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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이야기들 (6)

오금옥 선교사 (조지아 롬한인교회)

키예프는 북방에서 배를 타고 내려온 크이, 호립, 쉬첵 3형제와 리비드 공주가 로마건국신화처럼 키예프 일곱 언덕을 차지하고 도시를 세웠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키예프는 러시아식 명칭이고 크이프ㅡ라는 우크라이나 이름은 맏형 크이가 세운 도시라는 뜻이랍니다.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가장 큰 나라. 동슬라브인들이 세운 최초의 도시, 모든 러시아 도시들의 어머니로 모스크바를 낳은 키예프 공국, 끝없이 펼쳐진 평야와 전 국토의 90%를 차지하는 풍요한 흑토에서 생산되는 곡식과 작물로 축복받은 땅에 서 보았습니다. 이 나라는 구 소련시절에는 '연방의 빵바구니'로 불리우며 생산된 곡물들로 러시아를 먹여 살렸고, 얼지 않는 항구를 염원해온 소련해군에게 흑해연안의 오뎃사와 세바스토폴은 무적의 흑해함대라는 자부심을 준 나라입니다.

키예프(Kiev)의 가장 큰 자랑은 드니프로강과 우거진 숲 시내 곳곳의 크고 작은 공원입니다. 유럽에서 녹지비율이 가장 높지요. 런던의 녹지비율은 인구 1인당 12평방미터인데 키예프는 23평방미터랍니다. 사거리 길을 건너면 공원이 나타나고 다시 걸어가면 또 나옵니다. 드네프르 강을 제하고도 시 전체의 3/4이 숲과 녹지입니다.

키예프 시내에는 140개의 크고 작은 공원이 길 모퉁이마다 있고 공원 안에는 크고 작은 조각상이 한두 개씩 서 있습니다. 지도자를 잘 만났으면 잘 살 수 있는 잠재력이 큰 나라인데.... 시내 가로수는 너도밤나무입니다. 크고 토실한 윤기 나는 갈색밤알이 길거리에 널려 있습니다. 모양은 밤보다 더 먹음직하고 그럴듯한데 먹을 수가 없어 ‘너도밤’인가 봅니다. 5세기에 형성된 이 도시(Kievan Rus)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의 기원입니다. 구시가(Old Town) 부리차야 볼로디미르스카(vulitsya Volodymyrska)의 동북부 주변은 역사적인 장소로 도심에서 걸어서 다녀 올만한 거리에 있습니다. 11세기에 지어진 가장 오래된 성소피아사원에는 모자이크와 프레스코가 잘 보전돼 있습니다.

드네프르 강은 일직선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고 두 갈래 세 갈래로 갈라져 흐르다가 다시 합쳐지고 때론 큰 호수 같이 넓은 강폭으로 흘러서 흑해로 내려갑니다. 11월 중순부터 3월말까지 눈이 많은 추운 겨울, 그 이후는 따뜻한 여름이라는데 9월 초가을인데도 손이 시리고 스카프 없이 외출하기는 쌀쌀했습니다. 아직까지 여행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곳도 꾸며진 곳도 아니지만 소피아사원과 동굴사원(라브라) 같은 세계문화유산을 이곳 키예프에서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키예프대공(大公)(9-13세기)의 시대로 키예프 러시아 또는 키예프국이라고도 합니다. 창시자는 올레크공(公)으로서 블라디미르(1세) 때인 998년 비잔틴 황제의 누이동생 안나를 대공비(妃)로 맞아들이면서 그리스도교가 국교(정교)로 됐습니다. 야로슬라프 1세(재위 1019-1054)에 최성기를 이루다가 1054년 키예프 왕가의 분열로 블라디미르, 모스크바 등 여러 도시국가가 독립하면서 키예프 공국은 약해집니다.

12세기말 유목민의 빈번한 공격과 다른 러시아 공국들과의 전쟁으로 세력이 쇠퇴하고 1240년 칭기즈칸의 손자인 바투가 통치하던 킵차크 한국(汗國)의 타타르인들에 의해 10주간 저항하였지만 멸망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 자치 군대인 '코자크'를 조직해 국토를 지켜왔지만 주변의 강국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카자크인들의 지배를 받다가 1793년 러시아에 합병되고 1917년에 우크라이나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이 됩니다. 종전 후 다시 평화로운 농업국가로 돌아간 이 나라에 아픔이 찾아온 것은 1986년 4월 인류 최악의 핵발전소 사고였던 '체르노빌'사건입니다.

핵 방사능이 유출되고 있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소방대원과 군인들을 비옷만으로 유출 봉쇄작업에 투입한 무지한 구소련의 처사에 많은 젊은이들이 사망했고, 일대의 수만 명에 달하는 주민들은 철의 장막 속에 가리워진 채 침묵 속에 죽어가거나 방사능 후유증에 현재까지도 신음한답니다.

수많은 외침과 학살, 국토의 침탈과 회복 속에서도 굳게 지켜온 민족의식으로 끝내 독립을 쟁취한 고집스러운 슬라브인의 땅, 키예프는 2차 세계대전 중 도심부의 대부분이 파괴됐지만 복구해 산업 및 문화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다시 찾게 됐습니다.

남아 있는 유적지와 건축기념물들 중 러시아-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가장 아름다운 교회건축물은 상트소피야대성당(St. Sofia Cathedral)으로 11세기에 12명의 사도와 함께 있는 예수를 상장하는 둥근 지붕의 숫자와 러시아 특유의 목조 건축형태로 건립되어 키예프 공국의 기독교 중심지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1685-1707년에 개조된 지금의 모습은 창건 당시의 돌과 벽돌로 만들었던 벽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키예프를 대표하는 사원으로 많은 영적, 정신적 영향을 미쳤으며, 17-19세기경 러시아정교회의 신앙 및 사상 전파에 크게 공헌합니다. 역대 대공이 대관식을 올리고, 중요한 조약을 체결하고, 외국 사신을 맞았던 곳이 바로 성소피아 대성당이었고 중세러시아 최초의 도서관이 창설돼 그리스, 불가리아, 러시아의 희귀본이 소장되어있답니다. 1037년에 야로슬라프 무드르이(Yaroslav. 현자 야로슬라프)가 건설, 금박 입힌 양파 모양의 둥근 지붕 위로 솟아 있는 4층 종탑, 대주교 관사, 식당, 서쪽 문, 남쪽 입구의 종탑, 형제의 건물, 신학교를 건축합니다.

소피아(지혜) 성당은 고대 키예프인들의 예배장소와 복음 전도로서 뿐만 아니라 문화·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역할도 했습니다. 외국사절 접수 및 외국과의 협정체결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키예프 최초의 학교 및 도서관이 이 사원에서 시작됐고 1990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됩니다. 예배드리는 곳도 있고 수도를 하는 수사들이 거주하는 수도원까지 다양한 동부유럽의 오래된 성당중 하나. 크고 유명하며 탁월한 건축물로 바래어 희미해진 처음 만들어진 모습이 남아 있는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를 볼 수 있습니다. 중앙의 둥근 천정에 모자이크 되어 있는 예수의 성상과 반원형 벽의 성모 오란타와 내부 모습은 17세기 이후 그대로입니다. 두 소피아성당이 쌍벽을 이룬다는데 실내가 어두워 이스탄불의 성소피아사원에서와 같은 감동은 적었습니다. 소피아 광장 입구의 76미터 아름다운 종루는 바로크 양식으로 1699-1706년에 세워졌습니다. 수도원에는 야로슬라프 공의 대리석관도 보존되어있고 관 앞에는 누군가의 손길인 꽃이 놓여있었습니다.

18세기 바로크 양식의 상트안드레이(안드레예프스카야)교회는 성소피아성당과 같이 현재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폴란드를 상대로 17세기의 우크라이나 독립을 이끌었던 코자크 장군 흐멜니츠키(1595-1657)의 말 위에 탄 동상이 소피아와 미하엘 성당 사이에 있습니다. 성미하엘 대성당은 금 첨탑양식으로 11-12세기 첨탑에 금을 씌우기 시작하여 금첨탑의 시초라고 합니다. <계속> 이메일: rome87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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