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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 전 한인 선교사

홍치범

손상웅 목사 (SEED선교회 연구실장)

홍치범은 1883년경에 평양에서 홍인택과 아이라 T. 홍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임정수와 더불어 평양 남산현교회를 다녔다. 1903년 12월 5일 도릭호로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그는 기혼자로 기록되어 있다.

하와이

1905년 제1회 감리교 연회는 홍치범을 마우이 섬으로 파송했다. 1906년에는 마우이 섬의 스프렉클스빌과 와이루쿠에서 사역했고, 1907년에는 스프렉클스빌과 파이아에서 목회했다. 그런데 1908년에는 목회자 파송 명단에 그의 이름이 없고, 그가 섬겼던 위의 세 농장 지역 이름도 없다. 1909년에는 스프렉클스빌과 햄쿠아포코를 섬기더니 1910년에는 스프렉클스빌 이외에 하나, 키파후루 등 새로운 두 지역을 맡아 권사 2명과 함께 사역했다. 1911년 홍치범은 오아후 섬으로 전임하여 와이아루아와 모쿠라이 지역을 담당했다. 그는 피곤을 모른 채 말을 타고 십여 개처 이상의 전도소를 순회하며 한인 이주자를 위로하고 전도하여 한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농장주들도 극구 그의 선교 정신을 찬양했다.

홍치범은 다른 전도사처럼 지방회 목사 교육반에 적을 두고 1년급으로 김영식, 현순, 이경직, 민찬호, 윤병구와 함께 공부했다. 1910년 그는 민찬호, 김영식, 이경직, 김유순도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다. 민찬호가 학업을 위해 1911년 3월 가주로 떠남으로 그의 후임으로 홍치범이 펀치볼 스트리트의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다. 1912년의 교인 수는 116명이었고 주일학교 학생수가 180명이었으며 교사는 11명이었다. 이듬해 교인수와 주일학교 학생 수는 약간 증가한 125명과 190명이었는데 반해 교사 수는 전 해와 동일했다. 1914년의 경우 전 해에 비해 조금 더 증가하여 교인수와 주일학교 학생 수 그리고 교사 수가 각각 134명과 198명 그리고 13명이었다.

1913년 홍치범은 새 교회당 건축을 계획했다. 300불을 들여 임대건물을 2배로 확장했지만 주일예배 공간으로는 좁았던 것이다. 한인과 주부첸(Zubuchen) 부인 등을 통해 2천불을 모금한 상태에서 1913년 어느 토요일 오후 머릿돌을 놓는 예배를 드렸으나 학업을 위해 가주로 떠남으로 본 예배당 신축은 보지 못했다. 총건축비 6,922불 중 선교부 보조금이 2,391불이었을 뿐이다. 홍치범이 마우이 섬 사역을 할 1908년, 공립신보는 그를 마위 싀픽골(마우이 섬 스프렉크슬빌)의 공립신보 발매소 사무원으로 임명한다. 공립신보 구독자들이 본보 대금을 마련해 발매소 사무원에게 전하고 신문과 관련한 모든 일을 교섭할 수 있었다. 신문이라면 1913년 홍치범이 출판인으로 관여한 한인 신문인 ‘코리안 크리스챤 아드보케이트’가 있다. 이듬해 그는 홍한식에게 이 신문을 인계하고 신문에서 손을 뗀다. 1912년 홍치범은 한인기숙학교와 관련된 난처한 문제에 봉착한다. 그해 J.W. 워드만 목사가 일본 영사로부터 한인구제금조로 750불을 받았는데 1910년 한일합방이후 일본에 대한 적대감으로 한인들의 격렬한 항의가 제기된 것이다. 그는 이 돈이 한인기숙학교 보조금이고 본 학교는 미국감리교회가 관리함으로 한인사회와는 별개의 문제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한인사회는 학생들을 동맹 퇴학시키는 데까지 이르렀다. 1913년 이승만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자 워드만 목사의 제안에 따라 이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이에 워드만은 그를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으로 임명하고 교회 사업에 관한 자문을 구하기에 이른다. 이승만은 1913년 이후 3년간 호놀룰루한인감리교회의 교육 책임자로 역임하는데 홍치범과는 1년 정도 함께 교회를 섬긴 셈이다. 1905년 11월부터 호놀룰루한인감리교회가 발간한 ‘포와한인교보’가 1912년에는 매달 700부를 인쇄하여 배포했는데 1911년 이후 연간 1달러의 구독료를 제대로 걷지 못해 재정적 난관에 부딪혔다. 1913년 8월 이승만이 한인중앙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자 교회재정에도 관여하면서 폐간 위기에 있던 포화한인교보를 둘로 나누게 된다. 포와한인교보는 주일공과를 위한 교회보로 발간하고 1913년 9월부터 주일공과 이외의 논설, 하와이 교회 및 감리교 청년회 소식, 독자 기고문 등의 기사를 실어 ‘태평양잡지’가 발간되었다. 포화한인교보는 교회재정으로 600부를 인쇄하여 각 교회에 배포하고 태평양 잡지는 이승만이 모금하여 포와한인교보 인쇄기로 1300부를 발행하여 배부했다. 엎랜드 성경공부반 홍치범은 1912년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의 외교원으로도 활동한다. 홍치범은 1915년 공부하기 위하여 하와이를 떠남으로 그의 하와이 사역은 약 10년이 된다.

나성

홍치범은 1916년에 남가주대학교신학대학 특수반에 입학한다. 그 1년 전인 1915년 그는 중가주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회를 순회하며 돕고 있었다. 민찬호가 1919년 하와이로 돌아가자 그가 목회하던 나성한인교회를 홍치범은 순회목사로 사역하였다. 당시 나성 거주 100여명의 동포 중 40여명 장년이 본 교회에 출석했다. 그가 부임한 1919년 11월자의 신한민보는 ‘교회당을 이전보다 일층 더 편익하게 설비하고, 교회 직원을 선출했다’고 보도한다. 1919년 나성 인근 어플랜드한인교회 감사제에서 어플랜드와 클레몬트에 거주하는 교우들이 모인가운데 설교했다. 회중의 열성이 평년에 비하여 일층 더 깊은 감상을 발표하여 희비가 교차했다.

1922년 홍치범은 중가주의 디뉴바한인교회에 파송 받았으며, 1924년 2월에는 나성교회 목사가 된다. 그런데 본 교회가 1912년 이후 나성한인감리교회와 합동하여 장로교회로서 유지되었는데 1920년대에 이르러 따로 감리교회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1924년에 이르러 교회 내 문제로 표면화되면서 그 해 10월에 자유교회가 설립되었다. 본 교회는 1930년에 감리교회가 된다. 홍치범이 얼마 동안 나성교회를 사역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으나 교회에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협조했다는 기록을 읽을 수 있다. 홍치범은 1919년 이후 나성에서 잡화상을 경영했는데 그 해 9월에는 240원의 수입을 달성했고 1923년에는 자본금이 1,000달러에 달했다. 1919년 나성한인교회가 월 5불의 사례비를 지불했지만 그는 오늘날의 자비량 선교사라고 할 수 있다. 홍치범은 사회활동은 1916년 그가 클레어몬트 학생양성소 중수에 1원을 의연하면서다. 1918년 4월 복음청년회 주최 특별 토론회에서 ‘모범적 인물은 그 인격에 있지 않고 학식에 있음’이라는 문제에 그는 가편에 섰고, 부편에는 한승곤 목사가 맡았으며, 그 해 10월 대황조 탄강일 경축식이 나성 국민회 회관에서 있었을 때 홍치범은 마지막 순서인 축사를 담당했다. 이듬해 4월 홍치범은 필라델피아 자유대회에 국민회 나성 지방회 대표로 참석했고, 그해 7월과 8월에 독립의연금 10원을 납부했으며, 그 해 7월 대한민국 적십자회에 5원을 의연했다. 그 해 12월 엘 센트로의 한인 노동자들이 성탄절을 맞아 서울 제중원의 신음하는 환자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15달러를 보낼 때 그를 통하여 전달하였다. 1920년 3월 나성에서 홍치범의 사회로 독립선언기념 경축이 있었는데 그가 개회사를 진술했고 각처에서 들어온 축전을 소개했으며 중앙총회장 윤병구의 연설 초본을 낭독했다. 윤병구가 1921년 12월에 다뉴바 한인교회에서 42명과 함께 임시정부를 개조하려는 국민대표회의 개최에 반대하고 이승만과 임정에 대한 지지운동을 펼치기 위하여 시사연구회를 조직할 때 홍치범은 간사로 선임됐다. 본 회장은 윤병구였다.

하와이

홍치범은 1927년 5월에 다시 하와이로 이주한다. 신한민보 1930년 7월 3일자에 는 그가 2년간 마우이 섬의 파이아서 목회를 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마우이 섬에는 1926년 이후 1930년까지 임준호가 목회를 하였다. 1930년 말 홍치범은 민찬호와 최창덕 등 두 명의 목사와 함께 박동환이 담임으로 있는 와이아와 교회를 방문하였는데 이후 교회가 확장되었고, 본 교회는 그 해 12월 총 공사비 5천원으로 4백 명이 들어가는 예배당을 건축할 예정을 하면서 한인 교우들이 1천원을 헌금하고 총회가 4천원을 보조했다. 그런데 이듬해 11월에 교회 분규가 발생해 홍치범은 위의 두 명의 목사와 중재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홍치범은 1911년 호놀룰루 웨슬리홈에서 이승만의 하와이한인여학원 출신인 김애경과 결혼식을 올렸고, 제임스, 나오미, 매튜 등을 낳았다. 민찬호의 부인 몰리 홍은 홍치범의 여동생이다. 홍치범이 신한민보에 이름을 올리기는 1945년 7월이 마지막인데 그의 삶의 마지막을 찾지 못했다. 홍치범은 말년에 호놀룰루한인감리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damien.soh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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