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노준택은 1887년 9월 3일에 평안남도 평양 강흥면 5리에서 태어나 강서청년학교와 평양 숭실 중학을 거쳐 1919년에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졸업한 그가 모교에서 서무원 겸 학감 조수로 다년간 시무하면서 동 대학의 발전에 막대하게 공헌하였다고도 하고, 교사와 교감의 직무를 띠고 다년 시무하였다고도 한다.
노준택은 연희전문대학 음악과를 졸업한 윤기성과 함께 미국 유학차 선요 마루 선편으로 1924년 12월 12일에 상항에 입항하여 이튿날 대륙횡단철로를 이용하여 상항을 떠났다. 노준택은 이듬해 봄학기에 시카고 노스웨스턴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게렛성경학교였다. 그의 영어 이름은 아더(Arthur)였다.
시카고 한인감리교회 전도사
김창준 목사가 게렛신학교를 졸업한 후 1926년 12월에 한국으로 귀국하자 시카고 한인감리교회의 교역자가 공석이 되어 노준택이 담임 전도사로 선임되었다. 그는 평신도였으나 나이가 있고, 교회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적임자였다. 그는 설교뿐만 아니라 성경도 가르쳤다.
그해 12월 시카고 한인감리교회는 교회당을 사기로 하고 성탄절 축하식에 작은 연극을 준비하고 거의 600달러를 건축헌금으로 모금하였다. 이를 토대로 여러 인사의 많은 동정을 얻었고, 셋집이라도 빌리기로 하였다. 이듬해 5월 8일에 지금까지 예배를 드린 세인트폴 예배당에서 이사하여 레이크 팍 애비뉴 3901번지로 옮겼다. 이날 개당식을 거행하였다. 이 건물에는 예배실 뿐만 아니라 7, 8개의 침실이 있어 시카고에 거주하는 자와 이곳을 오가는 자들에게 편의를 줄 수 있어 김일선의 부인 김현숙이 이 사무를 담당하였다.
시카고 지방회 주최로 1927년의 삼일절 기념식이 그해 3월 1일 하오 8시 30분에 시내 세인트폴 한인교회에서 있었다. 47명이 모인 가운데 노준택의 기도로 시작했다. 이후 일동의 애국가, 지방회장 이 일의 개식사, 강영운의 독립선언서 낭독, 현재명의 독창, 차의석의 추도문, 김일신의 연설, 홍영태의 반도가 독창, 천세헌의 독립운동의 약력, 유 의의 간단한 연설, 강영소의 ‘3월 1일 작품,’ 일동의 국기 경례식 등으로 이어졌다. 폐회 후 만찬회가 있었다. 이 삼일절 기념식에 참여했던 47명의 대부분이 본 교회 교인이었을 것이다.
3월에는 본 교회 유지이자 유학생이었던 염광섭과 중가주 스탁톤의 문로라의 결혼식이 스탁톤의 미국인 장로교회에서 그 교회 목사였던 롱 박사의 주례로 있었다. 6월에는 노스웨스턴대학생 홍영태의 여동생 홍제니가 시카고로 유학차 왔고, 경성 제중원 출신의 의사로 약 6년간 의학을 공부한 최영욱 박사와 그의 부인 김필례가 본국으로 귀국하였고, 7월에는 라잉인 병원 간호과에서 1년간 공부하고 졸업한 이봉순이 시카고를 떠나 희비가 엇갈렸다.
북미유학생회 취임식이 7월 28일에 시카고 한인감리교회에서 있었다. 신임 행정원 임원으로 회장에 시카고대학의 장세운, 부회장에 콜럼비아대학 장덕수, 총무에 시카고대학 오천석, 서기에 노스웨스턴대학교의 최경식과 박원규, 재무부장에 시카고대학의 김학수, 영업부장에 시카고 탬플대학의 김 훈, 사교부장에 콜럼비아대학의 황창하, 체육부장에 프린스톤대학의 윤치영, 편집부장에 시카고대학의 오천석, 종교부장에 시카고대학의 장세운, 대여기본금 전무 콜럼비아대학의 황창하이었다. 시카고대학과 서북대학의 학생은 모두 본 교회 교인이었다.
8월에는 여러 가지 사건이 있어 노준택은 바빴다. 시카고 등지에서 다년 거류하던 한인성이 신병으로 이 세상길을 영영 하직하였으니 노준택이 장례식을 주관했을 것이다. 그달에 최 린과 이정섭 등 두 선생이 시카고를 방문하고 시카고 동포 80여 명이 모여 만찬회를 가졌다. 최 린은 영토, 인민, 주권의 삼대 요소 중 주권만 잃었을 뿐 우리나라가 망하지 않았다고 역설하며 희망을 주었다. 그날 이정섭은 우리 독립에 대한 준비와 신념과 내지 사회의 각 방면 운동과 사상 주의의 경향을 말했다.
오하이오 웨슬레이안대학에서 공부하던 심재홍이 하기 휴학에 시카고에 와 본 교회에서 기숙하였는데 그의 모토 사이클과 어떤 자동차와 충돌하여 그의 바른편 다리가 골절되어 치료하는 불상사가 있었다. 그리고 평양 숭실 전문학교에서 물리학 교사로 활동하던 데이빗 L. 솔토 선교사와 본교 음악 교사이자 그의 아내인 그레이스 Z. 솔토 선교사가 본 교회를 방문했다. 그는 ‘우리를 여기서 만나보게 된 것이 매우 반갑다’는 간단한 말씀을 하였고, 부인은 청아한 음성으로 한국어 찬송가 1장을 불렀다. 그들은 노스웨스턴대학에서 연구과에서 공부하고 친족을 방문차로 서북방으로 가는 길이었다.
9월에는 시카고 한인감리교회를 감리하는 솔츠 박사가 본 교회 이사부의 청함을 받아 동 교우들을 심방하고 함께 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에는 이사부원들과 함께 다과를 나누면서 교회 사업에 대한 여러 가지 중요한 문제로 1시간 동안 의논하고 떠났다. 그달에 시카고의 유학생 김 모가 쓴 아래의 “추기를 당하여 친구를 이별하는 감상”에서 당시의 유학생활과 본 교회에서 기숙했던 유학생의 삶을 통해 노준택의 목회를 엿볼 수 있다.
-세월은 참 유수와 같도다. 어언간 여름방학은 다 지나가고 추기 개학을 당하였도다. 여름날 뜨거운 일기는 어언간 서늘한 가을로 변하였도다. 이때를 당하여 번잡하고 불쾌한 사상은 바람 앞에 촛불처럼 쓰러지리라 하였더니 각처로부터 오셨던 학생 제군은 고국을 떠나 사랑하는 부모, 형제, 자매, 친척, 친구를 이별하고 태평양을 건너올 때 가지고 온 무한한 포부를 성취하려고 한번 다시 정다운 친교를 섭섭히 이별하고 각각 자기의 학교로 돌아가는 데 어떤 자는 외로이 아직 노동하느라고 장래의 계획을 취득하노라고 육신상 심리상 괴로움을 느끼어 자연히 발생하는 무한한 감상을 가까운 친척이 있으니 통정을 하여볼까, 친한 친구가 있으니 만장 설임을 하여볼까? 할 수 없다. 다만 마음을 억제하며 하늘을 우러러 장탄할 뿐이로다.
만사가 꿈과 같은가? 모든 일이 꿈과 같으면 참 좋으리로다. 꿈에 본 좋은 일은 평시에도 좋은 인상을 주고, 꿈에 본 불길한 일은 평시에는 잊어버리게 된다. 꿈에는 이상적 친구를 만나 서로 사정을 이해할 수 있되 평시에는 동정의 친우를 얻기 어렵도다. 꿈에는 찬성과 동정을 하기도 하며 받기도 할 수 있되 평시에는 시비, 시기, 비평이 자자하다.
꿈에는 믿고, 참된 마음과 참된 정성으로 공평적 사업을 도모하되 평시에는 의심하며, 거짓 하며, 피하며, 사특하며, 이기적인 행동이 다대하도다. 꿈에는 영원토록 동고동락할 수 있되 평시에는 주위와 환경을 쫓아 작일에 친우가 금일에는 냉냉한 심기에 뜨거운 열정이 서늘하게 된다. 꿈에는 무식한 듯하고도 이해하며 외면하면서도 은근히 동정을 표하되 평시에는 민첩한 듯하고도 오해하며 친한 듯하고도 사심(배암의 마음)을 두도다.
꿈에는 극락한 세상의 취미를 맛볼 수 있되 평시에는 고해 같은 이 세상에서 전투하기에 내력 할 뿐이로다. 꿈에는 희망과 성공의 문이 명백히 보이되 평시에는 장애됨과 낙망이 태산과 같이 앞길에 막히었도다. 꿈에는 사랑하는 부모, 동생, 친구를 반가이 만나보았더니 꿈을 깨어 본 즉 고적을 느끼는 자의 마음속에는 울울한 회포가 점점 더욱 증가하도다.
꿈은 꿈이오, 평시는 평시라. 이 세상을 지나는 동안 희로, 애락, 고통, 걱정, 근심, 큰 일, 적은 일, 모든 것을 당할 때 다만 부동심을 주창하는 것이 양책이 아닐까? 학생 제군이여, 우리가 무엇을 위하며 무엇을 하려고 이처럼 의양에 유리하는 서생이 되었는고. 우리의 뜻과 우리의 계책은 각각 다르다 할지라도 우리는 만경창파에 고주를 타고 공동한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항해하는 선원들이 아닌가. 우리 중에서 탁월한 자가 누구이며, 우둔한 자가 누구이뇨. 누구를 특히 존경하며 누구를 경멸하리오. 동일한 성격과 공통적 유전을 받은 단군의 자손들이 아닌가. 서로 손을 잡고 상조 상부 하며 서로 동정하고 서로 이해하며 서로 과실을 용서하며 서로 믿고 서로 힘을 다하여 물에도 같이 들어가며 불에도 같이 들어가는 것이 우리 동포의 정의와 의무가 아닌가. 우리의 앞길이 지극히 험하고 위태하도다. 우리는 백절불요하는 정신으로 의리를 품고 용감력을 발하여 주야로 노심초사하며 천신만고를 불구하고 앞으로 전진 전진하여 우리의 공동한 목적지를 달한 후 우리가 바라고 원하던 행복스러운 생활을 하여봅시다.
시카고 한인감리교회는 시카고대학 학생회와 노스웨스턴대학교 학생회가 연합하여 추수감사절 축하회를 준비하던 중 1927년 11월에도 두 학생회의 수고로 “오랫동안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하루를 즐겁게 지냈다.” 이날 운동회와 만찬회와 유희회가 있었다. 이날 만찬회는 교인이 경영하는 하워드 카페테리아에서 개최하였다. 일반 교우들이 한국의 빛으로 꾸며놓은 식장으로 들어오면서 정감 있고 힘 있는 악수를 나누었다. 정각이 되어 노준택 전도사의 사회로 장세운이 기도한 후 만찬회가 시작되었다. 모든 교인이 맛있는 만두국과 고소한 산적, 구미 돋는 김치 등 여러 가지 진찬을 나누었다.
1927년 12월 2일 김창준 목사에 이어 한승곤 목사가 시카고에 도착했고 그날 8시에 본 예배당에서 그들을 위한 환영회가 있었다. 이 환영회의 마지막 순서인 기도순서에 노준택 전도사가 경건하게 기도하였다. 한 목사의 부임 전까지 노준택 전도사가 목회하였으니 1년간이다. 김인준 목사가 그의 글에서 “그들이 ‘김창준 목사, 노준택 전도사, 한승곤 목사’ 없는 오늘에도 저들의 말을 하는 교우가 종종한 즉 참으로 부럽다”고 회고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노준택의 목회는 성공한 셈이다.
귀국
노준택은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졸업 논문만 남겨 놓은 채 건강이 좋지 않아 귀국길에 들어섰다. 1928년 11월에 김일선의 집에 모여 전별 만찬회를 가진 후 시카고를 떠나 나성을 거쳐 상항에 도착한 그는 상항 한인교회 황사선 목사와 국민회 총회장 백일규의 초대를 받은 후 최희송과 함께 귀국했다.
귀국한 노준택은 다시 병증이 발생하여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학업을 계속하여 노스웨스턴대학교를 1928년에 졸업했다. 그는 교육학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일요강화를 자주 하였는데 1929년 11월 3일 자의 중외일보 석간에는 그날 오후 7시에는 정동교회에서 ‘하나님 안에 있음’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다는 광고가 게재되어 있었다. 그의 이후의 삶은 알 길이 없다.
damien.sohn@gmail.com
09.07.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