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황사용은 1881년 4월 27일 평안북도 의주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10세에 부모를 잃었고, 부모를 잃은 지 8년 후인 1899년에 기독교인이 된다. 1905년 2월 24세였던 그는 상항으로 유학을 왔다. 상항에서 그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공립협회에 가담하여 민족운동에 뛰어들었고, 1907년 나성 지방회 부회장이 되어 이곳에서 야학을 열고 교육활동을 펼쳤다. 이후 공립협회 대표가 되어 1909년 2월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함께 국민회를 출범시키는 데 공헌했다.
메리다 감리교회 멕시코 한인 이민자 1,033명은 1905년 4월에 멕시코 연안 서남부 살리나크루스 항에 도착했고, 계약 노동이 해지되던 1909년 4월까지 만 4년간 24개 에네켄 농장에서 하루 30단의 에네켄을 자르는 중노동을 했다. 고종황제의 특사였던 박희병에 의해 황사용은 1909년 4월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의 특파원이자 대한제국 대표로서 방화중과 함께 멕시코를 방문했다. 그런데 방화중이 열병으로 상항으로 귀환하자 그는 혼자 남아 314명이 모인 가운데 멕시코 지방회를 설립하고, 구제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곳 한인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며 전도하여 메리다교회를 조직하게 된다. 메리다 교회가 조직되기 1년 전인 1908년 7월에 김제선이 농장주에게 80페소를 지불하고 소유한 건물에서 주일마다 7, 80명의 한인 동포들이 각 농장에서 모여 서로 고생하는 이야기를 나누며 예배를 드렸다. 30평 크기의 이 건물에서 1908년 10월 5일에 전도회가 조직되고 성경공부와 예배를 드렸다. 황사용에 의해 국민회 메리다 지방회관을 건립하면서 이곳에서 메리다교회가 조직된다. 1910년 1월에 그가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으로 선출되면서 상항으로 돌아오기까지 그의 선교활동은 계속되었다. 이후 300여 명의 교인으로 성장하였으나 교역자가 없어 안타깝게도 교회 문을 닫고 말았다.
삭도 지방 순행전도사 1910년 1월 상항으로 온 황사용은 상항한인감리교회 엡워스 청년회 회장으로 선임된다. 그런데 워싱턴에서 모인 미국 남감리교 여선교회 총회는 태평양 연안의 한국인 선교를 위해 상항한인감리교회가 발행하던 ‘대도’의 회계로 일하고 있던 황사용을 삭도(세크라멘토) 지방 순행전도사로 택정하였다. 그는 1912년 4월부터 사역하였는데 북가주 전 지역을 통틀어 한인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발품으로 복음을 전하는 열심을 발휘했다. 1913년 8월에 황사용은 세 쌍의 삭도 교인의 합동결혼식을 상항한인감리교회 예배당에서 주례했다. 이듬해 연회보고서에는 오클랜드, 삭도, 스탁톤, 맨티카, 서니베일 지역이 그의 순회 사역지로 소개하였다. 오클랜드교회는 웹스터 스트릿의 7가와 8가 사이의 작은 그로서리 스토어를 운영하던 문헌칠의 집에서 시작하였고, 1915년에는 마운틴뷰교회가 소개된다. 1915년 당시 삭도교회에는 28명, 스탁톤교회에는 8명, 오클랜드교회에는 8명 그리고 마운틴뷰교회에는 6명이 주일예배에 출석했다. 1916년에는 맨티카와 매리스빌까지 그의 선교지역이 확장되었다. 그런데 마운틴뷰교회는 문을 닫았지만 매리빌과 맨티카에서 예배를 시작했다. 맨티카교회는 스탁톤교회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 삭도교회는 평균 35명이, 스탁톤교회와 맨티카교회가 모인 연합 예배에는 평균 16명이, 오클랜드교회에는 평균 8명이 그리고 매리빌교회에는 평균 7명이 출석했다.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 황사용은 1917년 텍사스 주 달라스에 있는 남감리교대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3년간 공부하고 1920년에 졸업하였다. 그해 4월에 황사용은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의 제 6대 담임목사로 부임한다. 함께 간 그의 누이동생 황혜수는 YWCA에서 활동하면서 주일학교 교장 등의 일을 맡아 그의 목회를 협력했다.
정치적 이념 갈등으로 감리교회에서 떠나간 형제들이 다시 돌아오면서 황사용이 부임하던 1920년에 본 교회 교인수는 70명이었다. 그런데 그가 사임하던 1922년에는 118명으로 상승했다. 이러한 상승의 폭은 주일학교 학생 수에서도 나타났으니 1920년에 75명이었는데 1922년에는 120명이었고, 주일학교 교사 수는 1920년에 7명이었는데 1922년에는 10명으로 3명이 늘었다. 그가 본 교회에 부임한 다음 해인 1921년에는 11명이 세례를 받았고, 그가 사임하던 1922년에는 4명에게 세례를 베풀어 그의 목회 중 총 15명에게 세례를 집례 했다. 황사용의 주요 사역 중 교회당 신축이 있다. 1921년 9월 포트 스트리트 1520번지의 대지를 구입한 후 대지 구입비와 건축비 등 총 2만5천 달러로 교회당을 건축하고 1922년 1월 10일에 헌당 예배를 드렸다. 신축건물은 본 교회의 여섯 번째의 예배당이었다.
상항 순회설교가 1923년에 황사용은 결혼하기 위하여 한국으로 나간다. 그의 후임으로 현 순 목사가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 담임목사를 이었다. 부인과 함께 돌아온 그는 와이알루아에 머물면서 와히아와의 올리브 스트리트 감리교회에서 사역하면서 가후꾸 등 지방교회도 돌보았다. 이후 상항으로 이주한 황사용은 자영업을 하면서 1930년까지 한인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북가주와 중가주 지역을 순회하면서 전도하고 설교하며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전도의 사명을 감당했다.
나성한인감리교회 나성한인감리교회의 초대 담임목사인 한승곤이 시카고로 떠난 후 1930년에 황사용이 부임하였다. 황사용은 1939년까지 9년간 본 교회에서 목회했다. 부임한 지 1년 후인 1931년에는 출석 교인수가 90명이었는데 그가 사임하던 1939년에는 125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런데 1939년 7월 가주 동양선교부 제 1회 연회록에 보고한 바로는 재적 인원 125명 가운데 평균 출석 인원이 75명이었고, 주일학교 학생 수는 52명이었다. 1939년 당시 본 교회는 국민회관 인근 웨스트 제퍼슨 불루바드 1016번지에 위치한 아프리칸 어메리컨의 제칠일안식일교회를 주 2불에 빌려 주일예배만 보았다. 한 달 중 3주는 한국어로 예배를 드렸고, 넷째 주는 2세를 위하여 영어로 예배를 인도했다. 저녁 예배나 청년회는 따로 모이지 않았으나, 매주 가정에서 12명에서 15명이 기도회로 모였다. 나성 개신교 연합회에서 후원하는 할리우드의 K.F.W.B 방송순서에도 출연하였던 것으로 보아 20여 명으로 조직된 성가대가 비교적 활발했음을 알게 된다. 황사용은 세탁소를 운영해야만 가정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교회 재정이 열악했다. 그런데도 1931년 이후 1939년까지 황사용은 나성뿐만 아니라 남가주 일대에 흩어져 있는 한인 노동자를 위하여 순회 목사로도 활동했다.
독립운동과 민족운동 위에서 언급한 대로 1909년 4월 황사용이 방화중과 함께 멕시코에 가서 메리다 지방회를 설립한 공로는 인정할 만하다. 이듬해 1월 그는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하와이를 방문하여 단합력을 키웠고, 1911년에 총회장직이 유임되면서 원동(러시아)으로 활동영역을 넓혔다. 1919년 그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특파원으로 하와이에 파견되어 상해 임시정부의 지지를 이끌었고, 하와이 국민대표 기성회 회장으로 재외 동포의 결속을 위해 노력했고, 일제하의 서울 정동예배당과 신의주 산정현교회 등에서 강연회를 통해 국민 계몽과 애국심의 고취에도 힘썼다. 이후 흥사단과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독립’의 발기인, 상항의 대표단 대표,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합국회 대표 등으로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에 헌신했다.
소천 해방이 되자 황사용은 고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에게서 두드러진 활동을 찾을 수 없다. 그는 1964년 3월 21일에 향년 83세로 소천하여 남양주에 안장되었다. damien.soh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