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석 목사 (NY 부르클린 제일교회)
들어가는 말 청교도들의 신앙은 개혁주의 보수신앙을 가진 이들의 모든 신앙내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현대 기독교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문학작품과 비평가들의 부정적인 언급 때문에 청교도란 말이 조롱하는 의미로 쓰일 때도 있다. 존 밀턴의 ‘오 나이팅게일’과 ‘리시디다스’에서 돈벌이 목사에게 비난하는 장면을 통해, 또한 나다나엘 호오도온은 ‘주홍글씨’에서 청교도의 외식과 냉정함과 뻔뻔함을 풍자하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세계사에서도 청교도적 공화정과 세계관에 대해 무자비한 필치로 오해되고 편협 된 비평하고 있으며 인터넷의 정보들도 비판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필자는 이런 편견과 오해를 살펴보며, 동시에 그들의 풍성한 신앙과 삶, 그리고 신학을 중심하여 영국에서의 청교도들의 기원과 배경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본 내용을 전개하면서 청교도에 대해 깊이 연구한 학자들의 책이나 인용에 대해서는 자세한 출처보다 이름만 사용한다.
1. 청교도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청교도라는 말이 “신앙적 위선자”를 말하거나 “딱딱하고 냉정한 인간”을 비유하여 말할 때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또는 “성적으로 억압된 재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셰익스피어는 “다른 사람들의 흥과 환희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을 말할 때 그 대용어로 청교도를 사용하기도 했다. 청교도에 대한 대중적인 이미지는 제임스(James) 1세가 아들 찰스(Charles)에게 권고할 때 얼마나 편파적이고 왜곡되었는지를 표현한다. 제임스 1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와 국가의 악질 전염병인 청교도를 조심하라. 청교도는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서약이나 약속이 소용없는 사람들이다. 난동과 중상 외에 토해 내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며, 미친 사람들로서 함께 있으면 아주 악명 높은 도둑들과 함께 있을 때보다 더 큰 배은망덕과 거짓말과 새빨간 거짓 맹세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 현대에 이르러서까지도 청교도는 참된 경건에 대한 관심보다 “공적인 종교성을 가지고 자신만 고집했던 광신자 집단”으로 매도되고 있다. 이런 강한 오해와 편견은 끈질긴 힘을 갖고 계속되어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청교도에 대한 정확한 의미와 삶의 내용과 신앙과 신학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2. 청교도란 이름에 대한 의미
어떤 사람들은 청교도라는 말을 재세례파와 같은 지독한 분리주의자들을 가리키는데 사용했다. 영국혁명이 진행 중일 때, 사람들은 이 청교도라는 말을 교회 개혁을 추구하는 애국적인 비국교도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했다. 청교도가 되는 것을 자랑하는 자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현대 역사가들은 청교도 운동이 17세기 영국과 뉴잉글랜드에서 상당한 힘을 발휘한 참된 운동이었다는데 동조한다. 그러나 청교도는 엄밀하게 급진적인 개신교 비국교도들을 의미하는 말로 한정되어서는 안되고, 정치적이고 교회적이고 종교적인 차이들을 넘어선 공통적인 특징들에 따라 하나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펼친 더 광범위한 운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청교도는 그 단어자체가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청결하고 활력적인 신앙, 삶과 사역을 통해 보여준 사고방식, 역동적인 신앙문화를 보여주었던 사람들이다.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청교도 운동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구원받도록 택하심을 받았다는 사람들의 신념에서 나온 운동이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도 있다. 청교도운동은 16세기 유럽에서 신앙적, 사회적, 정치적 사건들을 기반으로 일어났으며 영국에 개신교 종교개혁이 시작된 시점을 청교도 운동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다.
3. 청교도 운동의 간략한 역사
1)에드워드 6세(1547-1553) 치세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시작된 개신교의 원리들이 급속도로 유럽 전역으로 파급되어 헨리 3세(1509-1547) 때 영국에 도달했다. 영국 왕은 종교개혁에 대한 요구를 로마카톨릭 교회와 분열하는 계기로 삼았고, 그래서 왕은 합법적으로 이혼하여 재혼을 하고, 아들 후계자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헨리 3세의 병약한 아들 에드워드 6세(1547-1553)의 짧은 치세동안 루터와 칼빈의 신학이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 대주교를 통해 영국 교회에 도입되었다. 크랜머 대주교는 자신의 작품인 “설교학”(1547), “공동기도서”(1552), “42개조 신앙조항”(1553) 등을 통해 루터와 칼빈의 신학을 영국에 소개했지만 이 개혁은 메리 여왕(1553-1558)의 피의 통치 기간으로 인해 완전히 반전되고 말았다. 메리 여왕은 라틴어 미사를 다시 시행하고 토마스 크랜머를 비롯해서 270명의 개신교인들을 처형함으로 영국의 로마 교황에 대한 충성을 노골화했다.
2)엘리자베스 여왕(1533-1603) 치세 엘리자베스 여왕이 1558년에 보좌에 오르자, 메리 여왕의 박해를 피해 유럽으로 망명했던 사람들이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시작된 개혁이 지속될 것이라는 소망을 품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이 내린 통일령(1659-1662)으로 인해 카톨릭 사상의 잔재인 성의를 입는 의식이나 그 외 카톨릭 의식들을 영국에서 근절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를 절반만 개혁하는 상태로 머물게 했다. 비록 엘리자베스 여왕이 크랜머의 “공동기도서”와 “42개조 신앙조항”을 엄격히 이행하라는 요구를 했지만 대륙의 개혁파 교회들에서 선포되고 있던 성경적인 설교 양식에 대한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는 1570년 케임브리지 강좌를 통해 개혁의 길은 제네바에서 시행된 더 엄격한 장로교 모델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다. 그러나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긴 엘리자베스 여왕은 다시 영국 국교회에 대한 신봉을 강화시키는데 관심을 돌렸다. 1593년에 발효된 ‘청교도 반대법’을 통해 난동죄와 불충성의 죄명목으로 수 백명의 청교도 목사의 직무를 정지시켰다. younsuklee@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