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웅 목사 (SEED선교회 연구실장)
하와이 한인감리교회 초기 교인 명단에 따르면 김영식은 1871년경에 강화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896년에 미국 북장로교 내한선교사였던 33세의 제임스 S. 게일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서울 연동교회에 등록한 25세의 장로교인으로 보면 된다.
카우아이 섬
김영식은 하와이 이민선에 몸을 싣는다. 인천을 떠난 그가 1904년 1월 9일 ‘아메리카 마루’에서 내려 호놀룰루를 밟았다. 당시 그는 기혼자였으나 부인을 사별한 33세의 홀아비였다. 그런데 같은 날 같은 선박을 이용해서 호놀룰루에 내린 동명이인의 김영식이 있었다. 그는 대구에서 태어난 25세의 기혼자였다. 김영식은 하와이에 오면서 감리교인으로 변신하여 1904년 카우아이 섬의 카파아교회를 목회했을 것으로 보인다. 1904년 말 현재 본 교회는 33명의 등록교인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가 1905년 에와로 이명 했는데 이는 그의 목회적 사역을 목적한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연회의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면 된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해 12월에 이명 해야 했다. 카파아교회에서의 그의 목회기간은 2년으로 추정된다.
오아후 섬 에와교회
위에서 언급한 대로 1905년 12월에 개최한 제1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연회는 김영식을 오아후 섬의 에와교회의 목회자로 임명했다. 1905년 현재 에와교회는 135명의 등록교인에 출석은 200명에 이르렀는데 하와이 한인교회 중 으뜸이었다. 1904년경의 에와교회 교인수 56명과 비교할 때 거의 250%의 성장을 이루었고, 출석수를 비교하면 400%에 육박하는 성장을 달성했다. 많은 수의 한인노동자의 유입에 기인했을 것이다. 1905년 현재 하와이 전역에 거주하는 한인 기독교인의 주일 평균 출석수는 605명이었는데 에와교회의 출석수는 전체 출석수의 1/3에 해당한다. 김영식은 1906년까지 1년간 에와교회를 섬겼다. 그의 가장 큰 명예는 신축 예배당에서의 대형 교회 목회였을 것이다. 1905년 5월 1일자 하와이에서 간행된 한 신문은 에와한인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고 헌당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그 해 4월에 건축한 본 예배당은 호놀룰루를 제외한 하와이에서 세워진 최초의 한인 예배당이었다, 미국 북감리교 내한 선교사였던 아더 노블 목사가 그 해 9월에 하와이를 방문하였는데 하와이 내의 가장 큰 교회이자 신축 예배당을 구비한 에와교회를 방문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1906년 7월에 하와이를 내방한 조지 H. 존스 선교사도 본 교회를 방문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렇다면 김영식을 만나야 했다. 1905년 5월 3일에 오하우 섬의 에와 농장에서 에와 친목회가 조직되었다. 정원명, 김성권, 윤병구, 이만춘, 김규섭, 강영소 등이 발기하고 전원명이 회장이 되어 항일운동, 일화배척 및 동족 상애를 목적했고, 이듬 해 5월에 속쇄판 친목회보를 발행하였다. 김영식이 에바 친목회의 발기인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하더라도 본 친목회의 중요인물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1906년 9월 에와교회는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의 생신을 맞이하여 생신 축하 행사를 치렀다. 이듬 해 7월에 일본이 헤이그 특사 파송의 책임을 물어 그의 아들 순종에게 왕위를 양위시켰는데 황제로서는 마지막 생신축하가 된다.
오아후 섬 카후쿠와 와이아루아
김영식은 1907년에는 오아후 섬의 카후쿠와 와이아루아에 파송되었다. 그는 1908년에는 와이아루아교회만 섬겼고, 카후쿠에는 김영식을 대신한 임시 교역자가 공급됐다. 1908년 하와이 연회록에 따르면 와이아루아교회는 그가 섬겼던 에와교회와 비교할 때 무척 왜소했다. 1908년 현재 와이아루아교회의 세례교인은 6명이었고, 학습교인은 24명이었으며, 유아세례교인은 2명이었으며, 6명의 주일학교 교사가 30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해 와이아루아교회 교인이 한 해 동안 드린 헌금액수가 27불이었는데 이중 흑인보조회로 2불, 미국 성서공회로 2불, 부인해외선교부로 2불 그리고 부인내지선교회로 4불이 지정되어 김영식의 다양한 선교 관심을 읽을 수 있다. 그를 대신하여 임시 목회자를 파송한 1908년의 카후쿠교회는 6명의 세례 교인에 1명의 학습교인이 있었고 2명의 교사가 20명의 교회학교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1909년에는 김영식이 와이아루아와 카후쿠 뿐만 아니라 라이에까지 선교의 폭을 넓혔다. 1909년의 와이아루아교회의 경우 17명의 세례교인과 30명의 학습교인, 4명의 유아세례교인이 있었고, 2개의 주일학교에 5명의 직원이 31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으며, 유준K가 1909년 와이아루아의 권사로서 김영식의 목회를 보조했다. 당시 본 교회는 600불상당의 예배당을 소유한 자립교회였다. 1907년 2월 5일 마우이 가일루아 농장에서 거류 동표의 공동결의로 ‘의성회’를 조직했다. 회장 김재규를 중심으로 항일 운동과 일화 배척을 목적한 ‘의성회’에 김영식도 가담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해 7월에 마우이 가히기아 농장에서 동회를 변경하여 ‘국민단합회’가 조직될 때 김영식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건호를 회장으로 선임한 본회는 대동단결과 일화배척을 목적으로 내걸었다. 그해 8월에 마우이 하마구아복구 농장에서 조직된 ‘부흥회’도 김영식의 손실을 무시하지 못했을 것으로 본다. 전백전과 서성년 등이 발기한 부흥회는 인재양성과 일화배척을 걸고 서성년을 회장으로 선임했다.
카우아이
1910년에는 김영식이 카우아이 섬의 두 지역의 목회자로 임명되었다. 이곳의 케아리아, 카파아, 킬라우에아 지역과 더불어 루후에와 하나마우루 지역이 그의 목양지였다. 이들 목양지의 몇 교회는 190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04년 교인 통계에 따르면 케아리아교회는 16명, 카파아교회는 33명, 루후에교회는 12명, 그리고 하나마우루교회는 17명의 등록 교인이 있었다.
하와이
김영식은 1911년에는 하와이 섬의 호노카아와 쿠쿠이하에레 지역을 맡았다. 그는 1912년까지 2년간 이곳에서 목회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연회 감독 존 W. 와드만 목사는 1912년에 김영식이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연회에서 떠난 것으로 보고하였다. 김영식이 1912년 이후 서울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2년 후인 1914년에 김영식은 서울 마포의 삼개교회로 파송 받는다. 삼개는 삼밭이 있는 포구 또는 세 개의 포구라는 의미인데 오늘날의 마포다. 삼개는 서강에 이어 조선시대 수상교통망이었다. 이곳에 삼개교회가 있었던 것인데 김영식은 이곳 교회를 목회했다. 삼개교회가 오늘날의 마포중앙교회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전덕기 목사가 상동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인 1912년 9월 11일 경성부 룡산면 사촌리(새푸리) 양미리암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여 상동교회의 다섯 번째 지교회가 된 사촌리교회가 바로 마포중앙교회다. 8년간 하와이 선교를 담당했고 삼개교회로 부임했던 김영식의 마지막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damien.soh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