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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예 와 아니오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원로)

예’와 ‘아니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7). 며칠 전 복음서를 읽어 내려가다가 위의 구절에 시선이 꽂혔다. 한참 동안 뗄 수가 없었다. 한국 근대 정치사의 비극은 예와 아니오의 무분별과 남발에서 비롯되었다. 절대 안 한다던 약속이 하룻밤 사이에 표변하는가 하면, 절대로 하겠다던 공약이 허위와 기만과 날조로 품새를 바꿈질했던 전력이 우리네 정치마당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설마’라고 하며 코웃음 칠 뿐 진한 감동 없이 숱한 날들을 보내곤 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가룟 유다를 앞세운 악당들이 들이닥쳤다. 이유는 예수를 잡기 위해서였다. 힘깨나 썼을 장정들로 구성된 제자들 가운데 그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상황에서 나섰다간 어느 주먹이 날아들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때 예수가 나섰다. “너희 누구를 찾느냐.”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 “내가 예수다....” 예수라고 목숨이 둘이나 셋일 수 없다. 그도 피곤했고, 배고팠고, 십자가의 고통이 쓰고 아팠다. 그런데 예수는 “내가 예수다”라고 나섰던 것이다. 정치가들은 말한다. “정치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정치는 정직성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바로 그 더러운 정치 윤리 때문에 우리는 너무나 속상했고, 억울했고, 가슴 저린 세월을 보내야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소리 지르는 닭도, 아무 때나 짖어대는 개도 사람들은 싫어한다. 그것들은 늙었거나 병들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사람이 시도 때도 가늠하지 못한다든지, 아무데서나 재잘거린다면 그들이 어떻게 사회 적응이 가능할 것이며 사람 구실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하겠다는 것은 하는 사람, 안 하겠다는 것은 안 하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 그 연유를 밝히고 책임을 떠맡는 사람이 그립다. 예와 아니오를 바로 못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압력 때문이다. 저항하기 어려운 어떤 집단이나 힘의 압력 때문에 예와 아니오를 얼버무리거나 뒤섞어 버린다. 둘째는 이해관계 때문이다. 그 한 마디 때문에 손해가 된다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는 타산 때문에 예도 못하고, 아니오도 못한다. 셋째는 기회주의적 발상 때문이다. 윤리나 양심은 유보한 채 입신양명이나 출세의 기회 포착을 위해서라면 물도 불도 가리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는 예도 아니오도 기대할 수 없다. 넷째는 습관성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껏 크고 작은 일들을 한결같이 그렇게 대처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성경은 서원한 것은 자기에게 해로워도 갚으라고 명한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이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맹세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인장제도를 사용하는 나라 치고 선진국은 없다. 선진국가일수록 서명제도가 발달되어 있다. 신용카드도, 운전면허도, 모든 크고 작은 계약서도, 신용장도 서명으로 성립된다. 그러나 우리네 사정은 도장을 찍어도 수없이 찍어댄다. 더 많은 도장을 찍어야 마음이 놓이고 직성이 풀리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곧 안전 장치는 아니다. 예라고 말한 것을 예로 지키고, 아니오라고 말한 것을 아니오로 지키는 사회, 도장이 없고, 서명이 없고, 녹음테이프가 없어도 실현되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다.

턱도 없는 거짓말이 목적 쟁취의 도구로 쓰여질 때, 그리고 그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 누구도 그를 향해 허리를 굽히지 않을 것이다. 도산 안창호는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죽더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은 말아라”고 했다. 그리고 도산은 거짓말한 학생을 정학처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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