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참 많은 소리가 있다. 특별히 2020년 한 해, 2019년이 남기고 간 코로나바이러스의 대 유행으로 여기 저기 곳곳마다 탄식소리가 들려온다. 아파하는 신음소리는 물론이고, 치료와 방역에 힘쓰는 수고로운 소리도 들려온다. 언제가 될지는 그 아무도 장담할 수 없겠지만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려는 제약회사와 연구진의 소식도 들리며, 전례 없는 사태에 힘겨워 하는 일터와 사업장의 소식도 들린다.
말 그대로 사면초가에 놓인 것 같다. 모일 수 있는 곳이라고 해봐야 아파서 가야 하는 병원이든지, 따지고 보면 또 하나의 격리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집과 같은 거주지 밖에는 없다. 공연장, 학교...... 시나브로 교회 예배당마저도 방역수칙을 준수하기 위해, 아니 구성원들과 이웃들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오지 말 것을 권장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관객 없는 공연장에서 아름다운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학생 없는 학교에서는 왁자지껄 뛰어 노는 소리들이 들리지 않는다. 교인들이 모이지 못하는 교회에서 기도 소리가 잦아드는 것만 같아서 슬프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만든 새로운 소리들은 그렇게 우리를 압도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의 모든 소리는 코로나바이러스의 필터를 거쳐서 들리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 어떤 영역도 코로나바이러스 소식에서 자유로운 분야가 없다. 심지어 우리 각 사람의 얼굴에 씌워진 마스크도 모종의 필터가 되어, 우리 서로의 소리를 부자유스럽게 만들어 버린다.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나은 건지도 모르겠다. 말 그대로 침묵하는 것이 금과옥조 같은 미덕이 된 것 같다.
그렇게 점점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엉겁결에 주어진 뉴노멀 생활패턴에 적응해가다보니, 꼭 침묵을 배우게 되는 것 같다. 말없이 있는 것을 배운다기보다는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을지라도 듣게 되는 무성의 소리가 있음을 배우는 것이다. 본래 잘 들리지 않는 소리이지만 육성으로만 들리지 않을 뿐, 영혼의 귀를 열 때, 그 어떤 소리보다 우렁차게 메아리치는 소리가 있다. 아픔의 소리들, 막막한 소리들, 그 소리들 저 너머에 우리를 부르고 계시며,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소리가 있음을 배우는 것, 바로 거기에 믿음의 진보가 뒤따르는 그런 경험을 하는 요즈음인 것 같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그런 의미에서, 소리 없는 글말로 적혀진 예수님의 물어 오심처럼 들려지는 소설이다. 근대화 과정의 일본을 배경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배격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송된 선교사들의 모습을 소설 ‘침묵’은 그려내고 있다.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파송된 포르투갈의 예수회 페레이라 크리스트반 신부가 배교를 맹세했다는 소식, 그 믿기지 않는 소식을 접하고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였던 세바스티앙 로드리고 신부가 일본으로 직접 발걸음을 옮기는 여정은 선교사로서의 부르심, 즉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은 말을 걸어오신다. 사실상 말을 거는 주체는 로드리고 신부 한 사람이다. 로드리고는 자신의 선생님이었던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를 확인하기 위해 물음표를 갖고 일본을 향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로드리고 신부는 새로운 질문들을 생산해낸다. 전파된 복음을 순수하게 지켜가는 거주민들의 신앙생활을 목격하였고, 반면에 그들을 추적하고 색출하여 잔혹하게 고문하면서까지 배교를 강요하는 일본인 이노우에의 맹렬한 활극을 목격한다.
예수님의 성화를 그저 사뿐 즈려밟고 지나가라는 배교의 갈림길에서 로드리고 신부는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질문을 품게 된다. 그것은 이제껏 자신이 배워왔던 전통적 신앙의 도그마와, 생사의 경계에 도달한 찰나의 프락시스 사이에서 과연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에 대한 실존적 질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로드리고 신부가 생산해내던 여러 가지 새로운 상황 속의 질문들은 그가 성화 속에 있는 예수님께 묻는 질문이면서 동시에 성화 속에 있는 예수님께서 로드리고에게 되물으시는 질문이기도 했다. 물론 들리지는 않는다. 침묵 속의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말을 걸어오고 계셨다. 거주민인 기치지로라는 인물은 끈질기게 신앙과 배교의 경계를 넘나드는 가벼운 인물이다. 한 때는 로드리고 신부 앞에서 고해성사를 청하며 이전에 그리스도교를 배교하고 신앙의 동지들을 배신했던 과오를 뉘우치는가 하면서도, 또 다시 죽음의 경계를 맞닥뜨리는 순간 쉽사리 배교, 배신의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등장인물로서 기치지로는 침묵하며 물음을 걸어오시는 예수님께 마치 모든 것을 다 드린 듯 충성을 맹세하지만 금세 세상의 유혹과 시험이 몰려오면 변절하고 말았던, 2천년전 유월절 배신자 베드로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로드리고 신부가 마침내 마주하게 된 페레이라 신부도 매한가지다. 기치지로를 능가하는 듯, 현실을 간파한 신지식인의 삶으로 타협하여, 이생의 안락을 누리는 번지르르한 페레이라의 모습 속에서, 로드리고 신부는 아겔다마의 심판을 면한 것 같은 새천년 가룟 유다의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예리한 칼끝처럼 겨누어진 질문들 속에서 로드리고 신부에게도 결국 오래지 않아 침묵하던 예수님의 성화가 발 앞에 다가오게 된다.
고요한 침묵이 깨어지는 순간 여전한 정적 속에서 로드리고 신부는 예수님의 소리를 듣게 된다. “밟아도 좋다. 밟아도 좋다.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나는 존재한다.” 이 말씀이 로드리고 신부에게는 질문처럼 들려온다. 숱한 선택의 순간에서 항상 좁은 길, 힘든 결단을 주체적으로 이루어왔던 그였지만 죽음을 앞에 둔 것 같은 순교의 문턱이기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침묵해 오셨던 예수님께서 응답이라도 하시는 것처럼 소리를 발하신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긴 여정을 다 마치는 무렵이 되어서야 로드리고 신부는 하나님의 음성을 명료하게 듣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물어왔던 질문들, 품고 있던 의문들, 어느 때에서야 그 대답을 듣게 될 것인가 맘 깊숙이 간직하고 있었는데, 정작은 대답을 듣고 나서야 늘 자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한결 같은 소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간 로드리고가 깨달은 셈이다.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그러나 그 침묵은 침묵이 아니다. 하나님은 침묵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다. 지금도 질문하고 계신다. 배교 아닌 배교 행위를 선택하도록 강요받는 그 순간 밟아도 좋다고, 가룟 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13:27)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소설 ‘침묵’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묻고 답을 찾고자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 말씀하고 계셨고 과연 너희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 침묵 속에 큰 소리로 묻고 계셨다. 밟히기 위해 존재하는 나를 밟아도 좋은데, 너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묻고 계시는 것이다. 이미 수도 없이 밟혀진 성화 속 예수님의 외마디가 ‘침묵’ 속에서 유독 크게 읽혀지는 대목이다.
2020년이 다 가도록 아직도 잡히지 않은 감염병 사태 속에서 나 역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며 살고 있다. 비록 고통스런 병에 걸려 생사의 기로 속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밟는 것과 같은 마음 아픈 결단을 맞닥뜨리지는 않고 있지만, 그보다는 한참 모자란 지금의 어려운 현실을 사노라면 구름 뒤에 숨으셔서 손 놓고 계신 것 같은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계속해서 주어지는 나날들이다.
‘주여! 도대체 언제서야 이 침묵을 멈추고 말씀하시렵니까. 얼마나 더 인간들이 스러져가야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는지 그 때까지가 참 두렵습니다. 모든 것이 전복되고, 심지어 교회마저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이런 현상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하기에는 믿어지지 않으니, 주여!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소서!’ 하는 기도가 탄식처럼 흘러나온다. 어쩌면 로드리고 신부의 심정이 이렇지 않았을까?
그러나 ‘침묵’을 읽고 나서 조금은 알 것 같다. 하나님의 마음을 말이다. 성화 속에 갇혀서 침묵하시던 예수님 얼굴의 입술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계시다는 소박한 깨달음 같은 것이다. 한 번도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우리를 향해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리어 묻고 계신다. “밟아도 좋다. 아니 원망해도 좋다. 버려도 좋다. 나는 밟히기 위해 존재하고, 너의 원망을 듣기 위해 존재하고, 버림받아 십자가에 죽기 위해 존재하는데, 그 무엇도 나는 두렵지가 않은데... 너는 이제 무엇을 하려느냐?”
요컨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대답, 하나님의 질문, 하나님의 침묵은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우리의 눈과 귀로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다.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질병 하나로도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고 마는 한계를 지닌 인간이 아니던가. 그런 우리가 눈으로도 귀로도 아닌 영혼의 눈과 귀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의 존재뿐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혼란한 세상이 연신 소음처럼 뿜어대는 성격의 소리들 대신 비록 침묵 같은 소리일지라도 성령의 조명 아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깨닫는 그 순간 항상 우리와 동행하시며 영원한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육성이 들려지게 된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함께 하심을 믿을 때 우리 앞에 주어진 많은 질문들은 힘을 잃게 되는 법이다. 오직 주님의 임재 안에서 누리는 참된 자유, 그 가운데 우리가 선택하는 모든 것들을 때로는 연약함마저도 사랑하사 기다려 주시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소리가 있음에 감사한다.
어려운 때에 나아가 이보다도 더 어려운 때에도 커다란 침묵 속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행진을 기대한다. 그리고 그 커다란 침묵의 행진에 발맞추어 대열을 이탈할 듯이 위태로운 내 영혼을 끝까지 견인하시는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이 있음을 믿고 전진하련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겸손히 소망하며 침묵 속에 더욱 크게 들리는 주님의 소리를 잠잠히 청종하면서 말이다.
02.20.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