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사도 바울은 지금 오스티아(Ostia) 가도의 사형장 한쪽에 위치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사형을 시킬 때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시행했습니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즐거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재 그곳은 교회당 지하에 두 평, 정도 되는 곳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찾는 수많은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고즈넉하게, 때로는 웅변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4세기 초에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284-305) 황제가 자신의 목욕장을 짓기 위해 로마 전역에서 붙잡아온 그리스도인들을 노동력으로 이용한 다음 10,203여명을 사형시키기도 한 장소입니다. 그는 달마티아(현 크로아티아)의 빈농 출신으로 군대에 의해 황제로 취임한 사람입니다. 그는 황제에 취임한 후 자신을 주와 및 신(dominus et deus)으로 부르도록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겁 없이 행동했는지 모르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목을 올려놓고 도끼로 내려쳤던 돌기둥은 지금도 한쪽이 날카로운 도끼날에 의해 깎여진 채로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목을 내리칠 때마다 피가 용솟음쳤을 것이고 그 흘러내린 피들로 시내를 이루고 강처럼 흘러 대지를 빨갛게 적셨을 겁니다. 그 거룩한 생명의 피로 말입니다. 그 피는 저주 받은 땅을 거룩하게 회복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피로 인해 우리는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는데 이 사실을 깊이 깨닫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이곳에 수도원을 설립한 불란서의 수도사 베르나르도 클레보(Bernard Clairvaux1091-1153, 그가 지은 찬송가가 85장, 145, 196장 등이 있음)는 이곳 지하기도처에서 기도하던 중, 천국에 올라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환상 중에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 분은 개혁자들도 인정하는 탁월한 영성가였습니다. 그래서 후에 이곳에 교회당을 짓고 이 계단을 천국의 계단(Chiesa di Scala Coeli)으로 명명했습니다.
주님을 믿다가 순교당한 사람들이야 말로 모두 영광중에 주님의 나라에 입성하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겠지요. 순교가 그리도 영광스러운 축복임을 알았기에 손양원 목사님은 순교를 부러워했습니다. 그래서 공산당들이 날뛰는 불안한 상황에서 피하라고, 배를 타고 조금 만 나가면 섬에 도착할 수 있으니 우선 그곳에 몸을 피했다가 공산군들이 물러가면 돌아와서 오랫동안 사역해야한다고 수 없이 권함을 받았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많은 교회를 다니며 사자후를 토하던 신령한 부흥사이기도 하셨습니다. 주변의 당회원, 동료들이 그토록 말렸는데도 듣지 않고 애향 원을 지키다가 사십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결국 순교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나 자유가 팽배한 시대에 살고 있기에 신앙생활을 마음대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옷깃을 여미고 신앙의 현주소를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선배들이 한없이 우매했기에 편안한 길을 외면하고 고난의 길을 걸어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곳 지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몹시도 춥고 고독했습니다. 두 평 정도는 토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가 이 감옥에서 보낸 그의 마지막 편지 디모데후서를 통하여 그 때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딤후4;9, 너는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데마(다스리는 자의 의미)는 한 때 열심 있는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1차, 2차, 전도여행에도 동행했습니다. 그런 데마를 바울도 신임하였기에 골4;14절에서는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빌레몬14절에는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동역자라고 칭한 것은 아무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직스런 제자 데마인데 결정적인 순간 바울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배신의 역사는 참으로 깊고 슬픔으로 점철되게 만든 역사입니다. 가인이 시기심 때문에 동생 아벨을 배신하여 쳐 죽임을 시작으로 끈끈하고 철저하게 계속 역사에서 사라질 줄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시저가 양아들 브루투스에 의해 칼에 찔려 죽어가면서 외쳤던 ‘브루투스, 너마저도’라는 유명한 절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도 사랑하는 제자 가룟 유다에게 은 삼십에 팔리는 처절한 배신을 경험하셔야 했습니다. 지금도 인간의 더러운 욕심 때문에 신의를 저버리고 배신하는 일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우리를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참으로 거절해야 하는 것은 배신이라고 하는 쓴잔입니다. 세익스피어는 배반당한 자는 배반으로 인해서 상처를 입게 되지만 배반하는 자는 한층 더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주님을 배반한 후 너무 괴로워서 회개하지도 못하고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왔다고 했습니다(행1;16).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도 영적 관계에 있는 사람을 배반하는 죄를 범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자신을 심히 고통스럽게 만드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