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택은 1873년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아내 송 부인과 아들 용새와 함께 상수구박에서 거주하다가 32세가 된 김원택이 29세 부인과 8세 된 아들과 함께 1905년에 하와이 노동 이민선 시베리아호에 승선하였다. 그들은 그해 5월 18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그와 그의 가족은 초기 하와이 감리교인 명단에 없으므로 그때까지 세례 교인이 아니었던 것 같으나 자녀가 있었으므로 교회에 출석하였을 것으로 본다.
김원택은 가족과 함께 상항에 입항한 후 바인나를 거쳐 1908년에 중가주 프레스노에서 여관을 신설했다. 프레스노는 부시(富市)라고도 불렀다. 그해 3월에 그가 정운화에게 식비 20여 원에 이불까지 주어 일하러 보냈는데 야간 도주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해 8월에 조명렬이 프레스노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재정이 부족하여 김원택의 여관에 머물며 치료하였는데 김원택이 1달러를 후원하였고, 그해 11월에 선천에 있는 대동 보육원에 10달러를 기부하였다. 그의 기부는 이듬해에도 계속되었다. 이듬해 6월에는 신한민보에 5달러를 기부하였고, 그해 9월에는 한국승이 질병에 걸렸는데 주선하여 입원하게 하였고, 그를 위해 한영호가 20여 달러를 후원하였으며, 그해 11월에는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이동하다가 런던에서 곤란을 당한 이홍주와 민병기를 위하여 1달러를 후원하였다. 1910년 5월에는 국민회 프레스노 지방회가 회관을 마련하기로 하고, 5명이 집세를 한 달씩 전당하겠다하였고, 1원이나 2달러를 매년 후원하기로 한 자가 45명이었는데 김원택이 자기의 생활하는 여관을 회관으로 쓰게 하고 노동 주선까지 일체 회관에 양도하면서 방 하나만 따로 얻어쓰기로 작정하여 모든 회원이 그의 공고한 의협심에 감복하였다. 그해 11월에는 삭도 회관 마련을 위하여 1달러를 후원했고, 1911년에도 기부가 계속되었다. 그해 3월에는 청국 구제금으로 1달러를 기부하였는데, 그의 아내 송 부인도 50센트를 후원했고, 그해 5월에는 신한민보 가옥 고본금을 기부했고, 그해 9월에는 국민의무금을 냈다.
1911년 12월에 김원택은 북가주 산호제 인근 써니벨에서 125에이커를 임대하여 10여 명과 함께 토마도를 농사하였고, 이듬해 7월에 ‘동포를 돕는’ 그에게 하늘이 풍작을 내렸다.
마운틴뷰 한인감리교회 대표/권사
상항 한인 감리교회에서 1915년 6월 26일 토요일에 제1차 한인교회 지방 연회가 개최되었다. 마운틴뷰 한인 감리교회 평신도 대표이자 권사인 김원택은 같은 교회 평신도 대표이자 권사였던 허 섭과 함께 참석했다. 그들 이외에도 항구 선교사인 이대위 목사, 황사용 전도사, 스탁톤 한인 감리교회 평신도 대표인 김성원, 삭도 한인 감리교회 평신도 대표인 김찬일과 이응목, 상항 한인 감리교회 평신도 대표인 황사선과 강영승, 오클랜드 한인 감리교회 평신도 대표인 김필권과 임준기가 참석했다.
이대위 목사가 개회 예배를 간단하게 인도한 후 임준기가 서기로 선출되어 회무에 들어갔다. 북가주 한인 교회 사역에 관한 보고가 있은 후 제반 문제를 의논하였다. 그리고 이대위는 연회에 참석하여 지방 집사 목사로 안수받게 되었고, 오클랜드 한인 감리교회의 임준기, 삭도 한인 감리교회의 이응목과 양주은, 상항 한인 감리교회의 황사선에게 지방 전도사 기간을 연장하였고, 스탁톤 한인 감리교회에 순회 전도사를 파송하기로 하였다. 1915년 태평양 연회에 보고된 바로는 마운틴뷰 한인 감리교회에 등록된 세례 교인이 6명이었고, 등록된 학습 교인은 7명이었다.
맨티카 한인 감리교회 건축 회계
미국 남감리교 태평양 연회 동양선교부는 1916년에 김원택 등 맨티카 지방에 거주하던 한인들을 중심으로 맨티카 한인 감리교회를 설립했다. 황사용이 순회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그는 맨티카뿐만 아니라 스탁톤, 오클랜드 그리고 매리스빌까지 관할하였다. 그해 맨티카 한인 감리교회 교세 보고는 스탁톤 한인 감리교회 교세 보고와 합하여 보고되었다. 세례 교인은 16명이었고, 학습 교인은 11명이었다.
1917년 3월에 무사탕 농사하는 사람은 김원택 이외에도 문양목, 신경환, 이국신, 신영철, 한치홍, 김필권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맨티카 한인 감리교회 교인이었을 것이다. 이중 김원택은 600에이커 농장을 단독 경영하였는데 그달에 수도기계를 고치다가 발이 상하였지만, 분주하게 농사에 임했다. 그해 4월에 학비를 벌기 위하여 한인 학생 20여 명이 김원택의 농장에 들어와 노동하였는데 이들도 맨티카 한인 감리교회 예배에 참석했을 법하다.
그해 가주 버클리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임정구가 순회 선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맨티카뿐만 아니라 오클랜드와 스탁톤을 섬겼다. 그해 맨티카 한인 감리교회에 등록한 세례 교인은 51명이었고, 등록한 학습 교인은 11명이었다.
그해 11월에 맨티카 한인 감리교회는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하였고, 3인 건축위원회를 조직했다. 김원택은 김필권과 함께 건축위원회 회계를 맡았고, 최능익은 건축위원회 수전 위원으로 활동했다. 김경보가 콜로라도 스트리트 길에 있던 광 25척, 장 100척의 집터를 10년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식수도 기부하였다. 그래서 1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하고 건축비를 약 600원으로 예산하였으며, 건축비 중 300원이 모집되기를 기다려 우선 공역에 착수하기로 하였다. 그달 25일 예배 후에 교인들이 200여 달러를 헌금하였고, 태평양 연회가 보조하기로 약속했다. 신한민보는 “북가주에 재류하는 일반 동포는 이 같은 박애관 건축에 다같이 동정을 기울임이 가하다”라고 광고하여 건축비 모금에 힘을 실었다.
그해 12월에 맨티카 지방회 신년 임원이 선정되었는데 이들 대부분이 맨티카 한인 감리교회에 출석하였을 것이다. 회장 김원택, 부회장 김필권, 총무 박 연, 서기 겸 학무원 최능익, 법무원 및 실업부 한치홍, 재무 강원서, 구제원 허 섭, 대의원 문양목.
김원택은 우체국 사서함 177호를 설치하고 맨티카에서 노동 주선인으로 활동하였다. 1918년 2월에 그는 “자, 여보, 책력을 보고 주머니 하나를 지어 가지고 오시오”라는 광고를 신한민보에 아래와 같이 게재했다: “웹스터의 자전을 만드는 손 씨로 주적을 내오리다. ‘자, 여보’는 우리의 사랑하는 동포, 돈맛 알고 게으르지 않은 청년을 부름이오. ‘책력을 보라’함은 3월 3일을 주의하라 함이오. ‘주머니 하나를 지어가지고 오시오’는... 이곳에서 버는 돈을 넣어둘 것을 준비하라 함이올시다. 이만하면 알아들으셨소? ... ... 이곳 맨티카에서 3월 3일부터 호닝에 10달러이올시다. 사람은 150명 제한하고 모집하오니 이 기회를 잃지 마시고 얼른 오시오. 만일 인원수가 차서 그저 돌아가시게 되면 당신네보다 내가 더 섭섭하지요.”
그해 8월까지 모금한 건축 헌금은 250달러 35센트였다. 건축위원회 회계였던 김원택이 건축헌금을 한 명단과 금액을 신한민보에 공개했다. 김원택, 한치홍 25달러, 이석진 15달러, 허 섭 10달러 50센트, 김경보, 김계선 10달러, 한신애 8달러, 김경심, 김원도, 한상호, 하도원, 김대일, 양주은, 전흥록, 염만석, 한성실 5달러, 석대원, 김성고, 문양목, 장덕오, 이영풍 3달러, 이국서 2달러 50센트, 김일심, 이치완, 이성환, 이성로, 이선보 이매리, 김성권, 심상목, 이원석, 김창규, 안중권, 허원섭 2달러, 송기은 1달러 50센트, 이성휘, 최희송, 박유대, 김희주 1달러. 한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도 헌금을 하였다. 익톤 목사 31달러 85센트, 제이 맨다사 1달러 50센트, 서양 부인 50센트. 그런데 맨티카 한인 감리교회 예배당뿐만 아니라 친교실까지 건축하였는데 1,200달러를 모금하였고, 300달러를 채용하여 완공하였다. 그 해 임정구 순회 선교사가 보고한 대로 맨티카 한인 감리교회에는 세례 교인이 56명이었고, 학습 교인은 5명이었다.
1919년 4월 27일 오후 2시에 맨티카 지방에 있던 대한 여자 전도회 창립 2주년 기념식이 맨티카 한인 감리교회에서 있었다. 그날 김원택은 연설하였다. 그날 순서는 개회한 후 강유선 회장이 기도하였고, 회장이 취지 설명을 한 후 임정구 목사가 영어로 연설하였고, 김원도 부인이 전도회 역사를 보고했으며, 강앨리스 부인이 창가를 한 후 김원택이 연설하였으며, 학생 일동이 노래한 후 임정구 목사가 연설하였고, 문덕소가 국가를 불렀으며, 익톤 목사 부인이 연설하였고, 강신애 부인이 독창하였으며, 익톤 목사가 연설한 후 마쳤다.
김원택은 1919년 10월에 의무금을 냈고, 1920년 3월에 다뉴바 경축비로 약간 후원하였고, 그해 9월에 신한민보에 보조하였고, 그달에 의무금을 냈다. 1921년 1월에 이승만이 이끌던 구미위원부에 후원하였고, 그해 4월에 간도 참상을 위해 구제금을 기부했고, 그해 8월에 윌로스 비행 학교 학생에게 후원했으며, 그해 9월에 국민의무금을 냈고, 그해 10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특별외교비로 의연했다.
1923년 2월 초에 김원택의 주택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가주 대학 의학과에서 공부하던 그의 아들 김용성이 전하는 바는 매더라에 있는 주택 응접실에서 불이 나서 사정없이 불이 온 집을 둘러쌌다. 생명을 잃은 사람은 없었으나 손님으로 온 안영열 부인의 의복 등 온 재산이 소화되어 손해액은 약 5천 달러였다고 한다. 불난 주택은 백인에게서 세내어 살던 집이었다. 이런 환란 가운데 한국에서 설립하려던 민립대학을 위한 기성회 후원회 조직에서 탈락하여 아쉬움이 있었으나 크게 활동하였고, 그해 11월에 맨티카 국어학교 재무 김마루라 씨의 보고에 따르면 동포들의 기부와 김원택의 3달러 후원으로 설비를 충분하게 구비하였다.
나성 한인 장로교회
김원택은 1925년에 나성에서 거주했다. 당시 나성에는 나성한인장로교회와 1년 전에 분열해 나간 자유 교회가 있었다. 그는 나성 한인 장로교회에 등록했다. 1928년에 김중수 목사가 제1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이듬해 5월에 김원택의 장남 김용성 박사와 김애드리 양이 시내 서양인 장로교 예배당에서 김중수 목사의 주례로 거행되었다. 약 340명이 참석하여 나성 한인 사회에서 드물게 보는 성황을 이루었다. 그날 오후 6시에 혼인 잔치가 시내 와싱톤 스트리트에 있는 체비비에서 200명이 모인 가운데 김중수 목사의 기도 후 식사를 나누고 각처에서 온 예물이며 축하전과 축하문을 읽었고, 신랑 부친의 감상담과 신랑 신부의 감사담과 내빈의 축하담이 이어졌다. 그해 11월에 김원택은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하였는데 이듬해 1월에 그전의 건강을 회복하였다고 한다.
1929년 4월에 김종림을 중심으로 김원택은 김순권, 이영수, 곽림대와 함께 버들롱 길에 있던 나성 한인 장로교회당에서 모여 대동 흥업회사를 조직하였다. 이는 지난해 4월에 나성 한인 자유교회에서 있었던 북미 실업 주식회사의 후신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몇 해 동안 운영한 식물상점을 매매한 후 김원택은 1933년 6월에 부인과 함께 한국으로 귀국하여 선천에서 사업을 하였다. 귀국 7년 후 1940년 5월에 그가 클리블랜드 선편으로 남가주 산페드로 항구를 통해 미국에 도착했다. 6개월 머물기로 했으나, 사업 관계상 7월 말에 산페드로 항에서 가마구라 선편으로 그는 귀국 길에 올랐다. 아들 “김용성 박사 동부인과 손녀 제닛과 다수 친우와 및 중앙 상무부 총무 김병연씨가 부두에 나가 전송하였고, 이별을 아끼는 정은 가는 이나 보내는 이가 다같이 섭섭하였다.” 이후 김원택의 소식은 들려지지 않았다.
damien.sohn@gmail.com
09.21.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