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목사(금란교회 동사)
인본주의신앙이란 기독교의 탈을 썼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중심이 된 신앙을 의미하고 신본주의신앙이란 그 중심을 하나님께 둔 참된 신앙을 의미합니다. 인본주의(Humanism)의 근본을 좀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구라파에서 일어난 “문예부흥”(14-15C)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르네상스(Renaissance)란 본래 “재생”(Rebirth)이란 뜻입니다. 르네상스는 미술, 문학, 건축의 재발견 혹은 부흥을 의미합니다. 문화적 재생은 결국 인간의 자유, 존엄성을 강조하게 됩니다. 같은 시대에 일어난 휴머니즘(14-16C)은 인본주의 혹은 인도주의라고 하는데 결국 인간의 자유와 의지의 존엄성을 중시하게 되고 그러다보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억압하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기게 되고 하나님을 경시 내지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18C에 일어난 계몽주의사상가(Enlightenment)들이 받아들이게 돼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강조하게 되고 그 결과 기독교는 하나님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계몽주의운동은 인간의 이성을 깨우치고 중시하다보니 합리주의운동이 일어나 타락한 인간의 이성을 앞세우게 되고 인간이성에 합리적이 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배척하게 되고 인간을 모든 만물의 척도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인간의 자유와 의지의 존엄성을 억압하는 존재로 여기고 하나님중심에서 인간중심의 기독교로 전하여 결국 오늘날과 같이 구라파교회들이 무덤처럼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계몽주의(Enlightenment) 사상가 토마스 페인(Thomas Paine)과 같은 무신론자는 “이성의 시대”라는 책을 써서 성경과 하나님을 한껏 비방하고 100년 안에 성경은 다 없어지고 기독교는 다 없어지고만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성의 시대”란 책을 출판한 1794년부터 그가 사망한 1809년까지 비참하고 고독한 신세가 되어 폐인으로 살다 갔습니다.
17세기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라는 프랑스의 철학자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이 말이 사물의 근본적인 원리에 도달한 것이라고 하지만 성서적인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없고 사탄적인 말입니다. 성경은 창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씀했고 요1:3에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창조의 근원을 말씀하고 있는데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란 말이 얼마나 망령되고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반항적인 발상입니까?
이 모두가 중세기의 르네상스운동과 계몽주의사상과 합리주의영향으로 “하나님중심신앙” 즉, 신본주의신앙에서 “인간중심신앙”으로 변질되고 말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한때 창성했던 구라파교회들이 무덤처럼 죽어버렸고 관광객들의 구경거리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중심신앙이 인간중심의 신앙으로 변질되면 복음을 받아들여 죽은 영혼이 살아날 수가 없으므로 교회는 죽어버리고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겉으로 보기에 키 크고 잘 생겼던 사울(Saul)왕을 버리신 후에, 대신하여 왕을 세우려 할 때 용모가 뛰어난 이새의 아들들을 다 마다하시고 하신 말씀이 삼상16:7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중심”이냐 “인간중심” 혹은 “자아중심”이냐를 보신다는 뜻입니다. 사울 왕의 중심에는 자기가 들어있었고 다윗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신본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
①다윗
다윗은 이새의 말째 아들이고 양치는 목동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왕이 될 사람을 선보려고 할 때, 부모는 선을 보이려고도 하지 않을 만큼 무시한 아들이었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는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을까요? 무적의 장수 블레셋의 골리앗이 온갖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다하고 선민 이스라엘을 멸시하는 말을 할 때 한 사람도 생명을 내놓고 싸우려고 한 사람이 없었으나 어린소년 다윗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을 수가 없어서 말리는 형들의 말을 무시하고 나가 골리앗(Goliath)을 향해서 외치기를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17:46) 47절에는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부치시리라”하고 물맷돌을 던질 때 그 돌이 이마에 박혀 쓰러졌습니다.
여러분, 생명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윗이 목숨 거는 것을 보면 그 중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자기얼굴에 먹칠을 해도 좋고, 자기목숨을 버려도 좋다는 신앙입니다. 그 중심을 알아보는데 이 이상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이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잘 나타는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윗이 왕이 된 다음 “나는 백향목궁에 거하는데 여호와의 법궤는 천막 안에 있도다”하고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려 할 때 하나님이 “너는 전쟁으로 인하여 손에 피가 묻었으므로 전을 건축하지 말라”고 하시고 아들 솔로몬이 건축하게 했습니다. 그는 온갖 금, 은, 보화를 많이 준비해놓고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게 했습니다. 이것도 다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사울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다녔지만, 또 몇 번이고 복수할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이 기름을 부은 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는 큰 죄를 지었지만 왜 하나님이 다윗을 버리지 아니하셨을까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까짓 죄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삼하7:14-15에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죄를 지으면 사람 막대기와 인생채찍으로 때릴지언정 사울처럼 버리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윗은 중심으로 마음속 깊이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겉모양만 잘 생겼지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중심을 보실 때 그가 범한 죄가 크기는 하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신본주의신앙이요, 사울은 인본주의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심에 누가 있는지를 살피십니다.
②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그 중심에 귀한 독자가 있지도 않고 물질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 중심에 항상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100세나 되어 낳은 아들이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어느 날 자기 생명보다 귀한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가서 번제로 제사를 드리라고 했을 때 그는 고민하지도 주저하지도 않고 즉각 결단을 내리고 아침 일찍이 떠나갔습니다. 칼을 들어 치려할 때 하나님이 죽이지 못하게 하시고 창22:12,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셨고 하나님 제일주의신앙을 가졌으나 아들을 받은 다음부터는 차츰차츰 아들 이삭이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보셨는데 아브라함이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중심에 다시 하나님이 차지하게 되었고 이삭이 중심을 차지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훈련받은 사병만 318명이나 되었으므로 전체 종을 합하면 수천 명이나 될 것이고, 소 떼, 양 떼가 셀 수 없이 많았고 엄청난 재산이 있어서 그는 궁궐 같은 집을 짓고 왕처럼 살 수 있었으나 그는 천막에서 살며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중심에는 독자 이삭도 있지 않았고, 재물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인본주의신앙이 아니라 신본주의신앙으로 살았습니다.
③ 모세
모세야말로 신본주의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모세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바로 왕 앞에 들어가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 보내라고 명령했습니다. 모세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건 사람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그 백성을 생명을 다해 사랑했기 때문에 바로 공주의 아들로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는데 다 포기했습니다. 히11:24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가 얼마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하고 의지했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민16장에 보면 고라와 다단과 온이 쿠데타를 일으켜 모세를 거슬리는 일도 있었고 어떤 때는 자기가 인도하는 백성에 의해 돌탕에 맞아 죽을 뻔도 했습니다. 모세는 힘들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사명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이 구스 여자를 얻었다고 모세를 비방하였으나 하나님이 나타나 “모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된 종인데…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아니 하느냐”(민12:7-8)하며 주동자 미리암을 쳐서 이마에 문둥병이 발하기도 했습니다. 모세도 다윗처럼 살인자요, 간음자였습니다. 민12장에 보면 처자식이 있을 때에도 불구하고 구스여자 즉, 에디오피아 여자를 첩으로 얻은 일도 있었습니다. 40세에는 의분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자기 백성을 쳐 죽인 살인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중심에 충성됨을 보셨기 때문에 그런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신앙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겉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속에 들어가 사자 밥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지만 굴하지 않고 보란 듯이 창문을 열어놓고 하루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느브갓네살왕이 만든 우상 앞에 절하지 아니하여 풀무불 속에 던진바 되었으나 타죽기는커녕 머리터럭 하나 그슬리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중심, 신본주의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④ 욥
욥은 당대의 의인이며 큰 거부였으나 사탄의 참소로 인하여 그 많던 재산이 하루아침에 도적을 맞아 없어지고 불에 타 다 없어졌으나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고 그 귀한 열자녀가 맏아들의 집에서 잔치하는 중에 태풍이 불어와 집이 무너지면서 다 깔려 죽었으나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도리어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받으실지니이다”(욥1:21)하며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은 것은 욥의 중심에 재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자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신 신본주의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란 말씀이 생각나게 합니다.
⑤ 베드로
예수님 당시 석사, 박사에 해당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많았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택하지 않으시고 베드로를 비롯하여 왜 어부들을 택하셨을까요? 주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자마자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따라 나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따랐던 것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은 세상에서 어떤 고난과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후에는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회칠한 무덤처럼 겉만 잘 꾸미고 거룩한 체 했지만 그 속 중심에는 썩은 송장과 같이 세상 욕심과 명예욕과 죄악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인본주의신앙이었습니다.
여러분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십니까? 물질이 자리잡고 있습니까? 여러분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십니까, 아니면 자식이 차지하고 있습니까? 사업이 자리잡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첫 자리를 원하십니다.
⑥ 옥토에 떨어진 씨
길바닥에 떨어진 씨나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진 씨나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모두 땅 겉에 떨어지고 옥토와 같이 깊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계란의 껍질도 아니고 흰자위도 아니라 가장 깊은 노른자위와 같은 심령중심으로 말씀 혹은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만 열매 맺고 구원 받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신앙은 겉모양만 그리스도인이지 가짜신앙입니다. 신본주의신앙만이 참 신앙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