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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눈물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중에서 (6)

방지일 목사

눈물이 많은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는 다 피상적으로 보여지는 모습만 보고 하는 이야기다. 비록 사람 보는 데서 별로 눈물이 없이 냉정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깊은 눈물이 있어 혼자 흠뻑 우는 사람도 있다. 울고 싶으나 못 울게 하는 환경이 있을 때도 있는데, 엄한 가문에서는 울음소리를 크게 낼 수가 없다. 그런 가정에서는 어떤 설움이 닥쳤을 때 마음껏 울어보면 시원하겠다는 말을 많이 한다. 실은 마음 놓고 울어 그 쌓인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데 못 울게 하면 울화통이 터질 듯 하다고 한다. 사람 앞에 예도 있으니 자제하면서 속으로 울 수 있는 것도 어느 때는 덕이 된다. 마음속으로 울어도 스트레스가 해소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눈물이 더 깊이 울게 만들 수도 있다. 이런 울음은 혼자 울게 되는데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신다.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12:15). 남이 모른다지만 혼자 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울어 주신다. 그러므로 그 울음에 위로가 크며 내 모든 흠이나 티가 다 벗겨지면서 천진 순수함으로 하나님과 깊은 정을 나누게 된다. 하나님은 그 눈물을 그렇게 알아주신다. 하나님은 오셔서 함께 울어 주시는데, 몸부림도 그 앞에서 마음 놓고 하고 온갖 사정을 다 토로할 수 있다. 그러고 나면 나는 백지가 된다. 완전히 빈 그릇이 된다. 주실 것은 그 그릇에 다 채워 주신다. 백지가 된 내 마음에 위로의 글을 써주신다. 이런 눈물의 소유자가 된다면 실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억울함도 알아주시는 하나님 억울할 때 분격도 필요 없다. 사람들 앞에서 분격도 필요 없다. 혼자서 아파하는데, 특히 중상모략이 있을 때 더욱 그렇다. 하나님 앞에서 울 수 있을 때 그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고맙다. 하나님은 다 알아주신다. 중상모략을 당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 편에 편승해 수군거리고 친구가 없어 힘겨울 때도 있지만 우리 하나님은 더는 소상히 아실 수가 없을 정도이다. 전지하심이 하나님의 속성인데 이제야 그걸 알았다니! 그게 아니다. 그 속성을 이제 알았다고 함이 아니라 내 마음 아픈 데를 그렇게 속속들이 아시고 위로하실 수가 없다는 감탄사다. 자애로운 어머니가 아이를 품에 안아주는 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빈말의 위로가 아니다. 위로 속에 온갖 것을 준비하신 여호와 이레가 나타나심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샘처럼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신다. 그리고 일감을 주신다.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나이가 이만해서 이만한 일을 할 수 있는 걸까 자문해본다. 어느새 책이 100여 권이 넘게 나왔다. 눈물을 닦아 주시고 여호와 이레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강해를 마치고 이 책을 집필하면서 기억을 더듬어 본다. 너무 신통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픈 상처를 싸매 주시는 그 실례들을 모아 내게 쥐어 주시는데 그저 감사한 마음 뿐이다. 나는 평생을 이런 여호와 이레로 살고 있다. 즉시로 응답하시는 하나님 중국 오지에 처음 갔을 때 아이들이 아직 어렸다. 그래서 내 눈물을 몰랐을 것이다. 벽촌이라 갈 만한 병원도 없고 시간은 밤중인데 아이가 열이 40도까지 올라갔다. 그날 그 애를 안고 하나님께 호소할 뿐이었다. 하나님께 “사람이 지은 허물을 밝히 드러나게, 그리고 그 죄를 고하게 해주세요”라고 눈물을 머금고 기도하니 열이 싹 내리고 아이는 깊이 잠이 들었다. 그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지금 75세를 넘기고 80세가 되어가는 내 딸아들은 어릴 때의 일을 알 리가 없지만 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죄는 고하면 용서하시고 그분의 베푸신 이적을 보면서 길렀다고 나 혼자 생각하곤 한다.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5:16). 이적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말들은 모두 부질없는 이야기다. 죄를 고하고 믿고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 ‘신유의 은사’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으로 사람은 하지 못한다. 사람은 그저 죄를 고할 뿐이다. 아직까지 슬픔이 선한 할아버지의 죽음 나는 자랄 때 행복하게도 층층 슬하에서 자랐다. 할아버지와 할머님이 계시고 부모님 계셔서 겹사랑을 받고 자랐다. 내 아버지가 맏아들인데 숙부님이 네 분이고 고모님이 한 분 계셨다. 그리고 내가 큰 아들이라 집에서는 첫 손자였다(누님이 한분 계시긴 했지만). 모든 사람한테서 총애를 받았다. 조부님 환갑 때 내가 아직 어렸으니 할아버지는 손자를 늦게 보신 셈이다. 할아버지께서 서른에 아버지를 낳으셨다니 손자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중국 선교사로 가셔서 나 혼자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하지만 아이가 여러 집에서 나 하나다 보니 숙부님들의 사랑도 무척 많이 받았다. 나는 자라서 중국 선교사로 외국에 나가 있었으나 할아버지를 뫼시고 있기도 했을 뿐 아니라 한 주일에 한 번은 꼭 편지를 드렸다. 부모님께도 그랬다. 숙부들께는 그렇게 못했으나 조부모님, 부모님의 형제, 고모님 내외께는 생신 때마다 적은 액수지만 축금을 해마다 잊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애정으로 자란 사람이다. 그리고 내 자식이 태어나서 성장해 갈 때 아들이 겹겹의 사랑 속에서 자라는 게 얼마나 행복해 보였는지 모른다. 매주 아이들의 자라는 모습을 보고하는 것이 편지의 주된 내용이었다. 그분들은 내 편지에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른다. 이런 행복에 젖어 살다가 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전보를 받았을 때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 내 뒤에 한 배경이 무너졌구나 싶었다. 그의 신앙을 전승받은 나인데, 내게도 그랬지만 아이들에게도 더욱 그리했다. 겹겹의 사랑을 받던 기도의 배경이 이 땅에서 없어졌다는 그 슬픔이 너무나 컸다. 편지 보낼 한 곳이 없어진 것이다. 한동안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었다. 유제한 목사님이라고 우리 평양신학교의 동창인 그는 양평동교회에서 목회하셨는데 지금은 작고하셨다. 나를 만나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말을 자주 하셨다. “방 목사가 나보다 나은 것이 무엇 있나? 그런데 나는 홑인데 방 목사는 겹이란 말이야” 그 말씀인즉 내 뒤에는 신앙의 겹겹이 있어서 내가 부럽다는 의미였다. 그런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가셨다는 말에 한없이 울었다. 그 슬픔은 아직까지 너무 선하다. 표현 할 수 없는 아픔, 딸의 죽음 그 애가 내게 효성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유럽에 가 있을 때 매주 두 번씩 쓴 200여 통이나 되는 그 애의 편지가 지금도 남아 있다. 너무도 신앙적인 글이어서 시간이 있으면 출판할 생각도 해보았다. 그런 일이 있어서만이 아니라 아까운 다른 면도 참 많았다. 그 아이의 묘소에는 몇 해 동안 제자들이 꽃을 갖다 놓았다. 학생들에게는 좋은 스승이었다. 그런 사람이 물론 내 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애가 간 것이 나를 슬프게 한 것은 효녀를 잃었다는 이유만이 아니다. 아까웠다는 점만도 아니다. 이미 갔으니 대범하게 보내야 한다. 할아버지 묘소 앞에 그 애의 묘가 있다. 그 애가 간 날이 삼일 기도회였다. 주보에 있는 대로 나는 기도회를 인도했다. 이튿날 새벽기도회도 내가 인도했다. 그 애의 시신을 앞에 놓고도 겉으로는 드러내어 울지 않았다. 생명의 아픔이 무엇인지도 알았지만 울지 않았다. 다른 이들 가운데도 그런 아픔이 많이 있을 것이다. 나만 당하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내 속의 아픔은 더 깊다. 다른 자녀들도 아비의 이 아픔을 완전히는 모를 것이다. 내게는 표현 할 수 없는 아픔이 있다. 사람들이 보는 데서 그리 슬퍼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지금도 그 애를 생각하면 슬프다. 딸을 기념해서 “성도의 생활”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서문에 슬픔을 약간 비치기도 했지만 이런 슬픔을 딛고 목회도 마무리했다. 은퇴했고 슬픔을 딛고 책도 썼다. 앞으로도 쓸 수 있는 데까지 쓸 생각이다. 주께서 거둬주신 나의 눈물의 병은 과연 얼마만 할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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