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웅 목사 (SEED선교회 연구실장)
1905년 일본늑약이후 조선이 일본의 야욕에 놀아나던 1907년 9월 이기풍은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명 중 한 명으로 졸업한다. 목사로 안수를 받고 그해 이기풍은 내지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1907년 독노회 회록에는 “전도국에서 제주에 선교사를 파송하되 그 봉급과 용비는 전국 노회가 연조 담당하기로 작정하고 선교사는 이기풍씨 내외로 선정하다”고 적는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한다. 첫째, 이기풍만 선교사로 파송한 것이 아니라 그의 부인인 윤함애도 선교사로 파송하였다는 점이다. 이로써 부부 선교사 파송이라는 전통이 서게 된다. 이 말고도 전도국을 외지전도국으로 변경하였다는 점도 특이하다. 이기풍 이후 이른바 외지 전도 (선교)라는 공식어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백낙준에 따르면 이기풍이 선교사가 된 데는 그의 자원에서다. 찰스 크락 선교사는 이기풍이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를 조직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에서 퀠파트(제주도)에 기쁘게 선교사로 나섰다’고 적었다. 이기풍이 선교사로 파송되던 1907년이 평양부흥운동이 시작되던 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복음이 아니면 조국 조선이 있을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를 이기풍에게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막상 제주도로 떠나려는 이기풍에게 두려운 마음이 없진 않았다. 이때 이기풍의 사모 윤함애가 “우리가 안가면 누가 불쌍한 영혼을 구하겠어요? 두말말고 속히 떠납시다”고 선교사명을 세워나갔고 한다. 윤함애는 말라리아로 죽을 뻔 하였는데 사무엘 마펫 선교사의 기도로 살아났고, 숭의여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윤함애는 그레이함 리 선교사의 양녀가 되었고, 마펫 선교사의 중매로 이기풍과 결혼하였다.
이기풍은 목포를 떠나 제주도로 가던 중 추자도 부근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구사일생으로 1908년 2월 추운 겨울 제주도에 도착한다. 하루 반나절을 널빤지 하나에 의지하면서 그가 ‘저를 살려주셔야 제주도의 불쌍한 영혼을 살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나님께 호소한 응답이었다. 혼자서 조랑말로 전도여행을 다니다가 호미로 밭을 매면서 예수를 전했지만 전도의 열매는 없었다. 평안도 말이 제주도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로 1899년의 신축교란의 천주교 학살 사건 후라 기독교에 대한 반대와 핍박이 심했다. 200명 이상이 이기풍을 죽이기로 서약하는 등 위기 상황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마구간에서 눈을 붙이고, 영양실조로 고생하면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건너면서 굶주림과 괴로움을 이겨내면서까지 18,000개의 귀신을 따르는 제주도를 사랑하였다. 이기풍이 말똥으로 불을 때고 쌀을 씻지 않고 밥을 짓는다는 제주도의 풍속을 적은 선교 편지를 한성신문이 실었을 때 제주도 사람을 야만인으로 취급했다며 제주도 청년들이 이기풍의 멱살을 잡았는데 박대감이 말리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고 한다. 마침내 이기풍이 평양의 사무엘 마펫 선교사에게 좌절과 절망을 쓴 편지를 부쳤다. 평양 마펫 선교사에게서 예상외로 금방 답신이 와 뜯어보았다. “이기풍 목사의 편지를 잘 받았소. 당신이 내 턱을 돌로 친 흉터가 아직 아물지 않고 있으니 아물 때까지 더욱 분투하시오”라는 엄중한 권면을 읽고 이기풍은 대성통곡을 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이기풍이 홍수에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살리면서 제주도 사람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예수께서 하셨던 능력 전도가 이기풍의 전도 사역에서도 일어났다. 앉은뱅이 소년이 일어나고 미치광이가 낫는 등 기적이 발생하면서 복음의 문이 조금씩 열렸다. 1908년 9월 이기풍은 조선 독노회에 원입교인 9명에, 회집 교인이 20명이었고 제주 토박이 김홍련이 전도인으로 자청하였다고 보고했다. 그 해 향교골에서 시작한 기도처가 제주 최초의 서문통(성내)교회가 된다. 이기풍의 딸 이사례는 그가 쓴 순교보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새벽같이 나가시고 나 혼자서 집을 지킬 때면 관덕정에 가서 아빠 엄마가 어느 쪽에서 오시는가 하고 쪼그리고 앉아서 기다렸다. 서산에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점점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집 앞에 있는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어머니 오시기만을 기다렸다. 이 뽕나무는 내가 외로울 때 위로해주던 가장 친한 친구였다”고 적었다. 이 뽕나무 아래서 성내교회가 시작되었다.
1908년에 성내교회 외에 금성교회가 설립되었고, 1909년에 조천교회와 모슬포교회, 1913년에 용수교회, 1914년에 중문교회, 1915년에 한림교회와 세화교회, 1916년에 고산교회가 개척되었다. 그 외에도 삼양교회와 성읍교회도 문을 열었다. 그러나 셋째 아들을 잃은 슬픔이 이러한 쾌거에 가려질 수는 없었다. 이기풍은 1916년 건강악화로 제주 선교를 마칠 수밖에 없었다. 요양 후 1916년 그는 광주 북문안교회(오늘날 광주제일교회)로 부임하였다가 또 요양 후 1919년 순천읍교회로 전임하였다. 1920년에 그가 전남노회 노회장이 되더니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부름을 받아 이듬해 총회 부회장을, 1921년에는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오래된 관절염과 귓병으로 서울로 올라가 요양을 하다가 다시 목회로 돌아선 그는 1923년에 순천읍교회, 1924년에 고흥 벌교읍교회를 섬겼다. 1923년 4월에는 이기풍 목사의 포교 25주년 기념식이 순천읍 예배당에서 개최하였다.
1927년 이기풍은 제주도 2차 선교 사역에 들어선다. 성내교회로 재차 부임한 이듬해 이기풍은 환갑을 맞았다. 60에 들어선 이기풍은 복음 사역 외에도 제주유치원을 설립하고 영흥학교를 개교하는 등 기독교 교육에도 힘썼다. 1930년 6월 제주노회가 결성된 그 다음 해 그는 노회장을 역임했다. 1934년 이기풍이 떠난 제주도에는 30여개 교회가 설립되었다. 7년간의 제2차 제주 선교를 마친 후 은퇴한 이기풍에게 순천노회와 벌교교회는 그의 포교 35주년 기념식을 열어 그의 교회교육사업을 빛냈다. 그는 1934년 70세의 노구에도 전남 지역의 도서 지방에서 순회전도를 하면서 교회 개척에 집중하면서도 연약한 교회를 굳건히 하였다. 1938년 이기풍은 여천 우학리 교회에 부임했다.
1938년 9월 장로교까지도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이기풍은 신사참배를 강력하게 반대했고, 아이들이 신사에 올라가서 놀지도 못하게 하였다. 경찰서에 수감된 72세의 이기풍은 “나는 죽어도 일본 귀신한테 절할 수 없다. 너희가 지금 총을 쏘아 죽인다고 해도 나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절대로 섬기지 않겠다”고 신앙을 고수했고,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을 때까지 심한 고문을 견뎌냈다. 출감조치가 결정되었으나 나머지 목사들이 출감하기 전까지는 절대 나가지 않겠다던 이기풍, 그는 극도로 쇄약해진 가운데 여천 우학리교회 목사관으로 옮겨졌다. 1942년 6월 13일 그는 주일 부축을 받으며 마지막 성찬예식을 거행했고, 1주일 후인 1942년 6월 20일 주일에 광복을 보지 못한 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마지막 사역지인 우학리에 안장되었다가 광주제일교회 화순묘지로 이장되어 오늘에 이른다.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는 이기풍의 부인 윤함애에게 표창했다. 윤함애는 1962년 12월 25에 향년 84세로 주님의 부름에 응했다. 본 장로회 제77회 총회는 이기풍 목사의 제주 선교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기풍 선교 기념관 건립을 가결하고 1998년에 총 1천여 평의 건물을 건축했다. 이기풍으로 시작된 제주도 선교는 ‘첫 번째’라는 몇 가지 교훈이 있다. 이기풍은 첫 번째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였고, 이기풍과 함께 사역한 이관선은 첫 번째 여자선교사였고, 일 년에 한번 선교비가 지급되었다면 이기풍은 첫 번째 믿음선교를 감당한 선교사였다. damien.soh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