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웅 목사 (SEED선교회 연구실장)
이경의(K.E. Lee)는 1870년경에 강원도 강릉군 군내면 견석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영어이름이 Kyeng Eui Ye가 맞는다면 그는 1904년 10월 6일에 ‘촤이나’ 선박을 이용하여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당시 그는 33세의 홀아비였다. 상항을 거쳐 나성을 지나 그는 캘리포니아 주 레드랜즈에 도착한다.
북미자지한인야소교회
북미자지한인야소교회는 미국 감리교가 1906년에 캘리포니아 주 레드랜즈에 설립한 한인 감리교 예배처소였다. 사진에는 ‘Korean M. E. Mission’이라는 간판이 걸렸고, 오른쪽 기둥에 ‘북미자지 한인야소교회’(北美紫地韓人耶蘇敎會)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다. 자지란 레드랜즈를 붉은 땅이라고 번역한 한자이고, 야소는 예수의 한자어다. 이곳에 미국 북감리교가 파송한 전 내한 의료 선교사 윌리암 B. 맥길 박사가 거주하고 있었다. 맥길 박사는 그의 부인과 함께 1889년 8월 27일에 내한하여 서울과 원산 및 공주 등에서 10여 년간 환자를 치료하였고 복음도 전했다. 귀국하여 레드랜즈에 안착한 그는 미국인 제일연합감리교회 여성내지선교회와 더불어 조선 민족에 대한 오늘날의 다민족 선교에 힘썼던 것이다. 이경의는 백인교회인 레드랜즈 제일감리교회에서 학습을 받았고, 그의 영어 이름이 David Ye라면 1907년 12월 8일에 본 교회 F.M. 라르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곧바로 이경의는 북미자지 한인야소교회의 최초 한인목사로 사역한다. 그의 목회는 후임 전효택에게 전임하던 1908년 12월경까지 맥길 박사와 더불어 다년간 계속되었다. 1906년부터 1910년까지 21명의 한인교인이 있었다. 이중 1906년 12월 23일에 세례 받은 한인은 장지춘, 모기준, 차평찬, 황창일, 박창호, 김지우, 조성일, 임지성, 안석중과 차 우 등이었다. 이들 중 장지춘은 1907년 12월 9일에 떠나고, 모기준은 한국으로 이명 되고, 황창일은 상항으로 이명가고, 박창호와 김지우는 모 년 12월 9일에 떠나고, 조성일은 세크라멘토로 떠나고, 안석중은 엎랜드로 이명 간다. 이경의의 중점 사역은 교회 영구유지에 있었다. 백인교회로부터 조금도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열심히 연조하여 각색 경비를 담당할 뿐 아니라 교회 영구유지 목적으로 특별헌금을 하였다. 이경의는 매년 5달러를 헌금했다. 1909년 1월에 헌금한 사람은 총 25명이었고, 총 헌금액은 108불에 이르렀다. 1905년 12월 공립협회가 레드랜즈에도 16명이 발기하여 그 지부가 조직되었다. 그도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동족상애, 환란상부,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노동과 공부가 강조되는데서 1906년 11월에는 야학이 설치되고 영어를 가르쳤다. 십여 명이 모여 안석중의 집에서 모였고 전 주한 선교사였던 미국의사 맥길과 한인 김응규가 영어를 가르쳤는데 이들 두 선생은 1909년까지 계속 가르치고 있다. 유학생 조병진이 학비가 없어 곤고 막심한 것을 보고 특별히 돈을 모아 그의 학업을 도왔는데 이경의도 2달러를 기부했다. 그는 1907년 공립협회 레드랜즈 지방 회장 대리를 맡았고, 이듬해 레드랜즈 공립신보 발매소의 사무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모에파와 트리몬톤
이경의는 1908년 11월 경 농사를 경영하면서 전도하는 오늘날의 이른바 ‘뱀’(BAM; Busines As Mission)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듬해 1월 일단 나성으로 이주하여 인근 옥스나드에 토지를 구하려고 노력하다가 그는 네바다 주 모에파에 농장을 설치하게 된다. 그는 1909년 2월 백인학교를 빌려 매 주일 한인 동포를 모아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복음을 전도하였다. 이경의의 민족사랑은 솔트레익 시티까지 확장했다. 1909년 4월 10일 이광윤과 함께 국민회가 개최한 토론회에 참석하여 특별한 강연으로 청중을 움직였다. 그 해 5월 국민회가 러시아 브라디보스톡에 국민회 지부를 설치하는 일로 이 강과 이교담을 파송할 때 이경의는 10달러를 기부했고, 그 해 10월 신병으로 고생하는 박순기가 약값이 없던 중인데 그도 2달러 50센트를 후원했다. 1909년 이경의는 유타 주 트리몬톤으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그는 감자농사를 크게 하면서, 주택을 신축하였고, 말 4필을 세워 명년 농사를 크게 할 모양이었다. 1913년 그는 무 농사로 많은 이득을 보았는데 윤순삼의 경우는 순 이익만 1천불이었다. 이경의가 이 지역과 갈랜드에 흩어져 무 농사를 하던 이용신 등 7명에게 전도의 손길을 펼쳤을 것이다. 이경의의 메시지가 궁금하면 대도 1910년 3월호에 기고한 글 “구주를 찾음”을 읽어봄직하다.
“서국에 한 유명한 관원이 있으니, 저는 예수를 진실히 믿는 사람이요, 재산이 유여하여, 누각을 극히 화려히 짓고, 고원과 화초동산으로 좇아오는 향기를 머금고 사는데, 또한 아들이 있으니 총명이 과인할뿐더러, 하나님을 숭배함으로 경련애인의 품성을 겸전한 자라. 하루는 객이 오니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인고로 주인과 수작할 때에 매양 설만한 언사가 많은지라. 주인이 가로되 그대의 말이 심히 무례하니 하나님이 노하실가 두렵지 아니 하뇨? 객이 가라대 내가 본래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고 또한 그 소리를 듣지 못한데 하늘을 두려워 하리요 하거늘, 주인이 그 말을 듣고 심히 통탄이 여겼으나 변론치 아니하고, 다만 심중에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면 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계신 줄 깨닫게 하리요 하더니, 수일 후에 객이 다시 심방한지라. 주인이 겸손한 낯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영접하여 객실 노인도 한즉 앉아 서로 담화할 새 객이 문득 눈을 들어 방 안에 완화지물과 벽상에 걸린 그림족자를 보고 화공의 비상히 고명한 상상과 완화물을 만단공장의 기묘한 재주를 탄복하고 화공의 이름과 공장의 이름을 뭇거늘 주인이 가로되 이는 다 나의 아들이 만든 것이라 하매 객이 더욱 놀라 주인의 아들을 칭찬하더라. 이윽고 주인이 객을 데리고 화원으로 인도하니 그 화원은 극히 정밀히 꾸민 곳이요 향기로는 꽃이 가득한 곳이요 화원가운대로 길을 정교히 만들었는데 십자모양으로도 만들었고 혹 정자로도 만들었는데 보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지라. 객이 가로되 이 화원을 만든 공장은 세상에 드문 재주를 포한 자라 하거늘 주인이 가로대 이도 또한 나의 아들이 만든 것이라 하니 객이 그 주인의 아들의 과인한 재주를 탄복하는지라. 주인이 그 객을 다른 곳으로 인도하니 정정한 수양수에 태광도 하고 도가 탈속한 집이 있는데 폭원이 광활한 국기를 반공에 달렸는지라. 주인이 객을 향하여 가로되 이 집은 내 아들이 지은 학당이라. 부모 없고 불쌍한 아이들과 가난한 집 자녀를 가르치는 곳 이라하니, 객이 왈 그대는 이와 같은 아들을 두었으니 참 복이 있는 사람이라 하거늘, 주인이 가로되 그대가 이왕 내 아들을 상면한 데가 없거늘 어찌 칭찬하며 아름다운 줄 아느냐 하는데, 객이 왈 내가 일작 그대 아들을 보지 못하였으나 그 지은 바를 보고 아노라하니, 주인이 그 객의 손을 잡고 가로되 사랑하는 친구여 그대 말씀이 과연 옳도다. 그런 즉 이로 비교하여 보건데 그대가 내 아들을 보지 못하고 그 만든 것보고 아름다운 줄 알았으니 이로써 우리가 보는 바 일월성신과 산천초목과 금수곤충 생긴 것을 참 신 하나님께서 지으신바 아니요? 천지간에 주재되신 하나님이 없겠는가 한데 객이 이에 대각하여 주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공경하여 전에 못 하던바 동포를 사랑하고 애국성심으로 국민에 직분을 하였다하오니 장하도다. 이상 말씀한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던 저 객이 참 이치를 깨달아 자기직분을 다한 것 우리 형제도 어서 깨달아 하나님의 대도로 이 세상에 있을 동안의 국민의 직분을 하여 비참한 경우를 벗어나서 자유 복락을 부르면서 가옥과 누각을 정결케 하고 전국에 학당을 건축하여 조실부모 상한 아이들과 가난한 집 자녀들을 가르쳐 사회에 문명을 진보케 하는 것이 주를 믿는 우리의 당당한 의무가 아닌가!”
1916년 이경의는 40에이커 땅에 무이사탕 농사를 시도했다. 그런데 일기가 갑자기 추워 절반만 수확하기에 이르렀다. 이경의 외에 박지섬과 이병권이 17에이커, 홍재성이 12에이커, 황세영이 21에이커, 김응규가 7에이커로 총 97에이커에 손해금이 6천불에 달했다. 이경의는 자신의 어려움은 뒤로 하고 이들을 심방하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이곳에서도 이경의의 민족 사랑을 볼 수 있다. 그는 1911년에는 국민의무금을 납부했고, 1914년에는 유타 주 갈랜드의 국민의무금 수봉위원으로 위촉되기까지 한다.
그런데 1918년 1월 이경의는 천식으로 나성 인근 샌베르난디노 공립병원에 입원했다. 신한민보는 그가 미주에 이주한 후 사회와 교회에 대하여 쌍방으로 헌신하여 동포의 일이라면 공사를 막론하고 도움을 주었는데 이제 도움을 받을 처지에 있음으로 동포와 신도들은 돕자고 호소했다. 다음 달 허중원 등 11명이 ‘이경의 병비의연’을 발기하여 기부금 마련을 시작하여 총 100불 이상이 모금되었는데 신한민보는 ‘일반의 동정이 따뜻한 것을 느낀다더라’고 보도했다. 1년간 병상에 있던 이경의는 1918년 10월 15일 상오 9시 30분에 향년 48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샌버나디노 공립병원에서 별세했다. 이병억은 이튿날 인근 마운틴 뷰우 공원묘지에 그를 안장했고, 국민회는 그의 장례비 98불 47센트를 제공했다. 그런데 본 공원묘지 직원 칼로스는 묘비가 없이 묻힌 그의 묘지 사진을 찍어 친히 필자에게 보내면서 죄송하다는 말을 남겼다. damien.soh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