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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노신태(1884-1963)

손상웅 목사 (SEED선교회 연구실장)

노신태 전도사는 1884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2년에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한 후 1904년에 상항으로 이주하였다. 1907년 8월 솔트레이크에서 노동자로 있었고, 1909년에는 롬폭, 1915년에는 다뉴바, 1918년에는 메리스빌을 거쳐 1923년부터 삭도에서 체류한 것으로 보인다. 농장 동료의 소개로 사진으로 약혼하고 약혼한 지 10년이 되던 1923년 부산에서 노정순과 결혼하였다.

오클랜드 교회 노신태는 1926년 5월에 오클랜드에서 황재건에게서 인수한 이발소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그해 10월에 득남하는 등 경사가 겹쳤다. 이발소에 도적이 잠입하던 1929년의 1월부터 오클랜드 교회 담임목사 임정구의 지도하에 오클랜드교회 지방전도사로서 본 교회를 섬긴다. 1954년까지 지방전도사로 사역하였으니 25년간이다. 오클랜드에 다년 거주하던 곽수명이 황달병으로 1929년 7월에 별세하여 ‘그 미망인의 애통망극한 정형이야 지나가던 사람이 볼지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자’ 없었는데, 노신태가 의연을 하였으니 비록 헤이워드에 있는 천주교 예배당에서 장례식을 거행하였을 지라도 이 장례식에 참석했을 것이다. 이듬해 4월에 모인 남감리교 연환회에서 노신태는 가주 한인지방회에 관한 재정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 해 상항교회가 예배당을 신축할 때 그는 기쁘게 건축헌금을 드렸다. 노신태는 1932년 성탄절에는 기도 순서를 담당했고, 이듬해 2월 그의 딸이 사망하여 슬픔 가운데서도 삼일절 기념행사에서 기도순서를 맡았다. 1934년 10월에는 스탁톤 병원에 입원중인 김필권의 부인 김중상을 위문하였는데 이듬해 2월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임정구가 지방교회 순회차 출타하였을 경우 노신태가 설교를 하였다. 1935년 8월에는 주일 오후 2시 반 예배에서 ‘대벽왕의 성격’이라는 주제로 설교하여 일반교우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고, 다음 달에도 주일예배를 주장하여 재미스러운 예배를 보았다. 그해 10월 오랫동안 오클랜드에서 동고동락하였던 이희천이 귀국하게 되어 전별예배를 드린 후 노신태가 만찬을 배설하였다. 그 해 상항동포들도 다수 내참한 가운데 성탄절 제1부 마지막 기도를 그가 담당했다.

1936년에는 다른 해보다 노신태가 설교를 많이 맡았다. 1월 19일 주일 노신태의 주장으로 예배를 인도하였고, 특별히 일전에 나성에서 이주한 안영호와 그의 가족 및 기타 손님이 많이 참석하였다. 다음 달 9일에도 그의 주례로 설교까지 하였고, 3월 8일 주일에도 설교하여 일반 교우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으며, 5월 24일 주일에도 설교하여 ‘당일 다수 교인의 출석으로 많은 재미’를 보았다. 그 해 11월 추수감사절을 맞아 그는 독신자들을 모두 청하여 감사절의 특별연회를 성대하게 배설하고 향응하였다. 1940년 10월 경남 성경학교 건축비를 위한 오클랜드 한인교회 의연에 노신태도 참석했다. 노신태의 부인 노정순이 선원들을 위해 공중목욕탕 사업을 개업하던 1941년의 4월 감리사 라이온 목사의 사회 하에 모였던 계삭회에서 노신태는 집사부에 선정되었고, 그의 딸 노성애는 주일학교 부교장에 임명되었다. 그 해 5월 본 교회가 매년 1차 선교사업을 위하여 의연하는 전례대로 그도 헌금하였다. 노신태는 본 교회 대표로서도 자주 등단했다. 1941년 7월 연희전문학교 부교장을 역임하고 시카고 동양무역상회에서 시무하던 박용학 목사가 본 교회 목사로 취임하였을 때 환영회에서 노신태는 환영사를 담당했다. 그 해 추수감사절 예배에서는 다른 3명과 함께 그가 기도순서를 맡아 창립 20년 만에 단독 예배당을 마련하고 의자를 완비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다. 그 해 성탄예식에서 그의 자녀 노성애는 피아노 독주를 담당했고, 성탄창가 순서에서 그의 어린 자녀들이 부른 ‘그 어리신 예수’라는 창가 소리를 들은 교우들은 많은 기쁨을 얻었다. 1942년 노신태는 호텔 사업으로 바쁜 가운데서도 교회가 우선이었다. 박용학 목사가 미국 해군 육전대에 종군하자 1942년 김창수 목사가 본 교회로 피임되어 그 해 6월 취임식을 거행할 때 노신태가 사회를 보았다. 이듬 해 6월 미국 해군 육전대에 종군하였던 박용학 목사가 책임목사로 김창수 목사가 부목사로 취임하는 취임식에서 노신태는 교회를 대표하여 두 분 목사를 기쁘게 맞는다는 인사를 하였다. 1939년 임정구 목사가 소천한 후 오클랜드 교회 담임목사는 매해 달라진다. 1940년에는 장기형 목사, 1941년에는 박용학 목사, 1942년에는 김창수 목사, 1943년에는 박용학 목사, 1944년에는 김태묵 목사, 1945년에는 임두화 목사가 부임하는데, 노신태는 본 교회를 든든하게 지켜나갔다. 임두화 목사가 상항교회로 떠난 후 노신태가 담임전도사로서 1946년부터 김창수 목사가 다시 부임하던 1947년까지 1년간 본 교회를 섬긴다. 1946년과 1947년에는 21명의 교적 중 14명이 비활동 교인이었다. 그는 1954년까지 김창수 목사의 지도하에 지방전도사의 임명을 받고 있었다.

상항 교회 교역자와의 갈등이 생기면서 노신태는 상항교회로 옮긴다. 1960년대 그는 상항교회 정기적인 출석교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그의 부인 노정순과 함께 1962년 12월 교회 주차장 포장공사를 위해 2,400달러의 특별헌금을 하여 좀 더 원활한 주차 공간을 확보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교회는 예배당 벽에 그의 이름을 새긴 기념비를 마련하였다. 본 기념비는 중국 타운에 있는 옛 상항교회 건물에 그대로 있다.

독립운동과 동포사랑 지방전도사가 되기 전 노신태는 공립협회 상항지방회 회원, 롬폭 지방회 구제원, 적십자회 회원, 국민회 오클랜드지방회 재무 등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국민회 의무금, 군인연초연보, 독립의연금, 특별외교비 의연금, 인구세, 국민회 보조금 등을 기부하여 독립운동에 관여했다.

지방전도사가 된 1929년 이후에도 그의 독립운동은 계속된다. 국민회 오클랜드 지방회 재무, 총무 및 서기를 역임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고, 순국선현 추도식 연설. 국치기념식 개회사, 국민회 창립 29주년 기념식에서 ‘회원된 책임만 다하자’라는 주제의 연설, 이동녕 선생 추도식 기도, 오클랜드지방회 현기식 때 국치약사 낭독,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포고 1주년 기념식 때 1주년 기념사, 북가주 한인시국대회에서 ‘조국광복을 원조하는 대한인국민회’라는 연설 등에서 그의 조국 독립은 간절했다.

노신태의 기부행렬도 계속되었다. 지방전도사가 되기 전 그는 동맹단연금과 후원금, 국민회 의무금, 이충무공 유전보존 기금, 인구세, 삼일절 기념금. 중국 항일전쟁 동정금, 국민부담금, 임시정부 후원금, 광복군 후원금, 독립금, 군사운동금 등의 독립운동을 위한 기부를 아끼지 않았고, 한인국방공채를 구입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문천군 기근구제금, 서간도 기황휼금, 최석길 병비의연, 내지수제구제금, 기근구제금, 이인신 재판비용, 김홍균 및 이대위 목사 장비의연, 정신여학교 기부금 등을 기부하여 동포사랑을 꾀했다. 지방전도사가 된 후에도 계속되는 노신태의 동포사랑은 성탄 내지구휼금, 김계선 동정, 조선여자대학 및 동래실수학교 기부금, 일본 동경 한인과 고학생을 위한 헌옷과 기부금, 내지수재 및 한재 의연, 묵규동포 수제구제금, 권일중의 변호사비, 최운백, 곽수명 및 이계만의 장비의연, 나성한인양로원청연, 맛단사스, 쿠바 및 만주 재류 동포 구제금, 중경동포위문금 등에서 볼 수 있다.

소천

1963년에 노신태는 향년 79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상항교회는 상항교회장으로 그의 가는 길을 배웅했다. 이후 그의 부인 노정순은 오클랜드교회에 몸을 담았고, 1981년에 교회창립 67주년 예배 때 원로교인 표창을 받았다. 2014년 광복 69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정부는 노신태의 공적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damien.soh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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