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텍스트에 의한 레퀴엠과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Ein deutsches Requiem)을 중심으로” VIII
나가는 말
라틴 텍스트를 가지고 그동안 전통적으로 작곡되어 불린 레퀴엠은 분명 죽은 자를 위해 드리는 미사에서 출발한 연주용 음악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잠재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산 자들을 향한 삶과 죽음에 대한 외침이다. 즉, 이 음악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산 자들이 최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만 하는 무서운 경고를 보며 앞으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살아내야 하는지 고민하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브람스의 레퀴엠은 더 없이 오늘을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구체적으로 복음으로 인한 진정한 복에 대한 가르침, 그리고 소망과 위로를 말하고 있다.
이 두 종류의 레퀴엠은 텍스트의 접근 방법과 동기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목적은 동일하게 인간의 삶과 죽음 사이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복음으로 인한 진정한 소망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선명히 제시하고 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존 켈빈(John Calvin, 1509-1564)이 당시 교회 예배에 음악을 적용하는 접근 방법은 서로 판이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관심은 동일하게 음악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이 일점일획이라도 희석되거나 의미 없이 표현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못했다. 결국 이들이 가지고 있던 교회음악 철학이나 찬양관은 유사했고 이들이 펼쳤던 교회음악의 궁극적인 목적은 동일했다. 즉, 목적은 같았지만, 접근했던 방법이 서로 달랐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위 두 종류의 레퀴엠의 방향은 판이하게 다르게 접근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산 자들을 향한 울림이라 말할 수 있다.
오늘날 개신교(Protestant) 예배음악에 있어서 레퀴엠이라는 장르가 아직도 로마 가톨릭의 전통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혹 그것을 도외시하고 배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 우리가 분명히 직시해야 할 것은 개신교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복음이 전파된 1세대 크리스천의 전통을 이어 초기,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복음의 전통을 유지했던 서방교회에서 파생된 기독교이다. 개신교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중세 교회가 시간이 지나면서 비뚤어진 신학과 신앙 노선이 그들과 너무다르다 하여서 모든 전통까지 다 싸잡아 바꾸려 하는 것은 큰 무리가 될 수 있다.
서양 음악사에 있어 개신교의 출발이 된 마틴 루터의 종교 개역 이전인 중세,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다성 음악은 카톨릭 예배음악의 뿌리요 전통이다. 그러므로 그 시대 음악을 외면하고는 개신교 음악을 절대 논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당시 가톨릭의 음악이 개신교 교회음악의 뿌리가 된 셈이다. 그렇기에 가톨릭의 음악에 있어 좋은 전통들 즉 삼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복음을 말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수용해야 할 것이고, 혹 바뀌어야 할 것은 수정하여 바르게 사용해야 하는 것이 타당한 일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레퀴엠이라는 말을 한국어로 표현할 때 하나는 “진혼곡”이요 다른 하나는 “장송곡”이라고도 표현한다. 하지만, 이 두 단어는 레퀴엠(Requiem–Eternal Rest)이라는 원래 의미와는 다르게 표현된 단어들이다. 얼마 전 필자가 미주에 있는 여러 기독신문 기자들과 함께 레퀴엠 장르를 가지고 세미나를 가진 적이 있다. 이때 필자가 레퀴엠이라는 단어를 직역하여 설명하자 어느 기자가 필자에게 던진 질문은 우리가 사용하는 진혼곡, 혹은 장송곡이라는 말은 레퀴엠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그 말은 적절치 않고 그냥 “레퀴엠”이라는 말로 쓰는 것이 무방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필자는 그 말에 동의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필자는 이 논제를 연구하고 마무리를 하면서 현대 예배자들이 고전음악의 한 장르인 레퀴엠을 대할 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지혜를 제안한다. 첫째는 분별력의 지혜이다. 솔로몬이 구한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라는 바른 분별력의 지혜를 사모해야 한다. 여러 작곡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레퀴엠을 가지고 내 생각과 전통의 잣대를 가지고 섣불리 불가지론을 제시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이 바라는 레퀴엠 찬양의 모범을 잘 판단하여 분별력있게 받아들여야 한다.
두 번째로 서로 다름을 이해하는 지혜 즉,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말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것이 유익한것이 아니요…”(고전 10:23-24) 라는 교훈을 기억하며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지혜를 사모해야 한다. 카톨릭의 예배 전통에서 나온 라틴 텍스트의 레퀴엠이기에 개신교의 전통과는 다르다고 무조건 도외시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비록 전통에 근거해 나와 다른 방향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예배음악의 목적에 바른 잣대로 평가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현대 예배자들이 인생의 삶과 죽음 사이에 갖게 되는 확고한 부활 신앙을 갖는 지혜이다.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복음을 갖고 소망 가운데 사는 현대 예배자들은 레퀴엠에 담겨있는 삶과 죽음 사이에 벌어지는 다양한 텍스트들을 가지고 확실한 부활 신앙을 발견해야 한다.
D. L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 선생님이 그의 인생 말년 어느 날에 “머잖아 어느날 내가 죽었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요. 믿지 마십시오. 그 때 나는 그 이전에 어느 때보다 생생히 살아있게 될 것이오.”라고 말하며 세상에서의 삶과 죽음 사이에 나타날 상관성에서 느낄 본인의 감정을 이야기했다.
또한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가 1945년 4월 어느 날 두 명의 호송병이 그를 교수대에 데려가려고 오자 감방에 있는 다른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이제 나는 끝이네. 하지만 내게는 이것이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본회퍼가 바라본 이 세상에서의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에 나타날 현상은 한치의 의심도없이 또 다른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단언하며 부활 신앙을 확인하고 있다. 이들과 같이 복음을 통해 이 세상에서 마지막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야 한다.
현대 예배자들이 위와 같은 세 가지 지혜(바른 분별력, 서로다름, 확고한 부활 신앙)를 가지고 레퀴엠 장르를 이해하며 묵상하고, 또 그것을 찬양할 때 그 안에서 깊이 미소짖고 있는 하나님이 다가오셔서 찬양을 기뻐 흠향하실 것이다. The End.
연주실황 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8BndsQ2FY_k&t=3079s
해설이 있는 연주 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a-ppn6lPjoM&t=2280s
iyoon@wmu.edu
11.23.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