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웅 목사 (SEED선교회 연구실장)
‘용필’로도 불린 박용만은 1881년 7월 2일 강원도 철원군 철원면 궁전리에서 태어났으나 조실부모한다. 그는 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과의 교분과 상동감리교회 엡윗 청년회를 통하여 신앙과 민족의식을 키웠다. 그가 1904년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반대 투쟁에 항거하다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는데 활빈당 사건으로 투옥된 데 이어 두 번째 투옥이었다. 그는 이 감옥에서 이승만과 정순만을 만나 의형제를 맺어 이른바 ‘삼만’이 된다.
미국 북감리교 한인 기도처
소년병학교 교장박용만, 1911년 석방된 박용만은 23세가 되던 1904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가 1905년 미국 북감리교 캘리포니아 연회 전도사 Local Preacher로 임명받는다. 그는 안정수와 더불어 샌프란시스코와 인근 오클랜드 지역에 흩어져 살아가는 17명의 한인 동포를 찾아가 전도하고 돌보는 교회 사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가 네브라스카 주 링컨 고등학교 가을학기에 입학하기 위하여 떠나던 1905년까지 사역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1년 미만일 것이다. 미국 북감리교 태평양 일본인 선교부 산하의 H.B. 존슨 목사가 재한 감리교 선교사였던 조지 H. 존스 선교사와 함께 1905년 7월에 샌프란시스코의 페이지 선상의 521번지의 건물에 13개의 침대와 간단한 가구를 설비한 한인 미슌홈을 마련하였고, 두 개의 거실에 예배실을 만들었는데 박용만은 안정수와 더불어 이들 사역을 감당했을 것이다. 이 해에 내한 길에 샌프란시스코를 들린 재한감리교 노블 선교사를 모시고 위의 예배실에서 한인들이 모여 성대한 모임을 가졌을 때 박용만이 선교사와 함께 신앙과 조선에 대하여 대화를 했을 것이다. 1905년 현재 샌프란시스코의 17명 이외에 문경호가 사역하던 바카빌의 23명과 새크라멘토의 15명을 합쳐 샌프란시스코 인근에 총 55명의 한인 기독교인이 있었고, 이 중 18명이 등록교회이었고, 22명이 세례교인이었으며, 15명이 학습교인이었다.
한인소년병학교
박용만은 1908년 9월에 네브라스카 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하여 1910년 12월까지 공부하다가 헤이스팅스 대학으로 전학을 가서 한 학기 공부한 후 다시 복학하여 1912년 8월에 졸업하고 문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본 대학에 재학 중 본 대학 학도병이었다. 이곳에서 이수한 ROTC 과정을 박용만 네브라스카주립대학 학도병, 1910년 표본으로 그는 1909년 13명의 학도를 모아 네브라스카 주의 커니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듬 해 한인소년병학교는 헤이스팅스 대학 구내로 이전한다. 1912년에 3년간의 훈련을 마친 유일한 등 한인소년병학교 첫 졸업생 13명이 배출된다. 한인소년병학교는 그가 1911년에 펴낸 ‘국민개병론’의 결실이기도 하다. 소년병학교 단가의 가사에서 박용만의 애국심을 읽을 수 있다:
소년병들아, 짓쳐 나가세./이 몸 미주 땅, 중원을 지키는 사자인가, 문지기련가/승냥이 떼 으르렁 대는 저 삼천리강산/아아, 맨발로 누더기로 남루하게 찢기며/뚝뚝 피 흘리며 떠나야했던 고토여./나 이대로 결코 돌아가지 않으리./총칼 갈아 시퍼런 날로 깎으리./원수들을 물리쳐 갈아 뒤엎어/기어코 저 항일 가파른 언덕, 풀밭에 함성 울려,/기어이 깃발 꽂는 날, 목 터져라 외치리./조선 사나이의 기개를.
헤이팅스 제일장로교회
1909년 10월 20일자의 대도에 따르면 교장인 박용만은 한인소년병학교에 성경과목을 개설했고, 학교 내의 기숙사에서 소년병 학생들과 함께 주일예배를 따로 드렸다. 샌프란시스코와 그 인근에서 전도사로 임명받아 잠시나마 사역했던 그의 영적 지도가 이곳에서도 적용되었을 수 있다. 소년병 학생 중에는 헤이팅스 대학 구내의 헤이팅스 제일장로교회의 교인으로 등록한 자도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은 그의 신앙지도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 중에는 ‘K.M. 양’은 1910년 12월 9일에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로부터 본 교회에 이명하였고, 정유문은 1914년 4월 14일에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었다.
무형국가론
박용만은 1911년 2월에 신한민보 주필을 맡았는데 신한민보는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였다. 그 해 그가 신한민보에서 주창한 ‘무형국가론’이 1912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결성케 만든다. 이는 북미, 하와이, 멕시코, 러시아, 중국 각지에 지부를 둔 최초의 임시정부라 할 수 있는 한인 최고 통일기관이다. 그가 1911년에 간행한 ‘국민개병론’과 ‘군인수지’에서 그의 무력 건국을 읽을 수 있다.
‘산넘어 병학교’
1913년 박용만은 5,000명의 한인 동포들이 거주하는 하와이로 이주하고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다. 이듬 해 6월 그는 호놀룰루의 한 파인애플 농장을 임대하고 동포 청년들이 공동 경작하면서 ‘대조선 국민군단’을 창설하고, 같은 해 8월 군단 부속의 속칭 ‘산넘어 병학교’를 창립하면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 해에 전덕기 목사가 105인 사건 후 옥중 고문 후유증으로 소천했다. 입학한 130여 명 중 대부분이 대한제국의 ‘광무군인’들이었는데 조선 독립전쟁에 투입될 병력이 된다. 1915년 그가 아메리카 혁명사를 한글로 번역하고 출판하여 무장투쟁독립론에 불을 붙였지만 위의 한인군단은 1916년 농장주의 압력으로 문을 닫게 된다. 그러나 박용만은 하와이 국민회의 기관지인 신한국보 (후에 국민보로 개칭) 주필을 맡아 무장독립노선을 펼친다.
1917년 상해의 신규식과 조소앙 등과 함께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여 임시정부의 수립을 계획하였고, 뉴욕에서 개최한 약소국동맹회에 참석하여 조국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전개한 박용만은 이듬해 국제정세 홍보를 목적으로 ‘태평양시사’를 창간하고 주필이 된다. 1919년 3월 그는 호놀룰루에 국내 및 중국 등지의 독립군단과 통일을 꾀하기 위한 통일군사정부인 ‘대조선 독립단’ 하와이지부를 창단하고 ‘태평양 시사’를 인수하여 기관지로 삼았다. 독립운동의 방략에서 무장투쟁론의 박용만은 외교론의 이승만과 갈등을 겪으면서 ‘형제’에서 ‘정적’으로 치닫다가 1919년 5월에 하와이를 떠난다. 그는 그 해에 수립한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외무총장에 선출되나 부임하지 않고 중국 베이징으로 이동하고 신채호 등과 함께 ‘군사통일촉성회’를 결성하고 무력 투쟁의 독립운동에 가담한다.
소천
1927년 중국을 떠나 호놀룰루로 온 박용만은 인근 팔라마 지방에 우성국어학교를 설립하고 직접 초등국어교과서를 편찬하여 교재로 사용하였다. 1926년 이후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목적으로 북경에서 대륙농간공사 사업을 추진하던 중 1928년 10월 17일 그는 동족의 총을 맞아 비통한 죽음을 맞고 향년 47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일본과 미국, 하와이, 러시아, 그리고 중국을 넘나들며 쌓아온 나라 사랑이 1995년 그에게 추서된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담기기에는 너무나 컸다. 201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박용만 기념재단’이 설립되어 그의 업적을 기린다. damien.soh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