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날
전통적으로 한국교회 성도들은 보수적 신앙에 뿌리를 두고 주일성수를 매우 중시하여왔다. 온 종일 거룩하게 지내도록 구별된 특별한 날이다. 이 날은 한 주간 7일 중 하루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소유하신 ’주님의 날‘로 기억하고 오직 그가 뜻하시는 대로 지켜져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래서인지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것도 잘못된 것이라 생각한다.
신앙의 선배들은 주일을 준비하는 마음의 자세가 매우 특별했다. 지저분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만나러갈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깨끗하게 세탁한 옷을 입고 예배에 참석하였다. 헌금으로 드릴 돈을 따로 떼어놓았는데, 지폐는 다리미로 펴서 가지런히 헌금봉투에 넣기도 하였다. 내한 선교사들이 초기부터 강조한 3자의 하나인 ’자급‘정신의 영향으로, 성도들은 교회사역에 헌신한 전도인을 위해 정성껏 준비한 성미를 주일에 교회로 가져왔다.
성도들은 주일에 무엇을 하고, 하지 않느냐에 큰 관심을 기울여왔다. 일단 성도들은 주일은 특별한 일을 하지 않고 주로 교회에서 보내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오전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마친 후, 홀로 또는 함께 전도하거나 성경을 읽는 시간을 가졌고, 저녁에 다시 모여 예배를 드린 후 귀가함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주일에는 오락이나 스포츠를 삼갔다. 돈쓰는 일도 금지하였다. 심지어 주일에는 공부를 하지 않는 것으로 알았기에, 월요일에 중요한 시험이 있는 경우에는 토요일 자정에 멈추었고 24시간이 지나 주일자정부터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정하고 자신을 위한 일에 얽매이지 않으려 했던 모습 속에서 전적인 신앙적 헌신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자발적이었던 신앙의 열정이 시간이 흐르면서 율법주의로 흘러갔다. 진정한 심적 자유를 상실하고 의무감에 붙잡히게 된 것이다. 남에게 거룩하게 보여야한다는 강박감 외에도, 주일성수를 하지 않으면 자신이나 가족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피해의식도 한 몫을 했다. 아무쪼록 이유를 불문하고 보수적 뿌리를 지닌 한국교회는 주일성수를 매우 중요한 신앙의 척도로 삼았다.
안식하신 하나님의 안식 따라 자연법칙 질서 속에서 이해돼야
그리스도의 구속이 제공하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 선포 기념해
주일 성수 – 변화
현대교회 성도들은 이전과 같지 않게 주일성수를 엄격하게 지키지 않는다. 교회의 주일 모습에서 가장 쉽게 그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이전과 달리 주일에 단 한번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일반표준이 되었다. 특히 오전예배를 1부 이상 드리는 경우, 다음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들을 위해 속히 예배당과 파킹장 자리를 비워야 한다. ’저녁예배‘가 ’오후예배‘로 대치되었다가, 지금은 그마저 없어지는 추세이다. 물론 찬양대로 섬기고 주방봉사를 위해서 다른 성도보다 미리오고 늦게까지 남아있는 경우가 있지만, 이전의 모습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현재 성도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주일을 보낼 수 없는 환경이다.
이런 변화가 생긴 이유가 무엇일까? 성도들이 살아가는 삶의 환경에 어떤 변화가 찾아왔는지 살펴보자. 일제강점기가 지난 뒤 조국의 광복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얻었지만 이북에 출현한 공산당은 주일에 중요 행사를 개최하였다. 이에 교회는 주일성수를 위해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6.25전쟁이 지난 뒤 남한정부 역시 주일에 행사를 계획하고 시민들을 동원하였다. 군사혁명 이후에는 더욱 빈번하여지자 교회가 연합하여 주일행사를 중단할 것을 거듭 요청하였다. 정부가 공무원시험, 주산시험과 부기시험 등을 주일에 치르자, 역시 교회는 이를 시정해달라고 거듭 요청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교회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성도들은 주일성수를 두고 갈등하게 되었다. 주님께 드리는 날이기에 자신을 위한 것은 과감히 포기해야 할 수 있다는 결단이 사회의 변화와 함께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농경사회를 지나 근대화로 인해 주일에도 반드시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하는 사회로 전환되면서 초기부터 주일성수를 중시하던 한국교회는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런 환경에 대해 상반되는 반응이 있었다. 하나는, 전투적인 태도를 고집하는 것이었다.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하나님나라와 이 세상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이원론에 입각한 것이다. 그 결과 더욱 주일성수의 의무를 강조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아예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예배로 이해하는 견해였다. 신앙생활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주일하루 또는 주일예배만 아니고, 삶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한다는 견해이다. 혹시 여행이나 출장으로 인해 본 교회에 참석하지 못해도 인근 교회에서 드리면 되고, 만일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못하면 혼자 또는 가족이 하나님께 예배하며 주일을 은혜롭게 보낼 수 있다는 생각한다.
주일 성수 – 큰 변화
위에 설명한 내용이 현대교회의 전체 모습이 아니다. 주일성수를 하찮은 것으로 자유롭게 생각하는 신앙인이 이미 대단히 많이 있고, 앞으로도 코비드-19 여파로 인해 이 부류에 속한 성도들의 수가 급격히 많아질 것이라 생각된다. 한국교회의 경우, 2011년부터 주5일제 근무가 시행되면서 주일성수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예배 시 교회 뒷자리에 앉았다 금방 자리를 뜨는 성도들의 수가 늘어나더니, 교회에서 열심을 내어 봉사하던 성도들이 주말을 껴서 가족여행을 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주일출석교인들이 줄기 시작하자 교회가 이에 대처하기 시작하였다. 아예 주일 교회를 금요일 저녁이나 토요일 오전으로 조정하기도 하였고, 떠나는 발목을 잡기 위해 주일에 유사한 레저 프로그램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대세의 흐름을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안 그래도 학생 자녀들 둔 부모들은 대학입시를 생명으로 삼아야 하는 현실을 속에서 주일성수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자녀들이 예배나 교회행사로 지장 받는 것을 꺼려한다, 아예 학생시절에는 교회를 보내지 않기로 결론을 내림으로 현재 주일학교 학생들의 수가 극감한 상태에 있다. 주일성수를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자유롭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궁극적인 원인은, 그 신앙이 이 시대의 개인중심의 세속적 사고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일? 안식일?
초기 초대교회는 대부분 유대교회에서 회심한 성도들로 구성되었다. 자연히 할례와 같은 유대인의 규범을 중심으로 혼동이 야기되었지만, 그리스도 중심의 새로운 신앙체제가 구축되었다. 주일성수도 마찬가지였다. 신약성경에는 초대교회 교인들이 안식일에 모였다는 기록이 있다. 즉 예배를 드리기 위해 토요일에 회집한 것이다. 이들 중에는 구약시대 유대인들의 안식일 제도의 연장으로 이해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초대교회 교부들은 구약 개념으로서의 안식일을 거부하였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안에서 영적 안식을 누리는 날이며, 또한 노동하며 수고하는 삶을 사는 인간이 이날 안식함으로 육체의 유익을 얻는 날이라고 가르쳤다.
초대 교부였던 이그나티우스(Ignatius, 35-107)는 ‘마그네시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제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성도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고 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2세기부터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지키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된다. 이 날은 ’안식 후 첫날‘로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사건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그들이 고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함께 모여 주님께 예배드리는 근거였다. 향후 313년 기독교인들에게 자유를 허락한 콘스탄틴 대제는, 321년에 새로운 칙령을 내려 로마제국 내에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도록 하였다. 이미 이전부터 실행되는 주일제도를 콘스탄틴에 의해 확립된 것이다.
이 전통이 중세시대에도 이어졌지만 로마가톨릭교회는 중세 미신적 전통을 수용하고 율법주의에 빠져,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이 행위의 공로로 구원받는 것과 직결된다고 가르쳤다. 이로서 루터와 칼빈과 같은 16세기 종교개혁가들로부터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주일성수에 관하여 보다 성경적이며 초대교회의 모습을 강조하였다. 미신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법과 전통에 눌려서 의무적으로 행하거나 공로적인 면을 거부하는 대신, 부활하여 새 생명을 허락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이 제공하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이 선포되고 기념되는 날임을 분명히 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청교도들은 주일성수를 어떻게 지켰을까? 이들은 다시 주일보다 안식일 개념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초대교회 성도들 가운데 유대교의 전통에 입각하여 이해했던 안식일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청교도들 역시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중시하고 그들의 주일예배의 중심으로 삼았다. 그들은 종교개혁가들과 근본적으로 일치하면서도 주일제도를 안식일제도의 연장으로 이해하고 보다 엄격하게 지킨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청교도들은 주일이 안식일 후 첫날인 동시에, 6일간의 창조 후에 안식하신 하나님의 안식을 따라 자연법칙의 질서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 안식일은 인간이 정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를 주관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것이기에 반드시 교회가 지켜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날은 하나님으로부터 쉬라고 명령받은 날이기에, 일상의 일과 오락을 금하고 휴식하여야 한다. 그 대신 성도들과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일에 집중하고, 또한 월요일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땀을 흘리며 힘차게 살아갈 준비하는 날이다.
초기 한국교회 선교사들에게 신학적 영향을 끼쳤던 조직신학자 찰스 하지(Charles Hodge, 1797-1878) 역시 청교도와 같이, 주일성수제도가 온 인류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로서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주일에 다른 일에 방해를 받지 않아야 하여, 반드시 안식일로서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보수적 신앙관이 매우 강했다.
부활 신앙 회복
현재 현대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영적 환경이 예사롭지 않다. 계몽사상, 자유주의 사상과 포스트모던 사상을 포함하여 인간중심의 사조들이 이 뒤범벅되어 숨이 막힐 지경이다. 주일은 우리 육체가 쉬는 날이다. 그러나 그냥 노는 일요일이 아니라 이 날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가 예배드리는 날이다.
교회는 성도들이 그냥 알아서 주일을 지키도록 할 수 없다. 각성해야 한다. 먼저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주일을 지나치게 율법주의에 근거해서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해왔던 것을 반성하고 회개하여야 한다. 또한 주일이 지닌 신학적이며 성경적인 의미와 가치를 분명하게 가르쳐주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온전한 주일성수를 위해 반드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역사적인 사건이며 바로 ’나‘를 위해 이뤄진 사실을 믿어야 한다. 부활신앙의 회복이 주일 성수의 첫 걸음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신앙을 가졌었기에, 코로나보다 더욱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함께 모였다.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생명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주일은 무엇을 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개인에게 허락하신 영적 자유와 기쁨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영적교제를 누리는 날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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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0.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