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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임두화(1886-1948)

손상웅 목사 (SEED선교회 연구실장)

임두화는 1886년 10월 25일에 평남 대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5세가 되던 1901년에 세례를 받았고, 4년 후 유학의 꿈을 품고 단신으로 시베리아 호에 의지하여 하와이에 도착했다. 그는 1908년 방화중 등과 함께 남가주 클레어몬트에서 학생양성소를 발기하고 이곳에 머물면서 1910년 소학교를 졸업하였다. 소학교를 졸업한 그 해에 미국 남감리교 계열의 대학 준비학교인 조지아 주 월리스카의 린하트 대학에 입학하여 본 대학을 졸업하던 1914년에 그는 조지아 주 에모리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여 1917년에 본 대학을 졸업하고, 이어 본 신학교에 입학하여 ‘한국기독교의 시작’이라는 논문을 제출하고 1920년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 그는 YMCA 운동에 몰두하면서 해외선교에 관심을 가졌고 졸업 후 귀국하여 한국 민족을 향한 기독교 선교 사역을 계획하고 있었고, 미주 한인 동포의 기독교 선교에 투신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그는 에모리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재학 중 전도사가 되어 기회가 되는대로 각 처를 다니며 한국의 정형을 소개했다.

귀국

임두화는 그의 계획에 따라 1921년에 귀국하여 교회와 기독교학교를 섬기게 된다. 1921년 그는 개성의 중앙교회 전도사로 재직하면서 윤치호가 설립한 송도고등보통학교의 교사를 역임했다. 이듬해 그는 집사 목사안수를 받았고, 장로목사 안수를 받던 1924년의 10월 24일에 이화여전을 졸업한 김브랜치와 결혼했다. 1925년 그는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서울의 종교교회 담임을 겸했고, 1926년에 송도고등보통학교로 재부임하여 부교장과 교장을 역임했다.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

임두화는 1930년 5월 텍사스 주 달라스에서 4년마다 열리는 미국남감리교회 총회 참석 후 중가주 딜라노교회에서 ‘교회’라는 주제로 전도한 후 한국에서 동행한 협성신학교 교수 김인영 목사와 함께 교인들을 심방하였고, 테프트와 리들리 등 중가주 교회를 방문하고 재미동포를 만나 복음을 전했다. 이 때 그는 재미 한인동포에 대한 기독교 선교를 가슴에 품는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한다. 귀국한 그는 1931년 이후 진남포 지방감리사로 활동하였는데, 1933년 변홍규 박사를 이어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이는 그가 에모리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계획하였던 미주 한인 동포의 기독교 선교의 일환이었다.

그 해 감리사 프라이 박사의 말대로 그는 인간성을 잘 이해하는 높은 수준의 크리스천 신사였고 훌륭한 유머감각을 가진 분으로 본 교회는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그는 새해 첫 주일마다 모든 가족이 총동원하여 함께 예배하도록 새해인사와 함께 초대장을 각 가정에 발송했다. 예배 진행 일체를 우리말로 하되 미국에서 태어난 젊은이들을 위해 설교만은 영어로 요약하는가 하면 사도신경이나 교독문까지도 영어로 인도했다.

1939년 본 교회의 총 수입은 1,250.3달러이었고 총지출은 1,233.69달러이었는데도 이듬 해 교인수가 300명을 넘게 되어 교회신축위원회를 조직하고 총 건축비를 4만불로 책정하고 3만불은 감리사와 감리교 선교부가 맡도록 하고 나머지 1만불은 본 교회가 헌금하기로 했다. 그래서 40명 회원의 부인보조회가 건축기금모금을 위한 만찬회를 개최하였다. 대동한글학교 교장은 임두화였다. 1938년에는 2명의 교사가 6세에서 14세 사이의 52명의 학생을 1학년부터 5학년까지로 나누어 초등학교 수준의 한글을 가르쳤다. 학기가 마치면 방학식이 있었는데 1938년 방학식 순서에는 조선 국가, 대강놀이, 언문의 제정, 대산놀이, 격언암송, 공자역사 등 한국문화를 상징하는 부분을 포함했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하와이는 계엄령 하에 놓여 재산동결과 행동제한을 받았으나 한족연합위원회의 활동으로 적국 일본인 대우로부터 해제되고 연합국 국민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이 기간 임두화는 ‘10인 하와이한인실행위원회’의 위원이 되어 한인사회의 문제점이나 요구점을 군정 본부에 알리는 활동을 하였다. 1942년 11월 임두화는 심장마비로 퀸즈 병원에서 입원했다. 이런 가운데 그의 요청으로 헨리 G. 아펜젤러의 장녀인 앨리스 R. 아펜젤러가 1943년 7월부터 본 교회 주일학교 책임자로 부임했다. 어린이 주일학교 학생수가 15명에서 연말에는 65명으로 늘어났는가 하면, 임두화 대신 자주 영어와 한국어로 설교하였고, 그간 중단했던 찬양대를 다시 시작했으며, 감리교 청년친목회를 조직하여 회원은 25명에 이르렀다. 태평양 전쟁으로 1944년 2월말까지 입대한 교인은 56명이나 되었다. 임두화는 다음달 11일과 1년 후 3월 11일에도 출정 군인을 위한 특별예배를 하나님께 드렸다. 이들 중 이조지 중위가 유럽 전선에서 전사하는 비보를 받고 온 교회는 슬픔에 잠겼다. 1945년 6월 24일 주일예배에서 임두화는 “안녕히 계십시오”라는 작별 설교를 하였다. 그의 충성된 목회를 통해 교회 등록교인 수는 225명에서 391명으로 성장했다.

오클랜드 교회

1945년 7월 임두화는 오클랜드 한인교회로 부임하였다. 그 해 가을 그는 두 번 선교에 관한 설교를 했다. 3개월 후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였던 아들 임병철이 보낸 편지가 노신태를 통해 신한민보에 소개되어 일본의 패전과 서울의 해방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1945-1946년 재정보고에 따르면 본 교회는 ‘그리스도 십자군’에 200달러,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를 위하여 9.25달러, 구제금으로 15달러, 적십자회에 15달러를 기증하는 등 사회적 의무를 감당하려고 노력했다. 임두화는 순회선교목사로도 사역하였는데 남가주의 알함브라와 북가주의 세크라멘토와 나파와 버링햄 등의 한인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 이듬 해 1월에는 미국 연합감리교 산하 웨스트 위스콘신 연회의 한인 그룹에서 27일간 44번 설교했고, 3월에는 2주일을 남가주의 한인사회를 찾아 10번의 설교를 했다. 뿐만 아니라 백인교회를 방문하여 ‘조선과 기독교회’라는 강연을 통해 한국뿐만 아니라 한인이민교회를 소개했다.

상항교회

김하태 목사의 뒤를 이어 1946년 2월에 임두화는 상항 교회에 부임한다. 그는 1948년 8월 28일에 별세할 때까지 약 2년 반 동안 상항교회를 섬겼다. 1946년 4월 본 교회는 국민회 상항지방회와 연합으로 전쟁에서 돌아온 본 교회 참전용사 환영회가 있었다. 27명의 한인 군인들과 그들의 가족 등 총 100여명이 참석했다. 그 해 부활주일에는 5명의 어린이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었고, 5월 5일 주일에는 성찬식을 가졌다. 당시 주일예배에는 약 45명의 성도들이 참석했다. 1947년 6월부터 12월까지 한국에서 온 89명과 가주 타 지역에서 온 49명의 한인 등 총 약 140명을 맞았다. 이들은 주일예배에 참석하였고, 사택에서 식사를 나누었는데, 임두화는 특별히 조국에서 온 이들을 섬기는 기회를 좋아했다. 1947년 겨울 황에바를 교사로 임명하여 8명의 학생으로 주일학교를 다시 조직하였고, 이듬 해 5월에는 MYF를 조직하고 회장에 임두화의 아들 임병철이 수고했다.

소천

임두화는 1948년에 순회선교목사로서 시애틀과 몬타나와 디트로이트 그리고 포틀랜드를 여행하며 장차 한인교회를 개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조사했고, 목사관 건축을 추진하여 미국감리교회로부터 7,500달러의 지원 약속을 받아 설계도까지 완성하였다. 그런데 그는 대한민국 독립 후 2주년이 되던 1948년 8월 28일 향년 62세에 심장마비로 하나님의 부름에 응할 수밖에 없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damien.soh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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