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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이지성

-8.15 해방 전 한인 선교사

손상웅 목사 (SEED선교회 연구실장)

이지성은 1880년경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내한하기 5년 전 태어났다. 그는 한국 수원에서 미국 북감리교가 설립한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밖으로는 외세가 밀려오고 안으로는 신분적 유교체제가 동요하는 등 사회 전반이 균열 현상이 발생하던 때인 20세기 초 이지성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주한다.

한인기숙학교 사감 및 교사 1905년 5월 박윤섭과 송헌주 등이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연회 감리사 존 와드맨의 사택에 모여 2천 달러를 약정하면서 한인 자녀의 교육을 위한 한인학교 설립을 요청했다. 이 소식을 접한 상항 주재 감리교 감독 존 해밀톤은 1만8천 달러로 호놀룰루에 위치한 일본인 기숙사 학교였던 북태평양학교 건물을 구입했다. 한인 약정금 2천 달러 이외는 서양 친지에게서 1천 달러, 하와이 전도회에서 5천 달러, 감리교 국내선교부와 교회확장부에서 1만 달러로 충당했다. 1906년 가을학기에 호놀룰루 한인류숙학교라고도 불린 한인기숙학교가 문을 연다. 한인 학생 전원을 기숙사에 입사시켜 전인 민족교육을 실시하게 된다. 본 기숙사는 호놀룰루 한인교회가 헌금하여 마련하였다. 이 때 이지성은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연회 파송으로 한인기숙학교 사감이 된다. 그는 1907년에도 사감으로 임명을 받았는데 2년간 평신도 선교사로 사역한 것으로 보인다.

한인기숙학교는 초, 중등 과정을 개설하였고 첫 학기에 호놀룰루와 하와이 각 지역에서 온 65명 학생이 8학년까지 등록했다. 감리사 와드만의 부인 메미 H. 와드만이 교장이었고 미국인 교사 3명과 한인 민찬호와 임정수 등 2명이 합류하여 총 5명의 교사가 있었다. 3년제 학교로 국어, 국사, 지리, 성경, 유년필독, 수신, 초등소학독본, 산술, 한문, 영어 중국어 등을 가르쳤고, 국사 과목의 경우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 등의 위인과 영웅의 전기를 통해 애국 사상을 고취하였다.

1906년 한인기숙학교 학생들 중 몇은 법정이나 농장에서 통역을 담당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한인기숙학교는 1907년에는 정규학교로 승격하여 다른 상급학교로 진학이 가능했다. 1913년에 이승만이 교장이 되었을 때 학생 수는 120명으로 증가했고, 이후 본 학교는 한인중앙학원으로 변신한다. 다른 곳에서 건물을 빌려 예배를 드리던 한인교회도 이곳으로 이사한 이후 이곳은 코리안 컴파운드로 불렸다.

야학교 한인기숙학교를 설립함과 동시에 공립소학교와 야학교도 설치했다. 각 농장마다 공립소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일신여학교 등 4개 공립소학교가 있었다. 야학교는 영어와 국한문, 산수 등을 가르쳤고, 10개 처에 흩어져 있었다. 이 야학교의 교감에 이지성이 임명되었다. 이지성의 임명은 야학교의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을 가졌음을 암시한다. 이외에도 골로아 지방 국어학교 등 국어를 가르치는 국어학교가 힐로, 브네네, 마카웰리, 엘리엘리, 에봐, 하나마울루, 와히아와 등 7개 처에 설립되면서 한인 2세의 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국어학교에도 이지성이 관여했을 수도 있다.

복음회와 서적 판매인 그리고 교사 이지성은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연회가 1906년 호놀룰루에서 조직한 복음회 Gospel Society의 책임자로 활동했다. 이듬 해 이지성은 위의 본 연회 산하 한인기숙학교 사감 외에도 서적 판매인으로 임명받았는데 1908년에도 서적 판매인으로 활동했다. 1908년에는 이지성이 민찬호, 임정수, 메이미 와드만 부인 등과 함께 한인기숙학교 교사로도 임명을 받았다.

수원 1909년 하와이 연회는 이지성을 수원종로감리교회로 임명했다. 비록 수원종로감리교회를 임명을 받았지만 그는 미국 북감리교가 수원에 개교한 삼일학교에서 교사 및 교장으로 사역한 것으로 보인다. 1903년 5월에 이하영, 임면수, 나중석 등이 수원 보시동 감리교회에서 개교한 삼일학교는 삼일공업고등학교와 삼일상업고등학교로 발전하였다.

신학부 졸업 감리교회 신학부 제1회 졸업식이 1911년 12월 20일 오후 2시에 서울 정동제일예배당에서 있었는데 이지성이 40명과 함께 졸업하였다. 5년 전에 하와이에서 전도하든 현 순과 이경직과 함께 이지성이 함께 졸업식에 참여했다고 소개한 신문은 그가 신학필업장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감리교회 신학부 졸업식이 있던 1911년 경성에 소재한 일본인 기독청년회가 한국 청년회 각 임원과 목사 등을 일본 시찰차 신청을 받았다. 경성, 평양, 선천, 의주, 공주, 사리원, 인천, 수원, 대구 등 각처에서 사역하던 목사 수십 명이 일본 시찰 신청을 하였는데 이때 이지성도 함께 했다. 당시 미이미회(감리교회) 소속 목사로는 장낙도, 손승종, 최병헌, 신흥우, 이경직, 현 순, 김덕기, 현석칠이 동행했고, 장로교 소속 목사로는 김창근, 양전백, 주공삼, 이원민, 김천일, 한석진이 동행했고, 한국인기독청년회에서는 김 린, 이상재, 최상호, 수원 삼일학교 체조시간, 1937년 김일선, 이원긍이 함께 했다. 신한민보는 이들을 고명한(?) 목사로 지칭하면서 이들이 황공 감사하였다고 비꼬았다.

상항 이지성은 1912년에 다시 도미한 것으로 보인다. 신한민보에 따르면 1912년 3월, 이지성은 국민회 상항 지방회 신입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이지성 이외에도 김윤칠, 김능환, 이위종, 최 광, 박양호, 최 열, 김봉주, 서 조, 이상은, 이원익이 함께 가입하였다. 이지성은 국민회 상항 지방회를 통하여 해외에서 추진하는 조국의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선교사 그런데 1년 정도 미국에 체류한 이지성은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그는 1912년 3월에 미국 북감리교 조선연회에서 집사 목사로 안수를 받는다. 이 해 연회록은 그가 서울 감리교 신학교의 3년 차에 재적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지성은 1912년 3월, 조선 연회에서 일본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그는 일본에서 약 2년간 사역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 서울로 돌아온 1914년, 이지성은 서울 감리교 신학교의 4년차에 재적하면서, 내한 감리교 선교사 W.A. 노블 목사의 서울 지방회 산하 한강과 이태현 지역의 목회자로 활동했다. 그런데 그가 1915년에는 장로 목사로 안수를 받지 않았는데 그 해 목회자로도 임명을 받지 않았다. 이지성은 1919년 기미년 삼일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이지성은 수원 삼일학교 교장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서울 감리교 신학전문학교를 설립하고 가르치는 교수를 역임했다. 1924년에는 이지성이 철산에 가난한 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기관이 없음을 한탄한 나머지 명진 학원 내에 기독청년회 야학을 개교하고 조선어, 한문, 산수, 일어 등을 가르쳤다. 본 야학에는 이지성 외에도 김석윤, 우상기, 김기봉, 허원준이 교원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에는 이지성이 조선 고아구제회의 이사로 선임되었다. 그 해 11월 제1회 이사회를 개최하고 고문에 윤치호, 민영찬 그리고 내한 미국 선교사 도마위 등 3명을 추대하였고 이사장에 원익상을 선출하였고, 이지성 외 이수유, 김영길, 강봉재, 손예례, 박희도가 이사로 선임되었다.

해방 후 1948년 4월 18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이지성은 서울 서대문구 국회위원 입후보에 등록하는데 입후보자 6명 중 한 명으로 68세의 회사원으로 무소속 출마였다. 그 후 그는 한국무역합자회사 대표로 활동했고, 민생문제 해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damien.soh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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