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택(金裕澤)은 1887년 황해도 안악 신천에서 김영식 전도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세 때인 1905년에 그는 노동이민자로 하와이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하와이로 갔다. 그는 1949년에 감리교 제9대 감독을 지내 김유순 목사의 동생이다.
하와이에 도착한 이듬해인 1906년 12월에 김유택은 호놀룰루에 있던 한인기숙학교에 재학했다. 하와이에서 공부하던 이성칠과 김수권에 이어 김유택은 이듬해 5월 28일에 상항으로 이동했다. 그다음 달초에 그는 공립협회 상항지방회에 가입했고, 6월 9일 주일하오에 있었던 토론회에서 이교담과 오대영과 함께 연설하였을 때 참석자들의 마음을 격발하였으므로 그해 7월에 김유택이 이교담, 장나득, 이병억과 함께 상항지방회 평의원으로 선임된 것 같다.
삭도 한인감리교회 예배인도자
1907년 8월에 김유택이 정인표와 윤경학과 함께 새크라멘토(삭도)에 공립회관이 설립되는 대로 학생을 모집하여 공부하기를 꾀하더니 그해 10월에 삭도로 이주했다. 그달 10일 목요일 하오 2시 30분에 상항 한인전도사 양주삼과 함께 김유택이 삭도 백인 감리교회 부인전도회 총회에 초대받았는데 양주삼은 미주한인 상황과 교회를 소개하여 남녀 백인들의 박수를 받았고, 김유택은 한국말로 찬송을 불러 그들에게 호감을 샀으니 이즈음 그는 교회 사역자로 택함을 받은 듯하다.
삭도한인감리교회가 창립되기는 1907년 10월 13일 주일이었다. 김유택은 이날 삭도한인감리교회 예배인도자로 부임했다. 1907년 10월 17일 자의 공립신보는 본 교회 창립의 정황을 아래와 같이 보도한다.
“새크라멘토에 한인회당이 설치된 것은 전 호에 기재하였거니와 금월 13일 오후 3시에 처음으로 미션에서 예배를 하였는데 한인 참석한 이가 21인이오, 미국 손님이 18인이며, 감리사 (미국인) 이 덕 박사가 요한복음 15장 4절 뜻으로 영어 강도하고 양주삼씨가 한어로 번역함에 전 회가 대단 감동하였으며, 감리교회 부인전도회 회장되는 부인도 기쁜 것을 표하여 연설하였다하며, 불구에 한인 전도사도 정하며 야학도 설시한다는데 아직은 정인표, 김유택씨가 인도한다더라.”
삭도한인감리교회가 창립되던 날 삭도지방회가 조직되었고, 김유택은 본 지방회 서기로 선정되었다. 그날 선출된 회장 김경함, 부회장 신순만, 회계 윤경학, 학무 정인표, 경찰 임애종, 사법부 김중한과 우경식, 응접부 김윤태와 손동선, 사무원 김윤택 그리고 간사 우경식 중 대부분은 삭도 한인감리교회 교인이었을 것이다. 같은 날 공립신보에 보도한 ‘삭도 야학’에서 “서양 교사를 청하야 영어와 작문을 진실히 교수한다더라”고 보도하였다.
교회 사역에는 위의 야학뿐만 아니라 토론회도 있었다. 같은 날에 양주삼 전도사가 다시 삭도한인감리교회를 방문했으니 그의 인도로 예배를 드렸을 것이다. 이날 양주삼의 방문에 동행한 황사용이 삭도로 이주했으며, 새로 회원이 된 신영구와 함께 위의 3명을 위한 환영회가 있었는데 앞서 두 명의 고상한 연설에 모인 자들이 귀를 기울였다. 위의 황사용과 신영구가 본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달 15일에 보도한 삭도 회보에 따르면 교인들의 삭도 지방회 참여도를 알게 된다. 그달 3일 통상회에서 대의원에 황사용과 정인표가 피선되었고, 윤경학과 박성태가 본회 평의원으로 선임되었다.
김유택이 그해 12월 28일에 상항을 방문했다. 상항 공립관에서 ‘나라를 강하게 하려면 군사를 양성하는 것보다 학자를 양성하는 것이 옳다’는 문제로 토론회가 있었는데 찬성편에서 김유택이 연설했고, 반대편에서 조순옥이 연설했다.
1908년 1월 7일에 삭도한인감리교회를 김유택과 함께 섬기던 정인표가 타지로 이주하여 그의 빈자리를 채우며 본 교회를 섬기는데 김유택이 바빴을 것이다. 그런데 그해 2월 5일 주일 저녁에 김유택이 상항 한인청년회에서 전명운과 함께 연설하였는데 전명운은 ‘모험시대’에 관해서 김유택은 ‘서사건국지’에 관해서 연설하였으니 그에게 삭도한인감리교회 목회에서 이만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해 5월경에 삭도한인감리교회는 예배당을 옮겼다. 그동안 삭도에 예배실과 공립대동양회와 여관 등 한인의 집이 3처에 나뉘어 있었는데 큰 집 하나를 세내어 위의 세 집이 모두 모였다. 그달 20일 자 공립신보는 이를 두고 삭도 한인들이 “매우 아름답다하더라”고 전했다. 그달 13일 자의 공립신보는 ‘장씨 전도’라는 제하에서 “동포 장원근 씨는 삭그라멘토지방에 있는 한인 교당 전도 사무를 담임하여 작일에 해 지방으로 전왕하였다더라”고 보도했다. 이로써 김유택의 사역은 1907년 10월 13일부터 1908년 5월 12일까지이다. 약 7개월간이었다.
나성한인감리교회 설교자
김유택이 “총혜한 재질이 연배 중 교초라 청년 학계에 소망이 많은 터였는데 학비가 없음으로 아직 공부에 전력하지 못하고 상항에 두류하였는데” 1908년 8월에 유지한 동포들이 의논하여 그를 미국 동방으로 보내 학업에 전심하도록 정국현이 발기하여 학비를 모금하는데, 그는 자기 힘이 닿는 대로 도와주기로 하였고, 이용주는 5달러를 기부하였다. 중가주 프레스노에 잠시 거주했던 김유택은 그해 11월에 최정준과 김대성과 함께 로스앤젤레스(나성)로 이주했다.
내한 선교사였던 프라시스 셔먼 여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남감리교 남가주 연회는 1904년 3월에 나성에 거주하던 한인 유학생과 한인 이민자를 위하여 나성한인감리교회와 한인기숙사를 설치하고, 셔먼 여선교사를 한인 선교 책임자로 임명하고 신흥우를 한인 목회자로 파송했다.
김유택은 사우스 힐 스트리트 1519번지의 한인기숙사에 입주했을 것이다. 그도 다른 한인 기숙생들과 더불어 주일 아침에는 나성 제일감리교회 영어 예배에 참석하고 곧이어 셔먼 선교사가 인도하는 주일학교에 참석했으며, 토요일 엡윗 청년회와 금요일 성경공부반 그리고 매일학교에서 활동하였다. 특별히 김유택은 주일 오후 한인 예배처소에서 한국어 주일 예배가 있었는데 몇몇 설교자 중 한 사람으로 사역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설교사역은 예배처소가 메그놀리아로 옮겨가면서도 계속되었을 것이다. 1909년 3월 김유택은 전시중과 박윤묵과 함께 중학교에 입학하더니 이듬해 23세 나이로 김유택은 네브라스카의 헤이스팅스에 있던 박용만의 한인소년병학교에서 하기 군사훈련을 받았으므로 그의 나성 설교 사역은 1908년 11월부터 1910년까지 약 1년 8개월로 본다.
에모리 의과대학
김유택은 조지아주에 소재한 린하르트 대학에 입학하여 1912년에 졸업하면서 그의 의사가 되는 학업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듬해에 그는 같은 주에 있는 에모리 대학에 입학했고, 1915년 여름에 본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한 그해에 그는 에모리 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였고, 1919년 2월에 졸업했다. 졸업한 그는 보스톤 시립병원에서 인턴을 지냈고, 뉴욕 이티카 홱스톤 병원과 버팔로 뉴욕 결핵병원에서 전문훈련을 받았다.
1921년 6월 28일에 170여 명이 모인 실버보이 청년하령회에 김유택이 이병두, 이병빈 그리고 이긍선과 참석하였다. 본 하령회 강사였던 에디 씨의 ‘인생의 세 가지 직분’이라는 연설에서 천부를 찾고, 자신을 찾고, 동족을 위하여 일함에 대하여 듣고 난 후 개인상담을 청했는데 한국 귀국은 스스로 선택할 몫이라는 대답을 받았다. “한국에 돌아가 중생을 구제하는 자선사업에 헌신할 터”였으나 한국 감리교 감독 헐버트 웰치 목사와 한국에서 사역하던 F.H. 스미스 선교사의 한국 입국 불가라는 제안에 고민하다 김유택은 귀국을 포기했다.
삭도한인감리교회, 나성한인감리교회서 설교사역
1919년 에모리의대 졸업 후 의사로...1921년 귀국불가 듣고 하와이로
1953년 하와이보건국이 나병환자 주치의로 임명
하와이 나환자 주치의
김유택은 제2의 고향인 하와이 호놀룰루로 돌아가 의사로 활동하면서도 다양한 모습을 띠었다. 1928년 1월에 누아누 청년회 부이사장 겸 통신원, 그해 4월에 하와이 대한민족 통일촉성회 위원, 그해 10월에는 엡윗 청년회 토론회의 심사위원, 이듬해 8월에 150여 명이 모인 범태평양의학대회에 참석한 태평양연안 각국대표 중 한 사람, 다음 달에 대학졸업생과 실업가로 조직된 ‘무궁화구락부’ 이사, 그다음 달에 이승만 등과 함께 하와이대학에 한국어와 한국 역사에 관한 과목을 신설하기 위한 ‘한국 국어문화 및 역사위원회’ 회원, 1930년 9월에 ‘호황 청년회’의 임시 사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의학공부를 하기 전부터 나병에 관심을 가졌고, 칼리히 나환자 입원소를 자주 드나들었던 김유택은 일반 진료를 보면서도 피부병 환자를 많이 받았다. 이러한 가운데 호놀룰루 애드버타이저는 1953년 9월 18일 자에서 하와이 보건국이 김유택 박사를 나병환자 주치의로 임명하였다고 보도했다. 데미안 신부 동상 옆에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미국 국회가 하와이 영토에 자유와 민주주의 기념으로 보낸 자유의 종을 건립한 지 3년이 되던 때다.
데미안 신부에 이어 텃턴 신부가 몰로카이 나환자 수용소로 불렸던 칼라우파파에서 1931년에 88세의 나이로 하늘의 부름을 받기까지 한국인 환자도 돌보았다. 1906년에 최초로 한인 환자를 받은 이후 1909년에는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청한 한인 환자를 귀국 조치했다. 1917년에는 10명의 한인 환자가 있었는데 이 중 1904년 17세에 하와이 노동이민자로 와서 결혼하여 행복을 찾던 중 1915년에 이곳에 와서 1917년 5월 30일에 신부전증에 정신이상 증세로 이 땅을 떠난 김 씨의 장례를 집례했다. 1923년에는 한인 나환자수가 15명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1925년 6월 19일에 들어와 그해 10월 24일에 익사한 54세의 한인도 하늘로 보냈다. 1941년 12월 월말 보고서에서 한인 2명이 요리사로 1명은 노무직으로 일했으나, 1953년 김유택은 텃턴 신부를 이은 나환자의 사역자로 변신했다.
김유택은 형 김유순 목사의 유고를 기리고자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김유순 장학금’을 설치하고 기부했다는 형제 사랑의 소식 이후 그의 자취는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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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7.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