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형 목사 Ph.D
친구들교회 담임목사, 합동신학대학원 교수
재단법인 에듀넥스트교육개발원 원장
기독교 교육에서 가르치는 일이란 바로 이것이다. 중생 후 영적으로 좀 더 성숙한 사람으로서 덜 성숙한 사람을 도와 그들로 성숙한 크리스천으로 자라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교회 안에 속한 사람은 그 누구도 가르치는 일에서 제외될 수 없다. 그러므로 크리스천 교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이 만큼 성숙했으니 나보다 덜 성숙한 사람을 도와 좀더 성숙한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릴 책임과 의무가 내게 있다”는 생각을 갖고 가르치는 사역에 임해야 한다. 누가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가르치는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빚진 자의 심정으로 이 일을 감당하는 것이 크리스천 교사의 정체감이 되어야 한다.
또한 기독교교육자는 가르치는 일을 단순히 지적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전인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가르치는 일을 영적성장의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인간의 모든 측면을 골고루 발전시켜 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신체적, 지적, 감성적, 도덕적, 사회적, 영적인 측면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의 인격은 이런 여러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부분들이 골고루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 일반교육은 교육을 지적인 측면에서만 생각하지만 기독교교육은 전인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넷째,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의 태도이다. 이제 우리는 성육신하신 주님의 마음, 곧 권리를 포기하고 제약을 수용하고 자기희생 하는 태도로 가르친다.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교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 가르치는 자의 태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덜 성숙한 사람을 잘 돕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덜 성숙한 사람의 단계로 내려와야 한다. 이것을 성경은 성육신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시는 자세를 말한다. 빌2:5절 이하의 말씀은 그것을 가리켜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한다. 성육신의 정신의 핵심은 권리포기, 제약수용, 자기희생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고 사람이 되신 정신이다. 하나님으로서 어떤 것에도 제약을 받으실 분이 아니지만 사람이 되고 종이 되므로 스스로 제약을 받아들인 정신이다. 나중에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기를 희생하는 정신이다.
기독 교사는 늘 이런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기독 교사로서 다른 교사들과 무엇이 다른가? 나는 학생들을 위해 어떤 권리를 포기했는가? 어떤 제약을 수용했는가? 어떤 불편함을 감수했는가? 무엇을 희생했는가?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우습게 여긴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이런 정신으로 행하면 결국 한없이 낮아질 것만 같은데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세우셨다. 기독 교사들에게도 그런 영광이 주어질 것이다.
다섯째, 우리는 균형 잡힌 영적 성장을 목표로 삼고 지적으로 알아야 하는 부분과 감성적으로 느껴야 하는 부분, 행동으로 실천해야 하는 부분이 균형 있게 가르쳐지도록 모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한다.
모든 교육은 목표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교육의 목표를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교육의 모든 과정들이 달라진다. 기독교 교육은 도대체 무엇을 목표로 하는가? 기독교 교육의 목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세 개의 중요한 성경구절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에베소서 4장 13절과 골로새서 1장 28절, 디모데후서 3장 16-17 이다.
에베소서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안에 목사와 교사와 복음 전하는 자의 여러 가지 직분을 둔 이유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봉사의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고 한다. 즉 가르치는 자의 목표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골로새서는 가르치고 권하는 모든 교육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을 말해 준다. 그것은 각 사람을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디모데후서는 가르치는데 있어서 주로 사용하는 도구인 성경의 목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기능을 통해 사람을 온전케 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한다.
위의 성경 구절을 정리해보면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일의 궁극적인 목표는 온전한 자, 완전한 자를 만드는 것이다. 이 완전한 자는 곧 영적으로 성숙한 자를 의미한다. 다른 말로는 영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럼 영성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좀 더 구체적인 개념 정리가 돼야 교육의 방향이 선명할 것이다. 영적 성숙이나 영성에 대한 정의는 역사적으로 시대마다 각각 다르게 이해했다. 어떤 시대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성경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시대에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신비적 체험이나 경험이 있으면 그 사람을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으로 보았다. 또 어떤 시대에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사회 정의를 위해서 봉사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인식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이 세 가지의 다른 정의가 전부다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과거와는 달리 교단이나 교파별 그룹을 통해서 각각의 다른 영성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는 것이다.
먼저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하다고 생각하면서 영성을 지적인 면(성령에 관한 성경지식)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그룹에서는 성경을 얼마나 아느냐가 영성을 재는 척도가 된다.
다른 그룹은 신비적인 체험과 경험을 많이 해야만 영적으로 성숙한 자라고 주장한다. 이런 그룹에서는 내가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든지 아니면 꿈에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이 영적 성숙의 척도로 사용된다.
다음에는 사회정의를 위해 행동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성숙한 자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이 입장은 과거 사회 복음주의를 주창하던 사람들에게서 많이 지지를 받았는데 아직까지도 존재한다. 이런 그룹에서는 실제로 봉사의 현장에 가서 자기희생을 통해 일하는 사람이 존경을 받는다.
중요한 사실은 세 입장이 다 성경에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 하나도 성경은 소홀이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곧 성경에서 말하는 영성은 이 세 가지 개념을 다 포함한다는 의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인 성숙은 무엇인가? 언급된 세 가지의 영역이 잘 균형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한 쪽으로 치우쳐서 영성을 강조했던 사람들은 균형 잡힌 영성을 갖출 수 있도록 자신의 영성의 약한 부분을 보완해야 한다.
아울러 교육현장에 있는 교사들은 학생들에게서 이 영성의 세 가지 측면이 균형 있게 잘 개발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배우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의 뜻을 잘 알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며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고 또한 머리에만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이웃을 부요하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교육목적에 대한 이해가 어떤가에 따라 교육방향과 교육행위 등이 결정된다. 기독교 교육자로서 우리가 교육을 디자인할 때는 어떤 교육 여건에서든지 늘 학생들이 알아야 할 부분과 느껴야 할 부분, 행해야 할 부분을 염두에 두면서 교육할 것을 생각해야 한다. 예배를 디자인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건강한 신학이 건강한 철학을 낳고 건강한 철학이 건강한 행위를 낳는다. 건강한 교육행동은 바로 건강한 신학에 기초한 철학에서 가능하다. 그러므로 교육자는 무엇보다 분명한 교육철학을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 든든히 서서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교육자들의 문제는 그 철학이 쉽게 흔들린다는 것이다.
또한 주위의 환경에 의해 갖고 있는 철학이 위협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때에 따라 타협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그것은 철학이 약하기 때문이다. 철학이 약하다는 것은 신학이 약하다는 말과도 같다. 교육행위가 약해진다고 느껴질 때는 늘 철학을 돌아보아야 한다.
크리스천은 그 누구보다 분명한 신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선명한 철학 위에서 확신에 넘치는 교육행위를 오랫동안 꾸준히 할 수 있다. 교육행위가 흔들릴 때는 늘 다시 교육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철학을 점검하면서 내가 하고 있는 행동들이 분명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철학적인 입장은 우리가 기독교 교육자로서 일반 교육자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드러내기 위해 늘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것들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