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믿나?
기독교 신앙은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요구한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계시한 성경의 진리가 있다. 이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근본적인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구별하게 하는 시금석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앙의 출발점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을 제시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신앙인 개인과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이에 신앙은 하나님에 대해 아는 지적 행위와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심적 행위를 동시에 동반한다. 소위 머리와 마음이 조화된 믿음을 뜻한다. 신앙의 정체성을 확립한 교인들은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영적 자각을 지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간다.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바뀌어도 이런 신앙의 기본적 요소는 항상 요구되어왔다.
신앙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중생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옛 사람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새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다. 불신자에서 신앙인으로 변화되는 적 놀라운 영적 경험이다.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그의 가족의 일원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중생한 성도는 개인에 따라 미숙하거나 성숙한 단계에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이 깨닫고 수용한 진리에 대한 신앙적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교회의 설교와 신앙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성도들에게 기독교의 진리와 구체적 적용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때 가르치는 자는 기독교 역사의 흐름 속에 세워진 전통에 의해 형성된 교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이 믿는 신념체계를 알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내가 믿고 싶은 것을 주관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객관적인 답, 즉 일련의 명제들이 이미 분명하게 주어졌다. 교회가 가르치는 성경의 내용과 교리를 이해하여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 각 성도의 신앙이 자라난다.
12신조
이런 관점에서 서구 선교사에 의해 복음의 씨앗으로 성장한 한국교회의 상황을 살펴보면 진리의 객관성보다 성도의 주관성 신앙을 강조한 한국적 신앙의 원인에 대한 힌트를 얻어낼 수 있다. 피선교지였던 조선교회가 조속한 시일에 자립하였을 뿐 아니라 전도와 선교에 힘쓰는 교회로 성장하였다. 초기부터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위탁으로 드러나는 친밀한 관계는 강조되었지만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진리에 대한 지식을 상대적으로 중요시 하지 않는 풍토가 형성되었다. 무조건 믿는 것을 더욱 숭고한 신앙인의 자세라는 확신이 공유된 것이다.
먼저 한국장로교회를 살펴보자. 1907년은 매우 중요한 일들이 많이 생긴 해였다. 아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때 평양대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사에서 대단히 역사적인 일들이 일어났는데, 1902년에 설립된 평양신학교가 1907년에 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같은 해에 최초로 독노회가 조직되었다는 것이다. 주한 선교사들은 9월 17일 소집된 노회에서 매우 중요한 문건을 채택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향후 장로교회의 신학적 바탕을 이루게 된 ‘12신조’이다. 전통적으로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을 포함)를 표준문서로 채택하여온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를 대신하여 매우 간단한 내용을 담고 있는 ‘12신조’를 선택한 이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1907년 노회에서 채택된 ‘12신조’는 한국 선교사들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인도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1904년에 조직된 인도장로교회에서 먼저 채택된 문서를 한국교회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그 당시 인도 선교사들도 ‘12신조’의 내용이 ‘웨스트민스서 신앙고백서’에 비해 매우 간단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이를 인도장로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하려 하였다.
한국 선교사들도 이 뜻에 동의하였기에 이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도장로교회와 한국장로교회의 ‘12신조’ 서문에 유사하게 그 의도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표준으로 삼는 장로교회의 전통을 이탈하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찬성한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의 진리를 밝힌 문서이기에 교회와 신학교에서 교육되어야 할 교리체계로 인정하고 채용한다는 것이다. 즉, ‘12신조’는 성경의 내용을 요약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더욱 간단히 요약한 문서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간단한 교리
때로는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보다 간단히 요약된 내용이 더욱 효과적일 때가 있다. 특히 처음 어떤 사실을 접하고 이해할 때 더욱 그렇다. ‘12신조’의 역할이 그러하였다. 아직 제대로 아기걸음도 걷지 못하던 1907년 한국교회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길고 어려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대신하여, 쉬우면서도 기본에 충실한 ‘12문서’를 채택한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다. 선교사들이 한국교회를 배려한 결과물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인도 선교사들이 간단한 교리를 제시하였던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점을 깨달을 때 ‘12신조’ 채택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게 한다. 선교사들은 ‘12신조’가 인도교회와 한국교회는 물론 아시아에 뿌리를 내리는 장로교회의 신조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들이 교만하여 동양인의 지적 능력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평신도 지도자들이 이 방대하고 어려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매우 힘들 것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그러나 그들이 간단한 교리를 선호한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 당시 미국 복음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아 복잡한 신학논쟁보다 간단한 형태의 신앙을 선호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신학자들이 아니었다. 교리논쟁과 변증을 통해 교리적 진리를 밝히는 것보다 영적 불모지에 복음을 제대로 심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던 자들이다. 이미 미국장로교회는 초기부터 전통적 교리를 강조하는 편과 부흥운동을 중심하는 다른 편이 대립하며 갈등과 분열을 거듭해온 바 있다. 선교사들은 대부분 복음주의 전통에 있었다. 그러므로 ‘12신조’를 채택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한국장로교회 성도들의 신앙은 전통적으로 매우 간단한 교리를 기초로 형성되었다. 감리교회의 경우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1930년 정경옥 목사가 기록한 ‘기독교조선감리회 교리적 선언’은 ‘12신조’에 비해서 매우 간결하다. 그 결과, 한국교회 성도들은 머리보다 가슴을 강조하는 신앙의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초기에 ‘12신조’라는 간단한 교리를 통해 신앙이 자라게 한 뒤 마땅한 후속조치가 없었다는 것이다. 교리체계보다 뜨거운 신앙의 열정을 강조하는 전통이 계속 이어지면서 성도들이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객관적 진리를 포괄적으로 교육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요약된 12신조로 출발한 한국교회, 성장할 교리체계 후속조치 아쉬움
하나님 말씀 통제받고 그 진리 알아가는 기쁨 가질 때 자아의식 건강
성숙하는 신앙인
신앙은 궁극적으로 머리보다 가슴을 중시한다. 교리와 성경을 통달하여 대단한 지식을 소유하여도 그 진리를 제공한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지 않는다면 지적 유희에 그치고 말게 된다. 신앙의 목적은 많이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앙인이 가장 중시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이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 관계에서 파생되는 신앙적 헌신과 희생으로 인해 신앙을 굳세게 지켜갈 수 있다.
그러나 가슴만 중시하고 머리에 대한 관심을 등한시한다면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중생을 체험한 성도는 계속 자라나야 한다. 신앙인은 평생 성화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게 된다. 어린아이와 성인이 먹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소화를 시킬 수 있는 능력 차이 때문이다. 신앙의 성숙도 마찬가지다. 매우 간단한 교리와 성경에 관해 상투적인 내용만 이해하여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지낼 수 있다.
그러나 어린 아이를 벗어나 성장한 성숙한 성도들은 반성적으로 자신을 반영하는 신앙을 소유하게 된다. 신앙인으로 자신이 믿고 따라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과 함께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제시한 진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현재 자신이 스스로 세운 신앙 체계와 내용을 추구하고 있는지, 아니면 계시로 주어진 말씀에 담겨진 뜻을 이해하고 따르고 있는지 점검하는 행위를 신앙의 중요한 덕목으로 삼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하나님을 뜻을 자신의 주관적 신앙범주 안으로 수용할 때 영적 보람과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자율적 신앙
성숙한 신앙인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과 그 진리를 요약한 교리의 통제를 받는다. 부모의 책망과 인정을 의식하던 시기를 지나 성인이 되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자발적으로 행하게 된다. 철이 들면서 달리지는 것은, 부모의 마음과 뜻을 제대로 헤아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전통적 교리를 맹목적으로 고집하거나 기독교적 관습을 따르는 태도를 벗어나 보다 능동적인 신앙적 자세를 취하게 된다. 하나님을 더욱 알고 따르려는 열정을 지닌 자율적 태도를 지닌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자율적이란 스스로 자기의 행동을 규제한다는 사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17세기 계몽주의자들이 주장한 인간의 자율성, 즉 창조적 지성의 힘을 믿고 급진적 개인주의로 전환을 시도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신앙인은 자신과 자신의 뜻을 축으로 삼고 공전하고자 하는 유혹을 과감히 물리쳐야 한다. 중생한 성도는 자기중심에서 하나님중심의 삶이 구축되기까지 성숙해 나아가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가슴의 신앙을 강조하여왔다. 그러나 신앙의 성숙을 위해 각성이 필요하다. 하나님 말씀의 통제를 받을 뿐 아니라 더욱 그 진리를 알아가는 기쁨을 지니게 될 때 건강한 자아의식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이때 더욱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헌신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갖추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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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