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웅 목사 (SEED선교회 연구실장)
최원식(Choi Won Sik)은 일본 나가사끼에서 기선 개릭 호를 타고 1904년 1월 23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193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그가 1905년에 하와이에 온 것으로도 되어있다. 당시 그는 24세의 총각이었다. 그의 어머니 최순이는 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1906년에 하와이로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호놀룰루에 도착한 최원식은 하와이 섬 코할라 지역 농장으로 이동한다.
성 어거스틴 성공회 한인회중
1904년 5월 최원식은 그가 노동하는 하와이 섬 코할라 지역의 성 어거스틴 성공회를 방문하여 윌리암 H. 펜톤-스미스 사제를 만나 한인들을 위하여 미사를 드려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펜톤-스미스 사제는 한인회중 목회를 신설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추천으로 하와이 성공회 주교 레스태릭 주교는 한인회중 사역을 위하여 최원식을 평신도 지도자로서 전도사로 임명한다. 이는 하와이 한인성공회의 시작이었고, 1896년 성공회 선교가 조선에서 시작된 지 9년만이다.
코할라 지역의 한인회중은 두 번의 미사에 참석한다. 주일 아침에는 성 어거스틴 성당에서 성당 인근에 흩어져 노동하는 하와이인, 포르투갈인, 중국인, 일본인 등 타민족과 함께 영어 미사에 참석했다. 주일 오후에는 최원식이 따로 인도하는 한국어 미사에 참석했다. 한인 회중들이 하나같이 신발을 벗고 성당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은 성 어거스틴 성공회의 타민족 회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고 한다. 한인회중들 중 하와이 이주 때 소지했던 1894년 서울에서 언문(한글)으로 펴낸 발췌성서인 ‘조만민광’과 1903년 서울에서 출판한 ‘성회송가’를 미사에서 사용하였다.
1904년 9월 최원식은 성 어거스틴 성당에서 주중 야간과 주일 오후에 한인 공부반을 개설하고 영어와 기독교에 관해서 가르쳤다. 그러나 한인 어린이들은 성 어거스틴 성공회의 영어 주일학교에 출석했다. 최원식은 성 어거스틴 성공회 한인회중 사역 이외에도 한인동포들이 노동하는 코할라 사탕수수 농장을 순회 전도하였고, 이로써 미사에 참석하는 한인의 수가 성장했다. 1905년 보고에 따르면 6명의 성공회 사제가 하와이 전 지역을 섬기고 있었는데 한인 사역은 코할라 지역 외에 다른 한 곳이 더 있었다. 다른 곳에는 한인 성공회 교인들이 채플에서 기도회로 모이고 있었는데 통역은 없었다. 1905년 하와이 성공회는 이들 두 한인 사역자를 위하여 146불을 지출하였다. 최원식이 성 어거스틴 성공회를 떠난 후에도 이병준과 이윤일 등 한국인 회중이 있었다. 이들의 이름은 본 성당내의 채색유리창에서 발견된다. 이병준은 1905년 19세의 나이로 호놀룰루에 도착했는데 케헤나에서 옥수수 농장을 경영하다가 1951년에 코할라에서 트랙터 사고로 향년 65세에 세상을 떠났다. 코할라에서 태어난 그의 첫째 아들 이윤일은 1941년에 21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성 어거스틴 성공회는 1884년 사탕수수농장으로 이주한 영국인 가정에 의해서 세워진 후 코할라 지역의 삶의 중심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오늘날에도 몇몇 한국인 회중이 본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이올라니 학교v 최원식은 하와이성공회 주교 레스태릭 사제의 추천으로 호놀룰루 소재 이올라니 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하와이 이민자들의 영어 교육을 위해 설치한 영어 특별반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최원식을 한국어와 영어로 준비된 이중 언어 지도자로 세우려는 기대를 읽을 수 있다. 성 어거스틴 성공회 케헤나 한인회중
1917년 코할라 사탕수수농장에서 노동하는 십여 한인동포들이 약 9마일 떨어진 케헤나(Kehena) 지역으로 이주하고, 땅을 임대하고 옥수수를 재배했다. 그들은 헌금한 돈으로 2에이커의 대지를 구입하고 작은 성당을 건축했다. 본 회중은 성 어거스틴 성공회에 소속된 케헤나 한인회중이 된다. 케헤나 한인회중은 주일 오후에 성 어거스틴 성공회의 제임스 워커(James Walker) 사제의 주도로 미사를 드렸다. 워커 사제는 미사를 드린 후 주일 오후에 주일학교도 운영했다. 1929년에는 25명의 한인교인이 있었고, 본 케헤나 한인회중은 1935년까지 지속되었다. 2세들이 교육을 위해 다른 지역으로 떠났고, 연로한 교인들은 사망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여 교인이 없어 교회를 닫고 부지를 성 어거스틴 성공회에 기부했다.
홀리 이노센츠 성공회 한인 회중
최원식은 하와이성공회 주교 레스태릭의 추천으로 1908년 9월에 본 성공회 담임사제 레오폴드 크롤(Leopold Kroll) 신부를 도와 홀리 이노센츠 성공회에 출석하는 한인회중을 섬기게 된다. 마우이 섬 라하이나와 인근 카아나팔리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하는 약 200명의 한인 노동자들이 거주한 가운데 1905년 말 라하이나에 한인감리교회가 조직되었지만 거의 목회자 없이 지속되는 가운데 한인감리교회 교인들이 홀리 인노센츠 성공회에 출석하게 된 것이다. 홀리 이노센츠 성공회가 소재한 라하이나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 중 일주일에 한, 두 홀리 이노센츠 성공회 명씩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성공회 한인 사역이 시작된 지 6개월 만에 범법자가 더 이상 생기지 않았다고 하니 목회의 위력을 알만 하다. 한인회중 사역이 시작되던 1908년, 14명의 한인이 영세를 받았다. 그 해 11월 레스태릭 주교의 방문을 기회로 최원식은 호리 이노센트 성당이 있는 라하이나 농장과 인근 카아나팔리와 올로발루에 있는 농장까지 순회전도를 하여 그가 집례하는 미사에 참석하는 수가 34명이나 되었다. 본 미사에서 최원식이 통역하였고 한국어 찬송을 불렀다. 최원식은 야간 영어반을 운영한다. 영어반 교사인 밴 디어린(Hilda Van Deerlin)은 호놀룰루의 성 메리 성공회로 전임되던 1909년 9월까지 가르쳤다. 이 영어반은 최원식이 본 성공회에 부임하기 이전인 1907년부터 시작했는데 본 성공회 랄프 웨이모스(Ralph Weymouth) 사제를 돕기 위하여 온 밴 디얼린에게 한인 회중들이 영어를 가르쳐 줄 것을 요청함으로서 개설되었다. 1908년에 웨이모스 사제가 은퇴한 후 레오폴드 크롤 사제가 부임하면서 최원식은 주중 학교도 개설했다. 크놀 사제가 호놀룰루로 전임된 지 1년이 되던 1911년의 여름, 공부를 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하기까지 약 3년간 최원식은 이곳 홀리 이노센츠 성공회 한인회중을 섬겼다. 이 후 본 성공회 한인회중은 거주 사제가 없이 한국어를 모르는 부인 평신도 지도자의 목회가 계속되다가 한인 노동자의 잦은 이동으로 정규적 교회활동이 불가능하여 1925년에 한인회중 목회는 중단되었다.
샌프란시스코
1930년 인구조사. 최원실로 적혀있다. wd는 홀아비라는 뜻이다. 1911년경 최원식은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40세 된 1920년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자로 활동했다. 그는 70세의 어머니 순이와, 4살 아래 36세의 부인 에바 최로부터 낳은 18세의 아들 요셉, 9세의 아들 피터, 7세의 딸 아다 그리고 6세의 프랭크 등 총 5명과 자신을 포함해 6명의 가족을 부양했다. 1930년 인구조사에 그의 이름은 최원실이다. 최원식의 오자로 보인다. 그의 부인이 기재되어 있지 않고 그가 홀아비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1930년 이전에 그의 부인이 소천했다고 보면 된다. damien.soh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