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장로교회는 성경적인 청교도 신앙을 기초로 하는 개혁주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근래에 이르러 교단의 구분이 점차 희미해져가고 성경적 예배 중심보다는 교회 성장 중심의 방식을 추구하는 교회로 바꾸어지면서 예배의 틀도 변화되게 되었다. 교회 연합사업이라는 명분 아래 순수한 실천적 청교도 유산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예배 형식과 삶에 있어서 장로교회만의 아름다운 색채를 찾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교회의 예배가 무엇보다 청중의 현대적 감각에 맞추어가는 예배로만 바뀌어지는 것은 현실과 문화의 적용이란 차원을 떠나서 예배의 모습이 인본주의화 되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참된 예배에 대해 교회사적으로 추구해 나아갈 때, 가장 성경적인 예배를 위한 전형으로 우리는 청교도들의 예배를 내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청교도들이 드렸던 예배의 원리와 내용과 형식을 살펴보면서 오덕교 교수의 “청교도와 교회개혁”, “언덕위의 도시”, 서청원 교수의 “청교도 신학과 신앙”. 힌슨(Edward Hinson)의 “청교도 신학”과 그 외의 자료들을 인용하여 이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1. 청교도 예배의 원리
1) 예배의 통일성
청교도 예배는 무엇보다 예배의 통일성에 강조점을 두었다.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예배 형식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통일된 예배 형식이 없어지는 때에 이런 원리가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는 보편적 교회의 통일성이 사라지고 개교회 중심의 예배의식이 뿌리 깊어지고 있지 않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는 주님의 교회로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 된 교회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형식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의 통일성을 필요로 한다. 성경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이 다양하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장로교 헌법에서는 예배 모범이라는 예배의 규정적 원리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도외시하고 실제 목회현장에서는 예배의 실용적인 변형에 익숙해가고 있지는 않는가?
교회는 다시 청교도의 정신을 따라 예배의 통일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청교도들이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예배 지침을 작성할 때 서문에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을 물려받아 자신들의 양심과 다른 개혁교회들의 기대치에 부합하는 통일된 공예배 지침서를 만들게 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진지하게 부르고 의지하며, 혈과 육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가지고 수많은 의논을 거듭한 끝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많은 예전과 의식들을 겸비하고 있었던 이전의 예식서(liturgy)를 폐지하고, 일상적인 때나 특별한 경우에 사용될 공예배의 모든 요소들에 대하여 다음의 지침서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이 지침서에서 공예배의 모든 요소들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바와 하나님 말씀의 일반적인 원칙에 부합하는 것들로, 깊이 생각하고 정한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예배의 갱신을 말하는 자들이 과연 성경적인 원리와 근거를 내세우는가? 아니면 사람들의 현실적 요구사항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가? 과거의 하나님께서 귀중하게 사용하셔서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한 예배의식이 오늘날 사람들의 욕구가 변화하면서 정지되어야 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올바른 성경적 예배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2) 성경적인 예배
가) 사람의 감정을 만족시키는 예배는 어떠한가?
올바른 성경적인 예배를 이해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따르는 개혁파 장로교회가 지켜온 예배 원리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만일 그 예배가 인간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수단을 동원한 예배이며,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희열을 느끼며 즐겁게 만족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중심적인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예배는 사람들이 드리는 것으로서 예배자의 느낌과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를 받으시는 예배의 대상자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뜻이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예배자의 행위에 중점을 두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기뻐하는 성도의 합당한 반응이 예배이기 때문이다. 예배의 핵심은 당연하게 예배자가 아니라 예배를 받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중심을 두어야 한다.
나) 누가 참된 예배자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우리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신 것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놀라운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랑하는 표현이요 하나님께서 명하실 뿐 아니라 기뻐 받으시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그에게 경배와 감사와 찬송을 돌려야 한다. 구원받은 자들이 은혜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이다.
다) 그러면 미신자들이나 회심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은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는가?
미신자들이나 회심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이 예배에 참여한다고 해서 그것이 경건을 헤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예배자의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배자들은 미신자들도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신자와 미신자를 물론하고 모든 이들이 그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과 찬양과 감사를 풍성히 나타내는 것이 참된 예배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미신자의 예배 참여는 구경하는 것일 뿐, 그들이 참된 예배자가 될 수는 없다.
3) 성도들이 함께 드리는 공적 예배
예배는 규정적으로 정확한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적용적인 면에서 공적인 예배와 사적인 예배로 나눌 수 있다. 개인이나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를 사적인 예배라 한다면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여 지역 공동체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공적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성도들의 개인적인 예배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주님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더 사랑하신다. 그렇기에 이것이 청교도들이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의 공적인 예배를 중시했던 이유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중심은 하나님께 대한 송영과 영광과 찬양과 존귀와 경의를 표하는 예배자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청교도 목사인 스데반 차녹(Stephen Charnock)은 요한복음 4장 24절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예배는 하나님의 뛰어나심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실제적인 사상들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행동이다 또한 예배는 의를 사모하고 경외하며,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매혹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포용하며, 이 가장 사랑스러운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 그분에게 자기 자신의 모든 애정을 바치는 의지의 행동이다” 이런 일상생활의 참된 예배자의 모습은 참된 예배를 통해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적 예배의 회복이 진정한 교회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올바른 예배는 올바른 기독교 생활, 기독교 문화를 이루는 기초석이라고 할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분의 성품에 맞는 구별된 삶을 이루는 것이 기독교 문화를 더욱 활성화하고 성경의 교훈에 충실한 문화를 창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로부터 기독교 문화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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