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웅 목사 (SEED선교회 연구실장)
안정수는 1878년 충남 보령군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한 그는 1897년 한성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영어와 서양문화를 배웠다. 본 학교에서 안정수는 현순과 “만일 내가 줄 수 있는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모두 조선을 위해 바치리라”고 했던 허버트 선교사를 통해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1899년 본 학교를 졸업한 그는 제물포 해관에 채용되었다. 그의 형제 중 안영수는 대법원 판사였고, 안종수는 전라도 도지사를 역임했는데 제주도에 9년간 유배를 당했다고 한다.
제물포와 제물포 내리교회
제물포 해관에 채용된 안정수는 이곳 내리교회에 출석했다. 2년 전 그가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허버 존스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던 교회다. 그는 그 해 12월부터 내리교회 부속 매일학교 야간 영어교사로 봉사한다. 존스 목사가 보고한 1899년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능력 있고 성실하고 헌신적인 안정수에 의해 매일학교가 정상 궤도에 올랐고 한문과 언문 그리고 초급 영어를 가르쳐 학교는 이전보다 더 좋은 상황에 처했다.’ 그는 우병길 등과 함께 매일학교를 근대식 학교인 ‘대한인 미이미감리교회 사립영화학당’으로 개조했다. 안정수는 1901년 한국 최초로 창립된 내리교회 엡웻 청년회 통신국장을 맡아 그 해 9월 태극등 2개를 달고 태극기를 좌우에 게양한 가운데 고종황제 탄신 50수 기념경축행사를 주관하였다. 강원석, 함베드로, 존스 목사에 이어 “대황제 성덕이 외외하셔 일월같이 비치시나 흑운 같은 산하가 총명을 옹폐하니 먼저 신민의 본분을 국사함이 가한 줄이라”는 연설 후 그는 만세와 애국가를 불러 민족의식을 높였다. 그 해 10월에 회집한 미국 북감리교 서한국지방회 제1차 회의에서 서기로 선임되었고 그 후 내리교회 권사로 임명되었다. 1902년 11월 미국인 데이빗 W. 데쉴러가 제물포에 하와이 이민대행 업체인 동서개발회사를 세울 때 존스 목사의 소개로 안정수는 본 회사 통역관으로 입사했다. 알렌 공사로부터 하와이 이민 지원 요청을 받은 존스 목사는 당시 기근으로 시달리고 있는 한국인에게 하와이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비유하면서 이민을 설득하여 내리교회 남녀 교인 약 50명이 하와이 이민을 지원하였다.
하와이
1902년 12월 22일 눈이 내리는 날 안정수는 장경화와 정인수 등과 함께 인솔자가 되어 102명의 1차 하와이 이민단을 이끌고 제물포를 떠난다. 안정수는 존스 선교사가 파송한 선교팀이었다. 그는 내리교회 권사인 김이제와 함께 미국 상선 갤릭호에서 매일 예배를 인도했다. 이듬 해 1월 호놀룰루에 도착한 이들 한인이주자들은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감리사 피어슨 목사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안정수는 1903년 11월 첫 주일 제물포교회 동료 권사였던 우병길(윤병구)과 함께 호놀룰루 시내에서 한인감리교선교회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의 시작이다. 또한 1903년 8월 그는 홍승하 전도사와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고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캘리포니아
1904년 말 안정수는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선교를 위하여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였다. 다음 해 그는 박용만과 함께 미국 북감리교 지방 전도사로 임명받아 샌프란시스코와 인근 오클랜드 지역에 흩어져 거주하는 17명의 한인 동포를 찾아가 전도하고 돌보는 교회 사역을 담당하였다. 네브라스카 주 링컨으로 떠나던 1905년까지 사역했다면 그의 사역 기간은 1년 미만일 것이다. 1905년 현재 샌프란시스코의 17명 이외에 문경호가 사역하던 바카빌의 23명과 새크라멘토의 15명을 합쳐 샌프란시스코 인근에 총 55명의 한인이 있었는데 이 중 18명이 등록교인이었고, 22명이 세례교인이었으며, 15명이 학습교인이었다. 미국 북감리교 태평양 일본인 선교부 산하의 H.B. 존슨 목사가 내리교회의 존스 선교사와 함께 1905년 7월에 샌프란시스코의 ‘페이지 스트리트 521번지’에 13개의 침대와 간단한 가구를 설비한 한인 미슌홈을 마련하였고, 두 개의 거실에 예배실을 만들었는데 안정수는 박용만과 더불어 한인 사역을 감당했을 것이다. 이 해에 내한 길에 샌프란시스코를 들른 재한감리교 아더 노블 선교사를 모시고 위의 예배실에서 한인들이 모여 성대한 모임을 가졌을 때 안정수가 조선에 관하여 대화를 했을 것이다. 190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공립협회 창립에 애국심이 강했던 안정수가 직접 참여하였다면 그 해 11월 공립협회 회관 마련과 공립신보 창간에도 협력했을 것이다.
안정수는 박용만과 함께 인종 차별이 심한 캘리포니아보다 인종 차별이 심하지 않은 네브라스카로 이주하였다. 1906년 그는 박용만에 이어 네브라스카 헤이스팅스대학에서 공부했다. 이듬 해 안정수는 하와이에 동행했던 우병길(윤병구)이 거주하고 있던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 해 10월 그는 뉴욕 거주 한인들을 중심으로 공제회를 조직하여 뉴욕 일본영사관이 추진하던 한인 인구조사를 강력 저지하였다. 1908년 5월 안정수는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 그 해 7월 공립협회 대표가 되어 독립운동가 이승만을 영접하였다.
오하이오
1908년 12월 안정수(John Soo Ahrn)는 시카고의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로 이주하여 1912년에 오하이오 주립대학에 입학하여 1년을 공부하고 1915년에 복학하여 이듬 해 ‘문학 철학과학 대학’을 졸업하고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기독교 과학자로 알려진 안정수는 콜럼버스에서 5천원 정도의 아시아 물품으로 3년간 미술상점을 열었는데 번창했다. 1918년 1월 사업관계로 코리아 선편으로 귀국하여 3.1만세운동을 목격한 그는 미국 한인사회에 진상을 알리기 위하여 도미한다. 그 해 4월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에서의 연설을 시작으로 애국지사 이기호와 내한 선교사 헐버트 박사를 초청하여 조국의 실상을 알리고 3.1만세운동으로 어려운 동포를 돕는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안정수는 1919년 6월 오하이오 주 콜롬버스에서 개최된 미국 북감리교 1백주년기념대회에 임정구 등 남자 대표 12명과 황혜수 등 6명의 여자대표, 우영택 등 4명의 아동대표, 국민회 대표 정한경과 함께 참석하였다. 그 해 뉴욕에서 향년 51세로 소천한 신앙의 아버지 존스 선교사의 장례식에 안정수가 참여했을 것이다.
뉴욕한인교회
안정수는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오하이오 주에서 번 자금으로 중국향 제조회사를 설립하여 약 30만불을 소유한 거부가 되었으며, 이후 정인수와 신세헌과 함께 설립한 한민상회도 번창하여 한인사업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1921년 뉴욕한인교회가 창립될 때 안정수도 함께 했다. 이듬해 그는 본 교회 5인위원회에 위촉이 되어 모금한 2,000불과 18,000불의 감리교 재단의 협조를 얻어 웨스트 21가 459번지의 지하가 있는 4층 건물을 구입하고 인근에는 콜럼비아 대학 등 대학에서의 학예의 편리가 있어 배달민족의 도덕 발전과 학술 연구에 충성과 희생을 다하자는 목적을 세웠다. 본 건물에 약 25명이 기숙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한인 단체들의 각종 활동도 가능했다. 이런 점에서 교회 이름 Korean Church and Institute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다년간 본 교회 이사를 역임하면서 교회를 섬겼다. 또한 안정수는 애국 운동에도 관여했다. 1919년 대한인 국민회 뉴욕지방회 창립 1주년 기념회에서 “국민자격과 국민회 드림”이라는 연설을 통해 조국 독립을 고취하였으며 1924년 홍득수 등과 함께 뉴욕 한인교민단 설립하고 동포 규합과 친목 증진 이외에 조국 독립을 목적했다. 그의 기부는 조선 적십자사, 구미위원회, 간도 동포 참상, 열강회, 상해 임시정부, 정신여학교, 보성전문학교, 흥사단, 안익태의 애국가발행, 뉴욕 중국 항일전쟁, 내지한재 그리고 광복군으로 이어졌다. 안정수가 1940년 7월 29일 향년 62세로 뉴욕 주립병원에서 급성맹장염으로 사망할 때까지 교회사랑과 민족사랑은 그치지 않았다. 그 달 30일 뉴욕한인교회에서 있었던 그의 장례식에 미국 감리교회 뉴웰 박사가 영결사 순서를 맡아 기독교적 인격을 갖춘 교회의 일꾼이었던 안정수를 애도했다. damien.soh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