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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신앙 회복 및 부흥(復興)”(30)

7)미국의 정치관(정교분리, 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회복과 부흥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롬13:1). 

(1) 미국 독립혁명(The American Revolution, 1776년 7월 4일)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로부터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다 ……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어떠한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이다(미국 독립선언문, 1776년 7월 4일).

미국 독립 선언에 서명하는 13개 식민지의 대표들

청교도들의 정치관은 왕권신수설을 배격하고 하나님 말씀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입각하여 통치자의 권력을 제한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해 보고자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에 의해 만든 것이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가 처음으로 명기된 미국의 자유 헌법, 수정 헌법 1조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모든 사람은 평등하므로 자유롭다” 라고 선언했다. 

세상의 권세(롬13:1)는 성경의 말씀대로 인정을 하되 온 우주와 하늘과 땅의 권세자이신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권세자의 말에 충돌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복종, 선지자적 사명을 가져야 한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비텐베르크 성문 안에 95개조 반박문이 바로그 증거다. 즉, 사람은 행위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 선포가 종교개혁의 신호탄이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예수님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선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로마교황청에 항거하며 마틴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고 그 성경을 누구나 읽게 되었다. 그래서 중세 봉건사회가 붕괴되면서 사회, 경제, 정치 모든 영역에서 소위 근대 시민사회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종교영역 안에서는 여전히 교황청 아니면, 국가가 교회의 교권을 차지하는 상태였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고 만들어진 교회가 루터교이다. 루터교는 독일, 스칸디나비아 3국의 국가교회가 되었는데,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오직 루터교만 믿어야만 되는 상황이다. 

1534년에 영국은 헨리 8세가 영국교회 동의를 얻어 수장령을 발표하고 비성경적인 교회의 수장이 되었다. 이제 교황의 지배를 받던 카톨릭교회가 아니라 영국의 국왕이 지배하는 교회, 영국의 국교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영국 사람들은 국가교회인 성공회 교인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또한 1540년경에 칼빈의 개혁교회가 제네바에서 이루어졌는데 제네바 시에서는 시민들은 개혁교회만 믿어야 되는 것이었다. 1560년경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가 제네바에 와서 칼빈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고, 그래서 만들어진 교회가 장로교이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교만 믿어야 하는 것이다.  

헨리 8세가 교권을 갖고 국가교회가 된 성공회 안에 개혁적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비신앙적 요소와 전통을 제거, 개혁하기를 원했다. 바로 청교도들이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양심의 자유에 따라 성경을 마음대로 읽고, 해석하고, 믿는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비국교도들이 생겨난 것이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영국 왕에게 요청을 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의 대표적인 사례로 존 번연이 있는데 그는 침례교 방식으로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니,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곳에서 존 번연은 불후의 명작인 ‘천로역정’을 저술하였다. 

1620년 102명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영국의 플리머스 항을 출발해서 신대륙을 찾아낸 곳이 지금의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근교 “플리머스”에 내리면서 비로소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모험과 생명의 위협도 무릅쓰고 그 미국으로 가게 된 것이다. 

1773년 보스턴 차사건 이후 영국이 군대를 파견하자 미국인들은 민병대를 조직하여 대항하였다. 1775년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고 하는 명연설을 했다. 이 명언은 지금부터 225년 전 당시 39세의 변호사이자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 의원이던 패트릭 헨리가 남긴 말이다. 

영국(England)의 억압적인 지배 속에서 착취를 당하고 있던 중 영국에서 부과하는 우편세(Stamp Act) 인상을 통해 주민들의 희생이 강요되었을 때였다. 영국의 폭정에 대항해 “죽기까지 싸워야 한다”는 이 말에서 자유는 프리덤(Freedom)이 아닌 리버티(Liberty)인 것이다. 

 

청교도 정치관은 왕권신수설 배격, 하나님말씀 바탕으로 통치자권력 제한

미국의 자유헌법 수정헌법 1조 “모든 사람은 평등하므로 자유롭다” 선언

 

즉, 리버티(Liberty)는 프리덤(Freedom)보다 좀 더 격식적(Formal)인 표현으로 “내가 원하거나 소망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자유”라는 뜻이다. 패트릭 헨리의 외침(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의 기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진정한 자유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눌린 자에게 자유를,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눅4:18) 주시고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한 그 자유(Liberty)를 선포한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 폭정에서 우리가 이대로 살 수가 없으니 우리에게 해방의 자유를 주든지 아니면 우리에게 죽음을 달라고 외친 것이다. 이 연설 이후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미국 독립전쟁(Revolutionary War)의 단초가 되었다. 

1775년 제2차 대륙 회의에서 벤자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제2대 대통령), 로저 셔먼, 로버트 리빙스턴, 토머스 제퍼슨(제3대 대통령)의 다섯 사람이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 작업을 수행했다. 

1775년 제2차 대륙회의부터 미국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지적 리더십의 집단적 행동으로서의 독립선언서는 미국과 유럽의 수십 년 간에 걸친 정치적· 철학적 논쟁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제퍼슨과 그의 추종자들은 그리스와 로마 사상가들의 작품을 그 시대의 원전으로 해독하고 인용할 수 있을 만큼 고전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새로운 사상에도 해박한 사람들이었다. 

1776년 8월 2일에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주하원 인디펜던스 홀에서 13개 식민지주에서 온 56명의 파견단들은 1774년 7월 4일에 통과된 선언문에 서명을 하였다. 

이 서명자 중에는 뉴저지 주에서 온 존 위더스푼과 펜실베이니아 주의 벤자민 러시, 벤자민 프랭클린, 버지니아주의 토머스 제퍼슨, 매사추세츠주의 존 아담스, 새뮤얼 애덤스 등이 있다. 그 이후 메릴랜드 주는 가톨릭교도들이 주로 이주한 곳이었고, 펜실베이니아 주는 퀘이커 교도들이 건설했다. 최초 정착지인 버지니아를 비롯해 뉴욕과 캐롤라이나, 조지아 주 등은 국교회(영국성공회)가 주의 공식 종교였고, 매사추세츠와 코네티컷, 뉴햄프셔 등 뉴잉글랜드 지역은 청교도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가 국교 역할을 했다. 

이렇게 1776년 13개 식민지의 대표들은 미국독립선언에 서명하고 새로운 국가인 아메리카합중국(미국)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실질적 영국으로부터의 완전 독립은 7년 후이다. 1778년 미국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프랑스의 군사적 지원을 받았으며 이후 에스파니아와 네덜란드 공화국과도 동맹을 맺었다. 

미국의 대륙군은 1777년 새러토가 전투(Battle of Saratoga)와 1781년 요크타운 전투(Battle of Yorktown)에서 영국 제국의 군대에 승리하였다. 미국과 영국 제국은 1783년 파리조약(Treaty of Paris)으로 평화협정을 맺었고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미국의 국경은 북으로는 오대호와 세인트로렌스 강, 남쪽은 남쪽 경계 및 북위 31도, 서쪽은 미시시피 강으로 정해졌다. 또한 미국인에게는 뉴펀들랜드 섬에 있어서의 어업권 및 미시시피강의 항해권이 인정되었다.

kimjoyh@gmail.com

12.12.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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