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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이기연 목사(1893-1966)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이기연 목사는 1893년 12월 4일에 황해도 황주군 청수면에서 태어났다. 송도 감리교 중학교를 졸업한 후 1919년에 일본 관서학원을 수료하고 1925년에 서울 연희 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연희학교 재학 때 연희 청년회의 심인곤과 이시융 등 2명과 함께 3인 전도대를 조직하여 1924년 7월에 몽정촌, 국자가, 팔도구, 삼도구, 동불사, 면도구, 천보산, 구세동 및 명동 등 북간도 일대에 가서 20 여일 순회전도를 하였다. 1925년 개성중앙회관 총무로 3년간 목회를 하였다.

도미

이기연 목사는 유학을 목적으로 1928년 4월 5일에 선박 프레지던트 제퍼슨을 타고 도미했다. 곧 산타피 열차를 타고 텍사스 주 달라스의 미국 남감리교 대학에 입학한다. 본 학교에서 3년간 공부하고 1931년 5월에 졸업했다.

딜라노 한인감리교회

졸업 후 딜라노 한인감리교회에 부임한다. 딜라노의 한인 거주는 한시대에 의한다. 그가 1920년대에 50만 달러의 250에이커의 농장을 마련하면서다. 이로써 딜라노 한인감리교회는 1929년 7월에 시작한다. 미국 남감리교 '한인 신령상 위원장'이었고 오클랜드 한인감리교회의 담임이었던 임정구 목사가 그 날 중가주 딜라노를 방문하고 기도처소를 시설하여 본 교회를 개척하였고, 리들리 한인감리교회 한석원 목사가 관할하게 된다. 딜라노는 리들리에서 남쪽으로 60마일 떨어져 있다. 다음 달인 8월 25일 오후 8시에 미국 남감리교 데비스 총리를 앞세워 마주흥 전도사와 함께 위의 한석원 목사가 딜라노를 방문했다. 이날 약 30명의 한인이 모여 교회를 조직하였다. 전도 주임은 한시대, 재무 유사(재정부장)는 김린수, 교육위원은 조울림과 김진규로 선정했고, 김청각의 딸이 유아세례를 받았다. 폐회한 후 아이스크림 파티가 있었다. 다음 달인 1929년 9월 17일에 버클리 웹윗 남감리교회당에서 미국인 샘 헤이 목사가 미국 남감리교 가주 동양인선교연회를 소집했다. 이날 리들리 교회 한석원 목사에게 중가주를 담당하는 구역 목사로 선정하고 딜라노 교회를 순행 목회하도록 결정한다. 그뿐만 아니라 주일학교 공과는 만국 주일학교 통일 공과를 사용하고 국어학교 교과서는 조선어 독본을 쓰기로 했으므로 딜라노 교회에도 적용된다. 이후 한석원 목사가 토요일과 주일을 이용하여 베이크스필드와 태프트와 딜라노를 잇는 중가주 순행 목회를 예정하고 딜라노에서 예배를 인도하였다. 1929년 10월과 11월 그리고 1930년 1월에도 계속되었다. 1930년 3월 16일에 리들리 한인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데비스 목사의 사회로 열린 미국 남감리교 중가주 구역의 제1계삭회는 딜라노 교회의 직원을 선정했다. 한시대와 김린수를 전도사로, 김순기를 탁사(건물관리부장)로, 이용선을 재정 유사(재정부장)로, 조울림과 김진규를 교육 위원으로, 한중상을 국어학교 기성회장으로, 김애나를 평신도 인도자와 연회 평신도 총대로 선출하였다. 1930년 9월 20일에 모인 미국 남감리교 가주동양인선교회 연환회는 리들리/딜라노/테프트를 잇는 중가주 구역 목사로 김 탁 목사를 선정했다. 이듬해인 1931년 7월의 미국 남감리교 한인 지방회는 한시대를 지방 전도사로 재 파송하였고, 예배당 완성을 위하여 경비 예산을 본 선교부에 제출하되 명년도 예산에 편입하도록 결의하였다. 이해 9월 5일의 연환회는 딜라노 교회를 나성 한인감리교회 황사용 목사의 감시 하에 둔다.

부임

이기연 목사는 임정구, 한석원, 김 탁 그리고 황사용 등 4명의 목사에 이어서 5대 목사로 딜라노 순회 목사로 부임하여 한시대 전도사와 동역한다. 그의 부임과 때를 맞추어 종전의 중가주 순회구역이 딜라노 순회구역으로 변경되었다. 1931년 9월 5일의 미국 남감리교 가주 동양인선교연회에서 이 목사의 부임이 거론되지 않았으므로 그 후가 된다. 딜라노 한국학교에서 여름 동안 가르치던 한석원 목사가 이기연이 졸업한 미국 남감리교 대학교로 유학차 떠난 그해 9월 중순 이후가 맞다. 딜라노 한인감리교회가 기도 처소였으므로 본 교회 교인은 미국인 제일감리교회에 교적을 두고, 모든 교회 활동은 이기연 목사의 주관 하에 한국어로 진행했다. 이기연 목사는 1931년 성탄 축하식을 예년과는 달리 4부로 나누고 각부의 사회자와 출연하는 연사와 악사는 두어 명을 제하고 다 피어오르는 꽃봉오리같이 아름다운 천진난만한 소년과 소녀였다. 1부는 ‘정식’으로 김계신 양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이 목사가 개회를 선언하였다. 애국가을 부른 후 한시대 전도사가 기도하고 사회자의 취지 설명이 있고 난 뒤 김계훈 군이 독경을 하였고, 김계신 양이 예수 탄생을 독창했다. 방은린양과 한유선양의 순서 후에 한영숙 여사와 한세라 양이 병창을 했고 이 목사가 축도하였다. 2부는 9세 이하의 영아부가 중심이 되었다. 한유희 양이 사회와 반주까지 담당했다. 영아 일동이 ‘예수 탄생’을 찬송하였고, 한성신 여사가 기도하였으며 조울림이 독경했다. 한유희의 독창이후 여학생이 ‘오늘이 무슨 날이냐’로 연설을 하였고, 한유선이 밴죠를 하였으며, 한유희가 ‘예수의 친구’라는 주제로 연설을 하였고, 이용선이 기도를 했다. 만주 동포 구제에 대한 의미 깊은 이야기가 있고 난 뒤에 총회장 백일규 선생에게서 온 “너희 영아들이 만주 동포 구제를 위하여 거두어 보낸 돈 1원 25전(1.25달러)을 반갑게 받았다”는 편지를 낭독했다. 이후 영아들이 먼저 만주 동포 구제를 위하여 헌금한 후 뒤를 따라 회중 일동이 헌금하였는데 총 51원(달러)이었다. 3부는 한유선의 사회로 ‘연설과 음악’이 중심이었다. 소년 음악대가 연주하고 김세신과 한유반이 ‘신라의 자랑’이라는 주제로 연설을 하였다. 한유범과 김계춘이 음악을 하였으며, 한유희와 한유선이 ‘고려의 자랑’이라는 주제로 연설을 하였다. 소년 음악대가 연주한 후 ‘동양의 자랑’이라는 주제로 한국 대표 한유희, 청국 대표 김재신, 인도 대표 한유범, 아라비아 대표 김세춘, 유대 대표 한유반이 연설을 하였고, 한유범이 인사의 말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4부는 한유선의 사회로 여흥회가 있었다. 이용선 부부의 한국 노래를 위시하여 흥미진진한 여흥이 있고 난 뒤 모든 순서를 마쳤다.

축사와 연설

1932년 2월 11일 하오에 딜라노 지방회가 국민회 제 23주년 창립 기념식을 거행했을 때 이기연이 축사를 하였다. 이날 딜라노 교회 국어학교 학생이 창가를 불렀고 음악도 연주하였다. 이날 이기연은 기념품을 위하여 1달러를 헌금했다. 국민회의 딜라노 지방회가 삼일절 기념식을 개최하였을 때 이기연이 연설했다. 지방회장이자 전도사인 한시대는 취지 설명을 하였고, 딜라노 교회 국어학교 학생들이 창가를 불렀다.

연환회

1932년 9월 2일에 상항 한인예배당에서 미국 남감리교회 동양선교회 연환대회가 있었다. 이날 이기연 목사는 유고로 불참했지만, 그의 보고에 따르면 딜라노 한인감리교회의 출석 교인은 37명이었다. 이날 주일학교 문제를 토론하였고, 상항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빌린 은행 돈을 갚기 위하여 한인 목사들의 봉급에서 지출한다고 데비스 목사가 보고했다. 이 기간 9월 4일 주일 예배에서 미국 감리교 총회의 클락 박사가 설교했다. 그는 물질이 아니라 정의, 명예가 아니라 사랑, 그리고 권세가 아니라 십자가를 찾음이 당시 한인들의 신앙적 현주소라고 강조했다.

동만 지방

이기연 목사는 1932년 9월 24일에 본국을 방문차 대요 마루 선편으로 귀국한다. 덕동교회, 북진교회, 철원제일교회를 거쳐 중국 동만 지방에 파송된 때가 1939년이니 3인 전도대로 전도한 지 15년이 되던 때다. 그는 이곳에서 1941년까지 2년간 한국인 동포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의 두 번째 선교사역이 된다. 귀국한 이기연 목사는 웅진교회, 웅진고등학교 교목, 갈멜전도교회, 구포교회, 마도중학교 교목을 거쳐 온양 온촌교회에서 1960년에 은퇴했다. 1966년 6월 1일에 향년 73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자녀 중에는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세호 장로가 있다. damien.soh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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