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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박일우(?-?)

박일우는 평양 숭실대학 출신으로 유학차 도미했다. 그는 늦어도 1916년에 미국 가주 리버사이드(하변)으로 이주했고, 이곳 링컨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하변 한인장로교회에 등록했을 것으로 본다. 2년 후 6월에 그는 하변의 링컨 관립중학교를 졸업했다.

 

나성한인교회 영수

 

링컨중학교를 졸업한 1918년 연말에 박일우는 나성으로 이주했고, 이듬해인 1919년 2월 그는 아리조나주 찬들러로 이동했는데 학비를 벌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해 가을에 그는 나성으로 돌아왔고, 오늘날의 바이욜라대학인 나성성경학교에 입학하였다. 

나성한인교회 순행 목사였던 민찬호가 1919년에 하와이로 전임한 후 홍치범이 순회 목사로 그를 이었다. 당시 나성에 거주하는 100여 명의 동포 중 교회에 출석한 장년 교우는 40여 명이었다. 박일우는 노진국과 염세우와 함께 본 교회 영수로 재직했다. 그는 민찬호가 없을 때 다른 두 영수와 함께 예배를 인도했을 것이다. 본 교회에는 영수 외에도 집사와 권찰이 있었다. 정인영, 정지영, 염달욱 조성환, 주영한 그리고 전진이 집사였고, 김이선, 박순애 그리고 임화연이 권찰이었다. 

그해 11월 25일에 신한민보는 신실한 교회 직원과 예배당이 편리하고 설비가 잘 되어 있어 부흥의 희망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그가 영수로 있었을 때의 예배당은 두 곳으로 보인다. 1910년대의 예배당은 올리브 코트 2번지였고, 1920년대 초의 예배당은 노스 벙커힐 스트리트 240번지였다. 그의 영수직은 산타바바라로 이주하던 1921년 3월까지로 보이는데 1년 4개월 정도의 그의 영수 활동은 찾기가 쉽지 않다.

산타바바라에서 나성으로 다시 돌아온 박일우는 1923년의 10월에 김영희와 윤병희와 함께 나성한인장로교회 장로로 선정되었다. 그의 신앙관은 1924년 2월 7일에 신한민보에 게재한 아래의 “종교학설”에서 엿본다. 

 

-세인의 정신을 지배함은 종교에서 시작하고 물질을 지배함은 과학에서 생하나니 이 두 가지는 인류 사회에 없지 아니하고 가장 긴요한 요소라. 오인이 생활함에는 의식주가 문제요, 요소가 됩니다. 그 3상이 구비하여야 만사가 충실합니다. 국가의 흥망도 거기서 일어납니다. 생활상 기초를 확실히 세우려면 의식 두 가지 아니면 가능치 못합니다. 그러므로 관자의 말에 의식이 족하여야 예절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물질이 귀중합니다. 

그러나 물질의 발명도 무비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니 정신생활을 요구함이 오인의 가장 필요합니다. 과연 충분한 정신만 있으면 물질은 자연히 수입됩니다. 정신병자에게는 물질이 태산과 같을지라도 그것이 쓸데없고 설혹 물질이 다 내 것이 될 때도 내 생명 내 정신을 실하면 그 물질이 무소용이니 정신이 똑똑하지 못한 사람이 그 물질을 어찌 건사하며 보전하리오. 종교는 곧 사람의 도덕적 정신을 지배하는 일신도를 가르침이니 바른길로 가는 사람도 있고 그릇된 길로 가는 사람도 있을 터이나 그 길의 목적은 오직 하나인 한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감이라. 하나님은 하나이니 찾아가는 방법은 각각 달라서 예수교로도 70여 종이요 천도교로도 17여 종이며 기타 유교 불교 중에도 50여 종이외다. 내지에도 백년교 태국교 대종교 단군교 시천교 예수교 불교 유교가 있고 백인들에게는 그 수가 얼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종교는 각 개인 실례의 정신상 기쁨과 즐거움과 안위를 주므로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 필요하며 근본을 도려내어 부패한 사회를 혁신케 하며 사지에 생령을 중생케 하여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며 공경하여 하나님과 같이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목적합니다. 예수는 말씀하기를 상제를 두려워하는 것은 지식의 근본이요(잠1:7), 지식의 근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공경함이라, 나를 사랑하거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거든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어찌 무형한 하나님을 사랑하리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 나를 먹고 마시는 자는 목마르지 아니하며 배고프지 아니하여 속에서 생명수가 강과 같이 흐르며 죽어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하였으니 믿음은 보이지 아니하는 바람에 희망이라.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하나님과 같이 있겠다 하였으니 말씀은 곧 하나님이오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이 없습니다. 

예수교와 유교, 불교의 교지는 다 대동소이하나 죄를 회개하고 적선하라는 것과 극락세계를 원하는 것은 다 하나이외다. 후에 영혼이 천당과 지옥에 들어가는 것을 불신하는 사람은 장차 한번 시험하여 보면 자각할 터이오. 그 외에 다른 극락세계는 곧 눈으로 보는 세계이니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부귀 빈천을 물론하고 몸이 기쁘고 즐겁고 새로워 하나님을 알고 의지하고 그에게 나아가는 사람이외다. 그이는 마음의 근심도 없고 걱정도 없은즉 평안할 것이외다.

미국 신시네티에 있던 사람은 말하기를 아메리카는 6대주에 제일 으뜸이요, 미국은 아메리카 제국 중에 제일 강국이오, 나의 포도원은 미국 각 주 중에 제일가는 맛이오, 내 집 아내는 미국 내지 중에 제일 이쁘다. 그런고로 내가 세계 인류 중의 제일이라 하였으니 그의 마음이 평안한 것은 사실이외다. 이 세상은 마치 활동사진과 연극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희비극을 구경하다가 뜻밖에 꿈과 같은 이 세상을 하직합니다. 참으로 영원한 극락세계, 영원한 생명 세계는 하나님께 있나니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종교이외다. 종교에는 부강력도 있고, 인애력도 있고, 모험력도 있고, 회생력도 있고, 사생력도 있고, 자유력도 있고, 기통력도 있습니다. 옛날 앵글로색슨이 야만 정도에서 부강 문명에 이름도 종교이요, 영국을 재조한 크렘웰도 종교가요 법국의 운명을 보전한 존오포도 종교가요, 미국을 건설하고 독립한 워싱턴과 링컨도 진실한 종교가들이외다. 현대 영웅들도 다수가 종교가외다. 

독자 제군이여, 우리가 참으로 민족적 자유를 원하며, 민족적 통일을 원하며, 민족적 국권 회복을 원하시거든 우리도 각각 종교적 도덕으로 가정과 사회와 국가의 터를 삼아 군허진 우리 집을 다시 만세 만석 위에 건설하기를 위주합시다.” 

 

유학차 도미 나성신학교 옥시덴탈대학 졸업 나성한인교회 영수, 장로(장로교회) 

대한인국민회 학무원 등 조국사랑 앞장, 1927년 귀국 평양거주 2년후 행방 묘연  

 

그런데 1923년 겨울에 나성한인교회가 35, 6명의 뜻으로 나성노회에 가입했다. 당시 담임목사에 홍치범, 장로에 이살음, 윤병희, 김영희, 그리고 집사에 임지영, 황성택, 정인영이 선임되었다. 이후 몇 사람이 사임하면서 이듬해 1월에 제직원은 윤병희 장로와 정인영 집사와 정규만 집사뿐이었다. 그해 3월에 박일우는 김영희, 황성택 등 24, 5명과 함께 연명으로 청원하여 현 재직원을 불신임하였다. 이에 나성노회는 안식년으로 나성에 온 내한선교사 월리스 앤더슨 선교사를 파송하여 당회를 해산했는데, 그해 4월에는 쌍방이 충분히 이해하기 위하여 당분간 나누어 예배를 드렸다.

교회의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1924년에 박일우는 두 가지 큰일을 해냈다. 나성에 거주하던 그례션 여사가 한국의 가난한 여학교나 어려운 곳에 보조할 목적으로 한국 찬송을 가르친 백인 남녀 학생과 나성한인교회 교인의 출연으로 3월 9일 주일에 베니스제일회중교회에서 특별모임을 가졌다. 본 교회 백인 목사의 인도로 개회하고 그레슌 선교사가 한국 국기를 설명하였고, 안도산의 딸 안수산이 한국 찬송을 불렀으며, 백인 남녀 학생이 한국어 찬송을 불렀고, 김연실 여사가 한국 찬송을 독창한 후 박일우가 영어로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연설하였다. 이후 헌금순서를 가졌고, 백인 남녀 학생 4명이 촛불을 켜들고 예수의 빛을 전했으며, 그례슌 여사가 국어로 쓴 기를 본 교회 주일학교에 선물했고, 그레션 여사가 기도한 후 폐회했다. 그날 헌금한 총액은 200여 달러였다.

둘째는 박일우가 1924년 3월에 나성신학교에서 신학과와 음악과를 아울러 마치고 졸업했다. 그는 1924년 가을에 나성 인근에 위치한 옥시덴탈 대학에 편입했고, 이듬해 5월에는 본 대학 정치학과 4학년이었다.

 

나라 사랑

 

박일우의 나라사랑은 1917년에 대한인국민회 하변지방회 학무원이 되면서 나타난다. 이듬해 그는 서기와 학무원 그리고 한국학교 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19년에도 학무원으로 선임됐다. 나성으로 이주한 그는 1919년 나성지방회 서기로 활동했다. 그달에 아리조나주 찬들러로 이주한 그가 김형순의 주택에서 가진 대한인국민회 창립 10주년 기념식에서 사회를 맡았다.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 특파원 김정진이 아리조나 찬들러를 방문하였을 때인 1919년 3월 20일에 대한독립만세를 축하하는 동시에 특파원을 환영하였다. 이때 박일우는 답사 순서를 맡았다. 이날 독립의연금으로 200여 달러를 거두어 중앙총회 재무 한승곤 목사에게 보냈는데 그는 유학생의 신분에도 거금 5달러를 냈다.

박일우의 나라 사랑은 그가 맡은 직책에서 볼 수 있다. 가주 산타바바라를 거쳐 뉴욕으로 이주한 1921년 12월에 임 초를 대신하여 선출된 북미총회 제13차 대의회 헌장 수정위원, 나성으로 되돌아온 이듬해인 1923년 3월에 선임된 나성지방회 총무, 그해 10월에 지방회장의 사임으로 선출된 대리 회장, 내지수재구제금으로 1달러를 낸 다음 달인 12월에 선임된 다음 해 총무가 그것이다. 그리고 1923년에 신한민보에 기고한 “각오”와 “정돈되지 못한 오늘 우리의 시국”과 이듬해에 게재된 “남가주 아동교육문제”나 “오늘날 우리 사회 현상과 독립운동”에서 그의 나라 사랑을 볼 수 있다. 

신한민보 의무금을 낸 2달 후인 1927년 10월 7일에 박일우는 나성의 항구 롱비치에서 이창성과 함께 귀국했다. 도미한 지 2년인 1929년에 평양에서 살던 박일우는 이봉구와 김호연 등 50여 명과 함께 도미동포친목회를 조직했다. 그런데 미국 유학생들이 취직이 어려워 농촌으로 돌아가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박일우에 관한 그 후의 이야기는 묻혀있다.

 

damien.sohn@gmail.com

01.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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