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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김하태 목사(1916-2007)

손상웅 목사 (SEED선교회 연구실장)

김하태는 1916년 7월 8일 황해도 개성에서 아버지 김종필과 어머니 최덕순 사이에서 3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결혼 후에 기독교인이 되더니 목사가 되어 평양중앙감리교회, 진남포 감리교회, 개성북부교회에서 목회하였고, 그 후에는 한국 감리교회 감독을 역임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이었던 최영수의 딸이었다. 최영수는 개성상인으로 연안과 백천 등을 다니며 장사를 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짓는 전도인으로 활동했다. 김하태는 개성공립초등학교를 다니던 5학년 때 평양으로 이사하여 공립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북감리교 의료선교사 윌리암 제임스 홀 박사가 세운 광성중학교에서 공부한 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그는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목사의 길을 꿈꾸었다.

상항교회

연전을 졸업한 1938년에 김하태는 뉴저지 주의 드류신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공부한 후 본 신학교를 졸업하던 1941년에 뉴욕 주의 시라큐즈 대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공부하고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해 라이커밍 대학과 이스트만 음악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한 민덕순과 결혼하고 그 해 12월에 황사선 목사의 뒤를 이어 김하태는 상항교회에 부임하였고, 이듬해 6월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1942년 12월 6일 주일에 김하태는 사도행전 2:37-47을 본문으로 ‘생명 있는 교회’라는 제목의 첫 설교이자 부임설교를 하면서 전쟁이 한창이지만 참된 생명력을 잃지 않는 교회가 되자고 역설했다. 음악을 공부한 민덕순 사모의 영향인지 다음 주일에 찬양대가 조직되었고, 이듬 해 10월에는 찬양대 주최로 음악예배를 드림으로 찬양을 통한 목회를 열었다. 김하태는 교인뿐 아니라 상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포함한 약 150명이 그의 교구로 삼았다. 그래서 교회에 출석하지 않아도 심방을 하였다. 주일 예배 평균 참석인원은 50명 정도였다. 교인의 대부분은 백인 집이나 식당 등에서 막일을 하거나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등 생활 형편이 어려웠으나, 이발소, 미장원, 여인숙, 커피숍, 식당 세탁소를 경영할 경우 형편이 좀 나았다. 김하태는 오클랜드교회의 대리목사로 3개월간 노신태 전도사와 함께 목회했다. 박용학 목사가 1943년 오클랜드교회에 사임의사를 밝혔고 그 해 10월부터 박 목사를 이어 목회자를 찾고 있던 기간으로 보인다.

김하태는 교회를 기독교에 바탕을 둔 근대 민족주의를 훈련하는 공간으로 삼았다. 그는 1943년 1월 부인기독봉사회를 교회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기구로 세웠는가 하면, 1945년 6월에 회집한 동양인 임시연회 보고에 따르면 상항교회는 세계봉사회에 72.50달러를 보냈고, 십자군 봉사회에도 도움을 주려고 했으며, 언더우드 박사를 통해 385달러를 한국에 보냈고, 나성한인장로교회의 부채 청산을 위해 242달러를 보조했고, 중국과 한인 난민을 위하여 의류를 모아 보냈다. 그 해 7월에는 나성감리교회의 건축을 위해 김하태 외 교인들이 167.50달러를 헌금했다. 김하태는 1943년 8월 국어학교내에 영어반을 만들고 매 주 목요일 8시 반에 한인 1세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이는 그들이 미국사회에 적응할 뿐 아니라 미국 사회에 공헌하도록 하는 그의 목회를 엿볼 수 있다.

김하태는 그의 목회에서 미국 문화 속에서 자라난 한인 2세들과 한국 문화 속에서 성장한 1세가 어떻게 조화롭게 살 수 있을까도 염두에 두었다. 그래서 그는 1943년 1월부터 매주 화요일 저녁 7시부터 8시 반까지 90분간 국어학교를 열고,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잇는 민족 교육의 장으로 삼았다. 이듬해 8월부터는 금요일에 국어학교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43년 3월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의 딸인 엘리스 아펜젤러 박사가 요한복음 10:9-16을 본문으로 ‘조선의 풍부한 생황이 무엇이냐’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는데 다음 달부터 청년들을 중심으로 황성수의 인도로 ‘조선문학반’을 시작했다. 주일학교는 1943년 전반기에 10명 정도가 모이다가 그 해 12월 출석수가 저조하여 어린이 주일학교는 중단되었다. 그 대신 이듬해 1월부터 장년주일학교를 시작했다. 5명 정도가 매주일 아침 10시에 모였는데 첫 주일은 이동진 목사, 둘째 주일은 황성수 선생, 셋째 주일은 신사훈 목사 그리고 넷째 주일은 김하태 목사가 담당했다.

1944년 10월까지 상항교회의 청년 17명이 세계 제2차 대전에 참전했다. 청년 외에도 한국의 해방과 관련된 특별 임무를 위해 입대한 장년도 있었다. 이로써 상항교회는 전쟁과 관련된 목회를 한다. 같은 해 11월 국민회 상항지방회가 새 임원을 선정할 때 김하태는 선전위원에 선임되어 전쟁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했다. 1944년 성탄 헌금은 입대한 한인들을 위해 사용했고, 이듬해 2월에는 전후 한인 구제사업을 위해 특별헌금을 했다. 이어 3월에는 부인기독봉사회 주관으로 난민구제 만찬회를 열고 성금을 모았는데 이후 교인들은 매월 첫째 주일에 특별 헌금을 하기로 결의했으며, 1945년 10월 본 회는 국수를 팔아 그 이익금을 구호금으로 보낸 것을 필두로 전재민구호에 적극 참여했다. 전쟁 중 김하태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 국무성에서 근무하였다. 1946년 여름 해방된 조국에 나가 활동하기 위해 학문을 완성하고자 김하태는 사임하였다. 3년 6개월 동안 그의 첫 목회지 상항감리교회는 그의 ‘고향’이었다.

나성감리교회

김하태는 1946년 나성의 남가주대학교에 입학했다. 본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나성감리교회를 섬기는데 1946년부터 1949년까지 3년간이다. 그의 최대의 사역은 예배당 구입이었다. 교회 설립 후 42년간 17번이나 옮겨 다니던 본 교회가 1947년에 그동안 건축헌금으로 모은 8,750불과 2,600불의 융자금 등 총 11,350불로 오챠드 스트리트와 29가 모퉁이에 있던 스칸디나비아인 교회당을 구입하여 이전했다. 그 해에 융자를 청산하고 감격스러운 봉헌예배도 드렸다. 본 교회는 이 1947년을 ‘역사상 최대의 획기적인 해’로 부른다. 그가 사임하던 1949년의 등록교인 수는 180명이었고 주일학교 학생은 40명 그리고 여선교회 회원은 32명이었다.

상항교회

김하태는 남가주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후 버클리 가주주립대학에서 한국문화사를 가르치게 되면서 1949년 6월 상항교회에 재부임하였으니 그의 복음 선교 때문이었다. 그에게 일반 목회 외에도 도미하는 한인들이 대부분 상항에 도착하였음으로 이들을 자동차로 맞이하고 안내하는 사역이 중요한 목회였다. 1953년에는 12명의 군의관과 한국 정부 관리, 군인, 교수 그리고 유학생 등 총 178명을 기록했다. 1950년 625동란이 일어나면서 민족의 큰 시련가운데 그 해 10월 그는 이사야서 32:2을 본문으로 ‘위기와 인물’이라는 주제로 설교하면서 한국 민족에게 어느 때보다도 참된 지도자가 요청되고 있음을 외쳤다. 본 교회 부인기독봉사회는 전쟁가운데 고난 받고 있는 동포들을 위하여 매일 기도회를 가졌다. 김하태의 목회는 1953년까지 약 4년간이다. 1950년 상항교회 교인수는 60명, 1951년에는 62명, 1952년에는 77명 1953년에는 82명을 기록하여 매년 조금씩 증가했다.

태평양한인연합감리교회

김하태는 1953년 7월에 오하이오 주 노던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전임했고, 1956년에 내한하여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와 본 대학교 신과대학장을 역임했으며, 1964년부터 남가주 나성 인근 위티어 대학 종교철학 교수로 약 17년간 가르쳤고, 남가주 휘티어 대학을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은퇴한 1981년, 그가 재내한하여 목원대학 대학원장과 초대총장을 역임했다. 이와 같이 가르치는 사역을 이어가면서도 그는 복음 선교의 열정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는 1961년에 미국 중가주 후레스노 근방 추칠라감리교회에 부임하여 3년간 섬겼고, 1964년 조용삼등과 함께 나성에 남가주한인회를 창립하고 한인회장을 맡아 하나님의 문화 명령에 충실했고, 63세 때인 1979년에는 나성 인근 사우스 파사디나에 태평양한인연합감리교회를 창립했는데 본 교회는 현재까지 건재하다. 2007년 3월 16일 그는 향년 90세에 남가주 라하브라 자택에서 별세하여 로즈힐스 공원묘지에 안장되기까지 그는 복음 선교에 삶을 걸었다. damien.soh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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