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웅 목사 (SEED선교회 연구실장)
임형주(林衡柱)는 1867년 5월 5일에 평남 용강군 양반집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아호가 근당(槿堂)이다. 4살에 천자문을 욀 정도의 조숙했던 그는 14세에 한학의 사서삼경과 심팔사략을 통독한 신동이었고, 소년 시절 중국 고서에 정통하였다. 17세에 과거에 급제한 임명주는 진사가 되어 고향에 내려왔다. 진사에 급제한 사람들의 지나친 주연과 매관매직을 본 임명주는 문벌타파를 주장하는 등 사회 개혁에 한 발을 내디뎌 스스로 양반 의복을 벗기에 이른다. 실용적인 평민 의복으로 갈아입은 임형주는 상투를 자르고 천부적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고 계급타파를 외치기까지 한다. 이러한 그의 사회 개혁이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주장하는 어른들의 질책으로 임형주는 27세가 되던 1894년 고향을 떠나 진남포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임형주는 1894년 청일전쟁이 평양에서 교전하는 것을 목격하고 남의 나라의 전쟁터가 된 조국의 수치를 보고 국력 배양에 앞장서게 된다. 임형주가 1897년 독립협회에서 시작된 만민공동회가 전국으로 확산될 때 임형주의 사랑방에도 이에 동조한 지역 청년들과 뜻있는 유지들이 모여 들게 된다. 임형주가 평양 독립협회 간부가 되면서 민지계발과 부국강병 그리고 서정일신에 힘을 모았다. 그런데 독립협회는 1898년에 해산되었고, 이로 인해 중국으로 피신하다 돌아온 임형주는 직간접으로 대한제국의 주목을 받게 된다. 도산 안창호는 임형주와 밀접한 관계다. 안창호는 임형주보다 11세가 적다. 그들은 같은 고향 사람으로 친척 간이자 후원자였다고 알려져 있다. 안창호는 집이 가난하여 한때 임형주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였다고 전해진다. 임형주가 이석관의 장녀 이혜란과 안창호의 백년가약을 주선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석관은 이후 임형주의 전도로 안식교로 개종한다.
감리교 전도사
임형주는 감리교에 입교한다. 그가 32세가 되던 1899년에 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하와이 그리스도감리교회에 적혀 있다. 그런데 위의 교회에는 그의 아들 임태식이 미국 북감리교 내한 선교사였던 윌리암 A. 노블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되어있는 만큼 임형주도 노블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을 수도 있다. 임형주가 세례를 받았다는 1899년은 청일전쟁 후가 된다. 청일전쟁은 1894년 8월부터 1895년 4월에 한반도에서 청나라와 일본 간에 일어난 전쟁이었다. 그가 1899년에 세례를 받았다면 이러한 전쟁을 겪은 후다. 이후 임형주는 전도사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비를 털어 고향에 선돌감리교회를 세우고 민권사상보급과 전도사업에 열중했다는 기록도 있다. 1899년 이후 하와이로 이주하던 1904년 사이가 될 것이다.
하와이 지방 전도사
임형주는 1903년 진남포 인력개발회사의 직원인 계몽원이 된다. 그는 평양 지역 청년들의 하와이 노동이민을 주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동 이민을 주선하던 임형주가 하와이로 이주한다. 이민자들의 지도를 위해서였다. 임형주(Im Hyang Choo)는 가족을 한국에 두고 9살 난 아들 임태식(Im Tai Sik)만 데리고 선박 아메리카 마루에 승선했다. 그들은 1904년 1월 9일 하와이에 도착했다. 임형주가 37세가 되던 해다. 하와이에 도착한 임형주는 ‘한인감리교선교회’에 가입했을 것이다. 본 선교회는 1903년 11월에 안정수와 우병길이 조직하였다. 임형주가 본 선교회에 가입하였을 때는 이들 안정수와 우병길이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임형주가 타 지역으로 노동자로 가지 않고 호놀룰루에 계속 거주하였다면 1904년 2월 이후 홍승하 전도사가 인도하는 예배에 임형주가 참석하였을 것이다. 본 선교회는 그 해 4월 ‘한인기독감리교회’로 승격되었으니 임형주가 이 승격의 증인이 되기도 한다. 1904년 5월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연회 감리교감독 존 W. 와드만 목사는 임형주를 이교담과 우병길과 함께 ‘지방 전도사’로 임명하였다. 이때가 그가 37세가 되던 해다. 임형주가 어디로 파송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하와이 한인감리교회의 1904년 말 교인명단에 카우아이 섬에 7개 교회, 오아후 섬에 5개 교회 그리고 마우이 섬에 2개 교회 등의 3개 섬에 14개의 교회와 400명의 교인이 있었다. 임형주는 이들 14개 지역 중 몇 지역을 두루 다니며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하는 한인들을 찾아가 전도하고 심방을 하였던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런데 임형주의 지방 전도사 기간은 한 달도 채 되지 못했다. 그가 지방 전도사로 임명받던 그 달에 귀국했기 때문이다.
하와이 신민회
임형주는 1903년 홍승하 등에 의해 조직된 신민회에 가입했다. 신민회는 동족단결, 민지계발, 국정쇄신 등의 강령을 내세우고 구국정신 고취와 일제침략행동 성토 등의 활동에 참여했다. 신민회는 계파갈등으로 1년 만에 해산될 때까지 활동했을 것이다.
안식교
임형주가 하와이 지방 전도사로 임명을 받던 1904년 5월에 아들 임태식과 함께 귀국길에 오른다. 임형주가 소환령에 의해서 귀국길에 올랐고 구속령이 떨어졌다고 전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임형주는 일본 고베에서 한국으로 가던 귀국선에서 손흥조를 만나고, 손흥조로부터 안식교의 재림 교리를 듣고 안식교로 개종한다. 이로써 임형주는 일본인 안식교 전도사 쿠니야 히데로부터 안식교도가 된 손흥조와 이응현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세 번째 안식교도가 된다. 임형주가 재림 교리를 듣고 안식교도가 되고 그의 이름을 임기반(林基盤)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아 소환령으로 인해 귀국길에 오른 그의 심적 상황이 엄중했음을 알게 된다. 기반이란 베드로라는 뜻이다. 이민선으로 일본에 왔던 이응현은 신체검사에 합격하여 하와이로 갔지만 손흥조는 신체검사에 불합격하여 한국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임형주는 손흥조와 함께 귀국한 후 1903년에 근무했던 인력개발회사가 있던 진남포로 가서 한국 안식교의 기초를 놓는데 크게 활동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권유로 고향 지인들 대부분이 안식교에 입교한다. 이후 5년 동안 안식교의 놀라운 성장은 임형주의 역할로 보면 된다. 그런데 안식교 선교본부를 서울로 이동하려는 계획에 임형주가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면서 안식교단의 모든 사업에서 결별한다.
독립운동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될 때 임형주는 국체보상운동에 참여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임형주와 그의 부인 최신실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사실을 비교적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대한매일신보에 따르면 “평양에 거주하는 임기반 씨는 금번 국채보상금 문제에 대하여 대세를 일장 연설한 뒤 개탄하기를 나는 가족이 7명이라 각각 1원씩을 출금하여 2,000만 동포 중 일개인의 의무를 면책하노라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 부인에게 이상 전말을 설명한 즉 동 부인 최신실씨가 정색하여 책하기를 국가적 관념과 천부적 자유는 사람마다 있으므로 이러한 의무는 내 스스로 이행한다하고 간직했던 은장도 1개를 즉석에서 연출하매 듣고 보는 자 모두 흠모하지 않음이 없었다.” 위의 임기반은 임형주다. 임형주의 나라 사랑은 계속된다. 1919년 6월 만주 안동현에서 이기호와 김사익 등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또한 그가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활동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북경에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하고 청년 단원의 모집을 꾀했다는 기록도 볼 수 있다. 1920년 3월 봉천에 거주하던 것으로 알려진 임형주는 대정 8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대구 법원에서 기소중지 불기소의 주문을 받았던 만큼 독립운동가로서의 임형주가 일제의 유주의 인물로 보인다. 그리고 중외일보는 임형주가 1927년 8월 봉천조선인청년회 내에 노소동락단을 발기할 때 참여했다고 보도했다. 중외일보는 본 발기 모임에서 임형주가 축사를 담당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건국훈장 애국장
자녀들이 유학 간 일본을 방문하던 중 임형주는 교통사고가 발생하여 1932년 6월 5일에 향년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2000년 8월 대한민국 정부는 광복 55돌을 맞아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 157명을 포상키로 했을 때 임형주에게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damien.soh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