프린스턴대학원의 입학을 계기로 뉴욕한인교회를 떠났다. 이로써 그의 목회는 1936년부터 1941년까지 5년간이었다.
임창영은 1946년 프린스턴대학원에서 헌법정치학으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뉴욕주립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한국으로 귀국한 후 1960년 유엔주재 한국대사를 역임하였고, 이후 그는 국내정치와 통일운동에 깊이 관여하다가 1996년 1월 25일에 향년 87세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damien.sohn@gmail.com
02.01.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