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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신흥우(1882-1959)

손상웅 목사 (SEED선교회 연구실장)

신흥우는 1882년 충북 청원에서 출생했다. 한학을 배우던 중 그는 개화사상에 눈을 뜨고 1894년에 아펜젤러 선교사의 배재학당에 입학한다. 그는 서재필 등과 협성회를 조직해 정치토론을 벌이며 근대화운동에 참여하였다. 1899년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 그는 1901년 한성외국어학교 독일어과에 입학한다. 그때 정치개혁을 주장하다 투옥되었는데 이곳에서 이승만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이 무렵 해리 C. 셔먼 박사 등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신흥우는 1903년 초 출옥한다. 그는 셔먼 선교사의 모교인 남가주 의과대학교를 소개받고 유학을 꿈꾸었다.

셔먼 여자선교사

1898년 2월 프로렌스 셔먼 선교사는 미국 북감리교 의료선교사 해리 C. 셔먼 박사와 함께 내한했다. 셔먼 박사는 광혜원에서 의료 사역을 담당하면서도 제물포, 원산, 평양, 수원, 공주 등지에 순회 진료 사역을 감행하다 과로로 병을 얻어 1900년 도미하였으나 그 해 7월 25일에 향년 31세의 나이로 나성에서 소천하였다. 이후 셔먼 선교사는 두 자녀를 기르며 나성 거주 한인 선교에 투신하여 자신이 출석하는 나성제일감리교회는 한인 선교를 앞장섰다. 그녀는 1903년 4월에는 나성 인근 포모나제일감리교회의 ‘젊은부인 해외선교부’에서 한인 사역을 보고하는 등 한인 선교를 위하여 백인교회로부터 기도 후원과 재정적 후원을 도모했다.

도미

신흥우는 25세가 되던 1903년 도미하여 미국 캘리포니아 주 나성에 도착했다. 이듬해 그는 셔먼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남가주대학교 별과 학생으로 2년 과정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영어 이름은 Hugh Heungwo Cynn으로 썼다.

힐 스트리트 사역

미국남감리교 남가주 연회는 셔먼 선교사를 한인 선교 책임자로 임명하고 그녀의 지도하에 신흥우를 평신도 목사로 임명한다. 1904년 3월에 ‘사우스힐 스트리트 1519번지’의 건물을 임대하고 한인기숙사와 한인 예배처소를 마련한 후 나성 거주 한인들에게 기독교 가정을 만들고, 한인 이주자에게 직장을 알선하며, 한인 유학생들의 학업을 돕는다는 등의 목적을 세웠다. 한인들은 주일 아침에는 나성제일감리교회 영어 예배에 참석하고 곧 이어 셔먼 선교사가 인도하는 주일학교에 참석했다. 주일 오후 한인 예배처소에서 한국어 주일예배가 있었는데 신흥우 외에도 유학생인 김우제도 설교를 담당했고, 셔먼 선교사가 설교할 경우 신흥우가 통역을 맡았다. 주일예배 외 토요일 에프워스 청년회와 금요일 성경공부반을 운영하며 전도하였다. 이곳에서 예수를 믿고 한국에 있는 가족을 전도한 자들도 있었다. 교인들은 거의 유학생이었는데 미국인 나성제일감리교회에 등록하였다. 본 예배처소는 북미에서 최초로 세워진 한인교회가 된다. 본 교회는 2017년 현재 나성한인연합감리교회가 되어 있다. 그리고 매일학교를 개설하여 셔먼 선교사가 교장이 되고 한국인 유학생들이 교사가 되어 한인들을 가르쳤다. 이 매일학교는 여름 방학 때 정규 학교 제도를 가동하여 남가주 대학교, 학원 Academies, 초등학교 등에 다니는 유학생이 공부할 경우 한 두 학년을 월반할 수 있었다. 본 매일학교가 학교 내에 ‘고용부’를 두어 학교 재정을 자체적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한 것은 한국 교회의 삼자 운동을 연상케 한다. 기숙사에서 거주하는 한인 유학생들은 노동하면서 생활비를 조달했고, 기숙사비도 납부했다. 기숙사생은 한인 이민자가 나성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음식을 구입하여 자취를 하였다. 1904년 12월에 이승만과 장홍범 등도 이 기숙사에서 잠깐 거주했다. 신흥우는 셔먼 선교사 가정과 함께 임대한 건물에 거주하면서 위급할 때 신속하게 한인들을 섬길 수 있도록 대기했다. 1906년 3월 28일 자의 공립신보에 따르면 북미주에 거주하는 한인 500여 명 가운데 장로교인이 세례교인 59명과 원입교인 53명으로 총 112명이었고 감리교 교인은 총 80여명이었다. 이 80여명이 신흥우의 목회 영역에 포함되었다고 보면 된다. 나성 예배처소에는 교인이 많지는 않았지만 범사에 ‘재미있게’ 지냈다는 신문기사가 있다. 그런데 신흥우가 1906년 1월 평신도 목사직을 사임하고 김우제가 그 뒤를 잇는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신흥우가 계속 교회를 섬겼던 것으로 보인다. 1907년 남가주 연회는 한인 예배처소가 부흥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1908년 한국 정치 상황이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가운데 나라 걱정에 귀국하는 유학생도 있었지만 신념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는 유학생도 있었다. 이 해 8월 신흥우가 남가주대학교 3학년에, 신봉희가 남가주대학교 예비과 3학년에, 남궁염이 본 예비과 2학년에, 방화중과 이순기가 중학교 2학년에 그리고 전시중이 1학년에 재학했다. 미약하지만 예배처소가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음에 자부심이 컸고, 본 한인 사역이 한인 선교사 훈련학교와 방불하여 이들 한인들이 한국과 미주의 한인들에게 끼칠 큰 영향력을 기대할 수 있었다. 나성 한인 사역은 ‘일본 사역’ 하에 있었으나 ‘나성 도시선교회’의 별도 사역으로 구별되었다. 1908년에는 '나성 도시선교회' 외에 남가주대학교 이사였던 A. W. 애드킨슨 박사와 남가주 연회 감독이 특별히 협력하였다. 1908년 현재 재적수는 신흥우를 포함하여 16명이었다. 한 달 건물 대여비가 18불이었고, 셔먼 선교사의 한 달 봉급이 25불이었던 반면에 신흥우의 한 달 봉급은 20불이었다. 이로써 한인 사역에 필요했던 예산은 한 달에 60불이었고, 1년에 756불에 이르렀다. 미국 남감리교의 ‘내지선교부’와 ‘교회연장부’ 등 두 기관이 285불을 헌금했고, 그 외는 ‘나성 도시선교회’가 후원했다. 그리고 기숙사비는 교회 운영비로 사용했다. 1908년 나성의 헌트 부인은 비록 가난했지만 ‘주머니’를 손수 만들어 판매한 수익금을 한인 전도를 위하여 헌금하여 다른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1908년 신흥우의 사역은 교회를 넘어선다. 그 해 3월 친일 외교관인 미국인 더럼 W. 스티븐스를 저격한 사건으로 상항에서 재판을 받던 장인환과 전명운의 법정 통역을 맡았고, 그 해 12월 상항한인감리교회가 발간한 ‘대도보’에 기고하여 문서 선교에 발을 디뎠다.

매그놀리아 예배처소

1909년 나성 한인 사역이 미국북감리교 하와이 연회로 이임되어, 본 연회 감독인 존 W. 와드만 목사는 한인 사역을 위하여 300불의 예산을 청구하였다. 이듬해 예배처소가 매그놀리아 애비뉴 1620번지로 이전했다. 그런데 그 해 1월 16일 주일 밤 교회 재정 조사라는 이유로 구타하고 칼로 옷을 찢는 등 교단내에 풍파가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그 해 봄 재정 부족으로 한인 사역을 폐쇄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에 교인들이 매삭 의연금을 내어 한인 사역을 유지키로 결정하고 신흥우와 남궁염이 계속 사역키로 허락했다. 1904년 특별학생으로 입학하여 2년 과정을 수료한 후 신흥우는 1905년과 1906년에 걸쳐 의과대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그 후 문과대학으로 옮겨 1910년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재학 당시 학생자원운동에 가담하여 세계선교에 눈을 떴다. 졸업하던 1910년 당시 그는 한인 예배처소에 딸린 방에서 아내 이소사(영어이름 이레인)와 1909년 나성에서 태어난 딸 프로렌스와 거주했다. 그의 딸 프로렌스는 미국 생활의 은인인 셔먼 선교사의 이름을 딴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셔먼 선교사 가정도 거주했다. 셔먼 선교사는 한인 사역 이외에 12세의 해리와 10세의 체스터 등 두 아들의 양육을 위하여 재봉사로 활동했다. 1910년 한일합방 소식을 들은 신흥우는 공립신보에 “오의 심자중대한국”(吾의 心自中大韓國)이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글의 부제대로 한인들에게 “현상에 낙심 말고 장래의 희망을 두라”고 격려했다. 이듬해 남가주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쓴 논문, “한국의 재생(The Rebirth of Korea)”에서 한국의 자주독립 정신과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의와 평화의 세상을 만든다는 믿음을 적었다.

귀국

1911년 4월 신흥우는 한국으로 귀국한다. 이에 유학생이었던 남궁염, 홍승학, 그리고 염달욱이 설교를 맡다가, 남가주대학교에 유학온 민찬호가 신흥우를 이어 부임하게 된다. 그런데 민찬호가 나성한인장로교회로 전임하던 1912년에 한인 감리교 예배처소는 사실상 문을 닫게 된다. 귀국한 신흥우는 1912년 배재학당 학당장에 취임했고, 1959년 별세하기까지 교육계와 정치계에서 활동했다. damien.soh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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