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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김창준(1889-1959)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창준은 고종 26년이던 1889년 5월 3일에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반석면의 야소교 소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907년에 선교사 J. W. 무어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평양 숭실을 졸업한 이듬해부터 그는 전도사업에 나섰고, 그해 3월 남북 감리회가 주최한 춘계신학회 2학년 과정을 이수했으며, 1913년부터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광성학교 부교장을 역임했다. 

1914년에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본 동경 아오야마학원에서 1년간 공부한 후 평양 중앙교회와 박구리교회 등에서 전도사로 시무했다. 1917년 3월에 그는 오늘날의 감리교 신학대학의 전신인 서울 협성신학교에서 제5회로 졸업하면서, 변영서와 함께 현재 서울 중앙감리교회인 종로교회로 파송 받아 목회하였고, 이듬해 조선연회에서 서리 목사가 되었다.

중앙기독교청년회의 간사이고 평양 숭실학교 동창생이자 서울 종로교회의 동료 전도사였던 박희도의 권유로 30세의 김창준이 1919년 삼일운동 이틀 전인 2월 27일에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 사택에서 33인 중 가장 어린 나이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고, 독립선언서 배포에도 참여했다. 3월 1일에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에 참석한 그는 경성지방법원에서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1921년 12월에 가출옥하였다. 서울 종로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중 1922년 9월에 조선연회에서 그는 정회원 목사가 되었다.

 

시카고 한인교회 목사

 

김창준이 1924년 6월에 미국 감리교 동양 감독과 선교사들의 후원으로 미국 시카고 인근의 게렛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 7월 23일에 김 경, 김원용, 강영소 등 시카고 거주 지방 인사가 그를 위하여 환영회를 열었는데 이 일로 김창준을 중심으로 시카고 한인교회가 조직된다.

1919년 시카고에 한인 기도회가 시작됐다가 중단된 가운데 1923년에 시카고에 남쪽의 유학생 기도회와 북쪽의 한인 이민자 기도회 등 두 기도회가 있었다. 시카고 한인교회는 그해 10월 17일에 모인 북쪽 한인 이민자 기도회가 개최한 공동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회 설립을 결의한 이날 서백원, 강영소, 장세운, 강정근, 최흥원, 강혜순, 이명우, 김형린, 박리근, 박장순, 김승제, 김 경, 염광섭, 그리고 백인교회인 제3장로교회 부인회 등이 111달러를 헌금하여 교회 설립을 후원하였다. 이날 쓴 경비 11달러 83센트와 미봉조 15달러를 감하니 잔액이 84달러 17센트였다. 

1924년 7월 23일 김 경, 시카고 학생회 회장 염광섭, 강영소와 하와이 청년회 총무 이래성이 택풀 빌딩에 있는 교회 연합회 사무실의 미국인 선교 총회 회장이자 게렛 신학교 교장이었던 호겔트 박사를 면회하였다. 이날 호겔트 박사는 오는 주일부터 임시로 예배를 시작하되 예배당은 지정하여 알려줄 것이고, 선교부가 목사의 사례비를 책정하기로 하였다. 

1924년 7월 27일 오후 2시에 서부 청년회 강당에서 교회 설립 예식이 있었다. 일동이 224장을 부른 후 사회자 염광섭이 기도하고, 강영소가 교회 설립 취지를 알린 후 김여택이 주악을 하였고, 연보를 한 후 차의석의 성경 봉독에 이어 광성학교 교장 김득수가 말씀을 전하였다. 이후 오한영의 독창과 하와이 청년회 총무 이태성의 축사가 있고 난 뒤 교회 설립을 공포하였다. 이어서 일동이 140장 찬송을 불렀고 각 단체 대표자의 축사가 있었으며, 일동이 3장을 찬미한 후 모임을 마쳤다. 

예배 후 선거위원 8인을 공천하여 행정부와 이사부를 조직했다. 김창준을 목사로 선임하고, 전도목사에 조희염 목사, 전도사에 염광섭과 장세운, 회계에 박 필과 이병두, 종교부에 강혜순, 사교부에 김원용과 황창하, 음악부에 오한영과 박리근, 서무원에 차의석으로 행정부를 조직하였다. 이사부에는 부장에 김 경, 서기에 김원용, 재무에 양재형과 박장순이었으며 이사부원에 김 경, 김원용, 양재형, 박장순, 강영소, 차의석 그리고 황 휴였다. 

그 후 시카고 남쪽의 유학생 기도회가 북쪽의 이민자 기도회로 시작한 시카고 한인교회에 합병한 것으로 보인다.

교회 설립예배 다음 달인 8월 24일에 시카고 한인교회는 교회보 제1호를 발간하였는데 이날 야유회가 있었다. 에번스턴에 있는 미시간 호수에서 35명이 모였는데 부인이 4명이며 여학생이 2명이며 어린이가 4명이었다. 그런데 교회 이름으로 이같이 많이 모이기는 시카고 한인 역사의 처음이었다고 했다.

그해 12월 29일 하오 7시경에 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성탄 경축과 송구영신을 위한 연회가 있었다. 이날 내한 선교사였던 가필드 앤더슨 박사 내외, 뉴욕 YMCA 총무 E. H. 락우드, 시카고대학 청년회 위원 B. W. 딕슨 내외, 시카고 장로교 목사 브라운 박사 내외, 한인교회가 빌려보는 미국인 교회의 화잇 사모, 위의 미국인 교인으로 한인교회 반주자인 핫필드 여사와 솔리스트 채니 여사가 참석하였고, 근자에 유학온 노중택과 팍 대학생인 김마리아가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었다. 

1부에 만찬회가 있었다. 조희영 목사가 기도한 후 김창준 목사가 경축사를 하였다. 이후 브라운 박사가 설교했고, 핫필드 여사의 풍금에 맞추어 채니 여사가 성탄 창가를 불렀으며, 김 경이 화잇 박사의 축사를 대신 낭독했고, 화잇 사모가 설교했고, 딕손이 그의 부인의 풍금 소리에 맞춰 찬송을 불렀고, 락우드가 설교를 하였으며, 핫필드 여사가 풍금 독주를 하였고, 앤더슨 박사가 말씀을 전하였으며, 그리고 10여 명의 어린이와 본 교회 설립에 공헌한 미국인 친구 제씨에게 예물을 주었다. 

2부는 여흥회였다. 그날 9시 반부터 시작하여 11시경에 마쳤다. 이날 준비한 한국 음식은 평양 국수, 서울 장국밥, 경상도 대구 자반, 제주 용마탕, 진남포 이삿떡, 원산 명태 자반, 만경 만두국, 송도 송편, 금포 김치국과 5백년 이시조의 이밥 등이었다.

 

김유진

 

1925년 1월에 조국의 기근으로 3백여 명이 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달 18일 주일에 김창준은 마태복음 25장 31절부터 끝절까지 읽고 말씀을 전했고, 교인 황 휴가 작년에 한재와 수재로 수백만 명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알렸다. 이날 예배에 참석한 남녀노소 교인과 그 후 헌금한 총구제비 309달러 62센트와 헌금을 낸 한인과 중국인 그리고 백인의 이름과 금액을 소상히 소개하면서 그는 그달 12일에 “참 귀엽다! 어린아이”라는 글을 아래와 같이 ‘신한민보’에 기고했다.

 

“지나간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친 후에 우리 교회 이사부장 김 경 씨의 주최로 본국에 환란 당한 동포들을 위하여 우리가 뜨거운 동정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견을 말한 후 결국 당장에서 25명 교인의 뜨거운 눈물 속에서 106달러가 걷히었다. 한 아이가 있는데 이름은 김유진이다. 연세는 겨우 여섯 살이다. 이 아이가 자기 지갑 속에 있는 1달러 지폐를 가지고 강단 앞으로 나오면서 영어로 하는 말이 ‘나도 내 민족을 위하여 이 돈을 바칩니다’ 하였다. 이 여섯 살 먹은 아이의 말 한마디가 일반 청중의 마음을 더욱 뜨겁게 하였다. 얼마 후에 다시 자기 지갑을 가지고 강단 앞으로 나와 자기의 가졌던 동전 은전 전부를 다 내어놓으면서 하는 말이 ‘좀 더 있었다면 불쌍한 내 민족을 위하여 주겠는데 이밖에 없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필자는 중심에서 솟아나는 감격에 눈물이 마지아니하였다. 물론 이 아이는 아메리카 출생이요 그 모친께서 아메리카 부인이시니까 아직 본국(미국) 밖은 배울 길이 없고 다만 영어로 할 뿐이다... 이 아이가 아직 조국에 한번 가본 적도 없으나 조국을 사고하며 벌써 동포애란 것을 자각하였다. 아! 참 귀엽다! ... 동포들을 이처럼 사랑하여 자기 사탕 사서 먹을 돈을 다 열심히 내어놓았구나!! 동포여 이 아이의 자비심, 동포애가 얼마나 우리의 양심을 찌르는가!...”

 

1925년 10월 미국 북감리교 내지 선교부는 시카고 한인교회를 내지 선교로 결의했다. 본 교회는 시카고 인근 외국어사용 열 교회 중 하나가 되었다. 이로써 지원금으로 500달러를 마련했는데 정기보조금은 아니었다. 내지 선교 감리사인 탐슨 박사에게 한인교회의 치리를 일임했다. 이러한 관계는 2년간 계속되었다.

이듬해 새해 하오 6시에 시내 중국인 와싱톤 카페테리아에서 70여 명의 동포가 신년 축하회를 열었다. 이날 김창준은 ‘내 동포’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그의 설교 전의 순서는 아래와 같았다. 

애국가 합창, 양 득과 김 경의 개회사, 염광섭의 ‘각지에 당하는 송구영신,’ 박태화의 ‘세 가지 소개’ 독창, 황에스더의 ‘신년 신월 신일’이라는 설교, 박리근의 ‘기성 8경’ 독창, 차의석의 ‘소원 타령,’ 홍영태의 ‘뜰앞의 소나무’, 로준택과 장세운과 김병선과 김술근의 ‘우리 소리,’ 그리고 신년의 신법령이 있었다. 김창준의 설교 후 홍영태가 작별가를 부르고 이어서 여흥회가 있었다.

미국인 예배당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한인의 힘으로 예배당을 장만함이 떳떳한 일로 여겨 본 교회 이사부 김일선의 제안으로 1926년 9월 9일에 예배당 건축 기본금을 모으기로 하고 위원장에 김일선, 경리부장에 김 경, 감독에 차의석, 진행위원에 오천석과 이매세 등 5명에게 맡겼다.

 

귀국

 

1926년 6월 김창준은 게렛 신학교에서 2년간 21개 과목을 이수했고, 한인 목회를 12학점으로 인정하여 신학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그해 12월에 귀국하였다. 그의 선교 활동은 햇수로 3년이었으며 시카고에 거주하는 교인뿐만 아니라 방학을 이용하여 모여든 한인 유학생까지 섬겼다.

귀국한 김창준은 도미 전 목회했고 당시 대학생 교회로 이름난 서울 종로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가, 1933년부터 신학교가 폐교되던 1940년까지 6년간 감리교신학교의 전임교수로 가르쳤다. 이후 만주 장춘에서 제조공장을 운영하다가 조국이 해방되어 귀국한 그는 정치에 뛰어들었고, 6.25동란 후 월북하여 1959년 5월 7일에 뇌일혈로 향년 70세로 별세했다.

 

damien.sohn@gmail.com

 

08.03.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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