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웅 목사 (SEED선교회 연구실장)
신판석은 1882년경에 태어났다. 신판석(申判錫)은 신반석 또는 신홍균(申弘均)으로도 불렸다. 그는 1901년경에 결혼하였고, 2년 후인 1903년에 딸 메리가 출생했다. 이때쯤 그와 그의 가족은 황해도 평산에 거주했다.
하와이
21세의 신판석(Sin Pan Suk)이 그의 부인과 한 살 된 딸 메리와 함께 니본 마루를 타고 하와이에 도착했다. 이 때가 1903년 4월 30일이다. 오아후 섬의 에와농장에서 노동하면서 그는 에와교회를 섬긴 것으로 보인다. 신판석의 부인은 1904년 7월 31일에 에와 교회에서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연회의 감독이었던 조지 I. 피어슨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힐로와 올라
1905년 12월 위의 하와이연회는 신판석을 하와이 섬의 힐로와 올라에 거주하는 한인을 섬기는 목회자로 파송했다. 그가 파송되던 1905년 현재 올라교회의 교인수는 16명이었고 평균 출석수는 10명이었는데 1908년에는 세례교인이 24명이었고, 학습 교인이 42명이었음으로 그의 목회는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1908년 보고에 따르면 2명에게 유아세례를 주었고, 성인 2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그 해 2개 처의 주일학교를 개교하여 14명의 교사와 직원들이 130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이러한 성장세는 1907년 2월에 힐로에 한인교회당이 건축되고, 2개월 후 힐로 한인소학교가 설립하는 데까지 이른다.
힐로교회는 2016년 현재 하와이 힐로 시 와이아누엔누 애비뉴 374번지에 위치해 있어 111년의 역사를 빛내고 있다. 2016년 현재 목회자는 한인 1세지만 회중은 모두 외국인이서 영어 목회를 하고 있다. 1906년 제물포 내리교회를 담임하던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조지 H. 존스 목사가 하와이의 호놀룰루를 방문하였을 때 하와이한인감리교회 교역자들이 단체사진을 찍었다. 사진 중앙의 외국인은 조지 존스 목사이고 신판석은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서있다. 1906년 5월 올라 3마일 농장에서 신판석은 공덕화와 더불어 비밀 결사 단체인 ‘혈성단’(血誠團)을 창립하고 배일운동과 동족상애를 표방했을 때가 그의 애국심이 표출된 최초의 공식적인 모습이다.
호노카아와 쿠카이아우
그런데 1908년에는 신판석이 호노카아교회와 쿠카이아우교회로 파송을 받았다. 이 해에 그는 하와이연회 내 교육부에 소속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신판석은 1909년에도 위의 두 교회로 파송을 받았다. 1909년 연회보고에 따르면 그는 목회자 1년차 시험에서 93.5을 받아 상위권 목사 지망생에 속했다.
자유교회
신판석이 감리교회의 목사직을 사임하고 1909년 3월에 호놀룰루 시내 빈야드 스트릿의 퀸즈 골목(현 퀸즈병원의 일부)에 자유교회를 세운다. 1905년 한일합방이후 배일사상이 투철했던 감리교회 교인들이 친일파로 알려진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연회 감리사 J. W. 와드맨 목사로부터 독립하여 이름 그대로 감리교회에서 자유로운 초교파 교회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신홍균(신판석), 김유호, 림봉안, 정진상, 이내수 등 70명의 감리교회 교인들이 탈퇴하여 본 교회를 설립할 당시 출석 교인수는 352명에 이르렀다. 본 교회가 힘썼던 아동 한국어교육은 자유교회의 건립 사상인 배일사상의 연장선에서 보면 된다. 그런데 하와이연회는 하와이자유교회를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연회에 소속된 기도처로 소개하고 1910년까지 본 하와이연회 산하에 있는 것으로 문서화했다. 이후 1925년 6월 본 교회는 해체되고 다시 감리교회에 합동하게 된다. 이때까지 신홍균이 본 교회를 담임했다면 자유교회에서 24년간 목회한 것으로 보여진다.
부인교육회
1909년 4월에 10명의 부인들이 자유교회에서 ‘부인교육회’를 조직한다. 자유교회의 전도사 신홍균(신판석)이 이들의 모임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고, 자유교회에서 창립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때 이들 회원이 자유교회 교인이었을 가능성을 내다볼 수 있다. 본회는 여성개화를 목적하여 신학과 가정학을 공부하였지만 그 목적을 기독교 복음화와 더불어 조국 국권 광복으로까지 넓혔다. 본 회가 안중근 의사 재판 경비를 위하여 10달러를 기부한 사실에서 조국의 국권회복에 참여하였음을 쉽게 알게 된다.
건원절
1909년 건원절 행사에 신홍균이 나온다. 국민회관에 3, 4척되는 태극기를 걸고, 황금 대자로 건원절이라는 표를 건 가운데 무궁화 곡을 부른 후 40여명 학생이 국가를 부르고 국민회 부회장 이내수가 한국의 광복 사업을 격려한 후 자유교회 목사인 신홍균이 단상에 올랐다. 그가 ‘대한의 국혼을 크게 불러 만좌가 감개하였다’는 신문기사를 읽을 수 있다.
대조선독립단
1919년 대조선독립단의 총단장에 신홍균이 선출되었다. 본 회의 부단장에 강영효였고, 총무에 김윤배였다. 본 독립단은 1919년 3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박용만이 중심이 되어 350여명이 모여 설립할 때 발회식이 신홍균의 목회지인 자유교회였음을 주목해야 한다. 본 독립단의 목적은 조선 민족의 독립운동에 있었다. 박용만이 1919년 하와이를 떠나 중국 베이징으로 가서 군사운동에 노력하자 본 독립단은 본 군사 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후원하고 신문출판과 아동교육, 상조계조직 등 단원들의 단합을 위해 노력했다. 1928년 박용만의 피살 후 본 독립단은 1933년에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에 통합되었다.
75세 백발
1923년 내지 동포의 수재에 동정하여 의연금을 모금할 때 신홍균은 2원을 기부했는데 그의 기부에서 신홍균의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다시 읽을 수 있다. 이 신문기사 이후 1962년 1월의 경향신문에 75세 백발노인이 된 신판석이 소개되고 있다. 그는 한국 해군의 DE 72와 71함을 타고 하와이에 정박한 해군사관 생도를 맞은 하와이교포 중 한 사람으로 참석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한인교포들이 국민회와 동지회의 간판을 이웃에 걸어놓고 반목하였는데 1962년 1월 현재 이곳 7천여 명의 교포들이 ‘태극구락부‘라는 새 단체 아래 어울렸다면서 “우리 교포들은 공연히 마음에 담을 쌓고 지낼 것이 아니라 서로 터놓고 지내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말하면서 앞으로는 반목 없이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였다.
신메리 신메리가 1983년 향년 80세에 소천하면서 잊혀졌던 그녀의 아버지 신판석의 이름이 신문에 소개된다. 신메리는 하와이의 ‘대한소녀리그’의 서기로 활동하였고, 이원순과 결혼한 후 하와이 부인구제회 임원으로 활동했다. 한국국가보훈처는 그녀의 독립유공을 기념하여 신메리에게 독립유공자로 포상하였다. damien.soh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