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웅 목사 (SEED선교회 연구실장)
송헌주(宋憲澍)(1880-1965)는 고종 17년 1880년 10월 22일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 현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송헌길(宋憲吉), 송헌주(宋憲柱), 송헌수(宋憲樹) 그리고 송헌위(宋憲尉)로도 불렸다. 그는 1890년대 구한말 관직에 관심이 있던 청년들이 진학하던 한성관립영어학교를 다니다가 농상공부 주사로 하루 재직했다.
하와이
송헌주(H. F. Song)는 하와이 노동이민이 본격화되면서 미국계 이민회사 동서개발공사의 통역원으로 고용되어 1903년 12월 5일 도릭호를 타고 하와이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25세의 그는 안동 권 씨와 결혼하고 딸 송순이를 둔 아버지였다. 1905년 5월 다른 한인들과 함께 남학생 기숙학교 설립 제안을 하였고, 그 해 7월 박윤섭과 함께 교육회 결성을 주도하고, 그 해 8월 한인동포간의 상호 상조를 목적한 한인상조회가 결성될 때 회장으로 선임되어 그 해 10월 외부협판 윤치호가 귀국할 때 귀국선까지 환송했다. 1905년 12월에 개최한 미국 북감리교 제1회 하와이 연회는 지도력 있는 그를 포와한인교회 Korean Christian Advocate의 발행인으로 파송함으로써 그는 기독교 교역자로의 발을 성큼 내디딘다. 이 무렵 송헌주는 호놀룰루제일감리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보인다.
헤이그 밀사
1906년 4월 송헌주는 호놀룰루에서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와 미국 동부 뉴욕을 거쳐 1907년 미국 동부 버지니아 주의 로녹 대학 경영과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헤이그 밀사였던 이상설을 만나고, 박용만의 추천이 있어 고종이 1907년 6월 네델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파송된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밀사의 통역으로 윤병구와 함께 참여하면서 그는 5개월간 유럽 각국 지도자들에게 조선의 독립을 호소했다. 이로써 그는 조선 독립 운동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프린스톤 대학
1910년 송헌주는 중단했던 로녹 대학에 복학하여 1914년에 본 대학을 졸업하였다. 졸업식 때 그는 “한국과 기독교”라는 연설을 하였다. 그는 오늘날의 한국교회 성장은 한국 민족의 빠른 복음화에 대한 밝은 약속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극동 기독교화의 확실하고 유리한 근거를 설립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졸업할 때의 그의 영어 이름은 Hurn Joo Song이었다. 로녹 대학을 졸업한 1914년에 송헌주는 프린스턴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역사와 정치학을 전공하고 이듬 해 6월 문학석사학위를 취득하였고, 그 해 프린스톤 신학교에 입학한다.
하와이 제일한인감리교회
프린스톤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송헌주가 1916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제일한인감리교회 제 4대 목사가 된다. 홍치범 목사가 학업 차 교회를 떠난 지 9개월 만에 부임한 터라 송헌주의 첫 1년간의 목회는 활발했다. 그가 부임하던 1916년 3월 현재의 교인 재적수는 149명이었는데 반해 그의 목회 1년차인 1917년 3월 현재의 교인 재적수는 11명이 증가한 160명이었고, 주일학교 교사도 14명에서 7명이 증가한 21명이나 되었다. 이만하며 ‘호놀룰루한인감리교회’를 ‘제일한인감리교회’로 공식화할 만하다.
그런데 1917년 3월 하와이 연회 감리사 윌리암 프라이 박사가 보고한 대로 전년도와는 달리 영적으로 저조해가고 있는 한인감리교회 상황을 볼 수 있다. 하와이 한인사회가 1915년 이후 국제 외교를 통한 광복 쟁취의 이승만과 군사력을 통한 광복 쟁취의 박용만 간의 정치적 이견으로 인한 한인사회의 심각한 분쟁의 여파가 교회에까지 미치면서 교회 분열을 초래한다. 1918년 3월 현재 세례인 수가 31명에서 17명으로 줄어든 수치에서 그 징후가 역력하다. 이런 가운데 송헌주는 1918년에 사임한다. 그 해 3월 방화중 목사가 송헌주 목사의 후임으로 부임하였고, 사임 4개월 후인 1918년 7월 29일 이승만의 ‘신립교회’가 창립함으로 제일한인감리교회는 분열하였다.
한인여학원과 미국 정부 특수업무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연회는 1918년 3월 제일한인감리교회를 사임한 송헌주를 한인여학원(Korean Girls' Seminary)의 교사로 파송하였다. 본 한인여학원의 제 1회 졸업식에서 그는 축도 순서를 맡았다. 그런데 1918년 캘리포니아 연회에서 송헌주는 목사가 되는 4년차 과정을 밟고 있었다. 하와이 연회는 1919년에 그를 미국 정부의 특수업무(Special Service)로 파송하였는데 그 업무에 대해서는 확인할 바가 없다. 그는 1943년 미국 북감리교 가주연회 목사와 사진을 찍은 것으로 보아 교역자로서 교적을 둔 것 같다.
독립운동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이후 송헌주는 독립운동에 앞장선다. 그 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이 되어 임시정부의 재정을 후원하였다.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그는 1922년 북미대한인국민회를 발족시켰고, 1934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로스앤젤레스 재무부 재무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39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이 되었고, 1941년 8월에는 재미한족연합회 집행부 위원으로 선임되는 등 임시정부를 후원함으로써 독립 운동을 추진하였다. 100여 명 이상의 병력을 확보한 가운데 송헌주는 1942년 2월에 미국 캘리포니아 주 한인국방경위대 외교과 정위로 임명받아 대일 항전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 해 미국 전략청의 권유에 비망록인 “한국과 태평양전쟁”을 펴낸 그는 1943년에는 주미외교위원부 외교위원, 1944년에는 북미대한인국민회 총회장, 1945년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모인 연합국 회의에 파송된 임시정부 대표 등을 두루 거치면서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건국훈장
송헌주는 광복한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지 않았다. 1965년 7월 31일에 향년 85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그는 62년간 거주했던 타향을 떠나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갔다. 나성한인장로교회 권희상 목사의 주례로 장례식을 마친 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엔젤루스 로즈데일 공원묘지에 그의 육신이 안장됐다. 그의 묘비 중앙에는 태극기가 새겨져 있어 그의 애국심을 대변한다. 1917년 한인여학원에서 재혼한 송헌주의 부인 사순남(Mary Soonami Sah)은 1974년에 84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송헌주와 나란히 누워있다. 1995년 한국 정부는 송헌주의 독립운동을 인정하고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송헌주의 후손들이 한국정부로부터 받은 첫 보훈보상금 전액인 1만5천6백 달러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에 기부하였는데 본 기념재단은 재단 산하에 송헌주기념사업회를 발족했다. damien.soh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