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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의 “신학의 정수(A Marrow of Theology)” (5)

(4)신앙의 대상과 내용

구속자이신 그리스도는 신앙의 궁극적 대상이 아니라 매개적 대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고후3:4, 벧전1:21). 신앙의 진정한 대상은 우리가 의뢰해야 할 하나님이다(고전2:2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하나님의 의지와 우리의 구원에 주목하는 올바른 신앙을 가지려면, 인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신앙해야 한다(고전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권위는 이러한 방식으로 믿어야 할 모든 진리에 대한 직접적이고 고유한 근거이다. 신앙은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신적 계시에 의존해야 한다(벧후1;20-21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로되). 또 신앙이 신앙하는 행위를 지시할 때 신앙의 최종적인 근거는 성령의 작용과 내적인 감화에 두어져야 한다(고전12:3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게 하는 이러한 신앙은 진정한 마음의 본래적인 신뢰이다. 이런 신뢰는 확신과 기대를 위한 선하고 충분한 수단을 택하고 얻어야 할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신앙의 진정한 본질이 제시되는 모든 성경 구절에서 ‘의뢰하다’ ‘의지하다’ ‘신앙하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신앙함으로써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요,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며, 우리의 모든 충족한 삶과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다(신30:2 그에게 복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오). 신앙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게 하는 최초의 행위이므로, 신앙은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의 지식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자신의 비참함과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안에서는 구원의 수단이 전적으로 결핍되어있다는 인식과 함께 믿음으로 받아들이되, 반드시 추종하고 신실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 지성적인 인정을 통해서는 이렇게 복종할 수 없으며, 이는 오직 의지의 동의로서만 가능하다. 신뢰는 장차 오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확고한 소망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신앙의 열매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현재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제시하시는 하나님을 바란다는 점에서 신앙 자체이다. 어떤 자들은 신앙을 부분적으로는 지성 안에 있고 부분적으로는 의지 안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신앙은 단일한 덕목이요 항상 단일한 성질로 구성된 행위들을 낳기 때문이다.

지성 계발은 의지 부패 극복이 먼저...회심 가져오기 불충분

신앙 정의와 회심 가르침에 감정과 의지적 차원 동등히 강조

4)퍼킨스와 차이점 

이런 점에 있어서 그는 그의 멘토인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를 통해서는 방향을 정립하고, “신학은 잘 살아가는 것에 대한 교리다”라고 말한 페트루스 라무스(Petrus Ramus 1515-1572)의 영향을 받았다. 퍼킨스는 신학을 “영원히 복된 삶을 사는 것에 대한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퍼킨스에 따르면, 이 복된 삶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을 통해 얻어진다. 이 점에 있어서 퍼킨스의 신학은 칼빈의 신학과 라무스의 방법론을 조합시킨 것이다. 그러나 에임스는 퍼킨스가 말하는 복된 삶이 방종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퍼킨스의 견해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 

복된 삶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행복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에임스에게 있어 신학의 목적은 결코 복을 창출하는데 있지 않았다. 그는 신학의 목적이 인간의 궁극적인 열망과 욕구에 주로 관련되어있다고 느꼈다. 인간이 자신의 복만을 추구할 때, 인간은 삶의 참된 목적인 하나님을 떠날 수가 있다. 그에게 있어 신학은 기독교적인 삶을 위한 학문이었다. 신학은 아무 것도 없는 진공상태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학은 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욕구를 통해 주어지고 성립된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신학이 기독교 실천을 촉진시킨다는 것을 강조한다.

 

5)신앙에 있어 의지의 우선성

그가 강조하는 것은 그와 프라네커 대학(Franeker University)의 동료교수인 마코비우스(Johannes Maccovius, 1588-1644)와의 논쟁의 핵심 논점 가운데 하나였다. 마코비우스는 에임스와 비슷한 입장을 가졌지만, 거듭난 자의 마음속에 있는 지성의 우선성을 강조했다. 곧 의지는 지성을 통해 새롭게 된다는 것이다. 지성은 과정의 출발점(terminus a quo)이고, 의지는 과정의 도달점(terminus ad quem)이다. 그러나 에임스는 의지의 우선성을 강조했다. “신앙은 ‘전인격적인 행위’를 포함한다. 이것은 절대로 단순한 지성의 행위가 아니고, 복음을 믿을 때에 의지의 행위가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식을 구원하는 지식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구원하는 지식은 의지의 전적인 의뢰를 포함하기 때문에 단순한 지식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에임스는 “신앙은 항상 복음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의지의 행위를 따르고 그 행위에 의존하는 지식이 없다면, 어느 누구에게서도 구원하는 지식은 없다”라고 설명한다(1권 3.3-4 참고 2권 5.11-16).

그의 이런 입장은 신앙은 지식에서 비롯된다고 말한 17세기 초반에 수립된 정통주의와는 크게 달랐다. 결과적으로 에임스의 신앙과 의지에 대한 입장은 정통 개혁파의 의심을 받았다. 에임스의 계승자로서 종교개혁 이후 네덜란드의 개혁파 신학과 경건 체계를 발전시킨 지도자인 기스베르투스 뵈티우스(Gisbertus Voetius, 1589-1676)는 “구원을 의지에 귀속시키는 사상을 공개적으로 천명해온 유일한 신학자는 에임스 제외하고, 개혁파 신학계에서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정통주의 개혁파 신학의 범주 안에서 에임스는 “기독교는 성령의 역사로, 활력적이고, 진심 어린 믿음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발걸음을 갖게 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리스도께 부르실 때 사람은 수동적이지만 영적 은혜의 원리가 사람의 의지 속에 심겨진다고 한다(엡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회심의 문제에 대해, 에임스는 지성의 계발이란 먼저 그 의지의 부패가 극복되어야하므로 회심을 가져오기 불충분하다고 강조한다.

 

6)신앙에 있어 칼빈과의 연속성 

에임스는 신앙을 정의하는데 있어서 칼빈과는 다른 강조점을 갖고 있었지만 칼빈의 신학적 관점과 명백히 연속성 위에 있다. 칼빈은 신앙을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약속의 진리에 기반을 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확고하고 확실한 지식”으로 정의했으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비로 우리를 자신에게 이끌지 아니하시면, 하나님께서 진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 속에서 감정의 역할을 기술하면서, 칼빈은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온전히 뜨거운 열심히 없다면, 지성이 어떻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볼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칼빈은 “일단 어떤 사람이 감정의 자극을 받으면, 감정은 철저히 그를 사로잡아 그를 감정으로 이끈다.”라고 말한다. 칼빈과 똑같이 에임스도 신앙을 정의하고 회심을 가르칠 때 감정적 차원과 의지적 차원을 동등하게 강조했다.

의지를 신앙의 중심 항목으로 간주함으로서, 에임스는 참된 경건은 죄인인 피조물과 구속하시는 창조주 사이의 언약관계 속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를 원했다. 의지의 행위로서 신앙은 언약에 대한 순종의 참된 표지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제공된 언약의 약속들에 대해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하도록 요구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언약신학은 에임스의 신학체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hyojungyoo2@yahoo.com

01.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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